약속, 소망, 그리고 생명
행26.1-18
시 작 기 도
주님을 잊고 죄에 넘어지면 그 결과는 주님의 생명을 빼앗기게 됨을 봅니다. 그 생명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그 생명으로 순종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에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가장 먼저 주님이 멀게 느껴지고 믿음으로 나아가기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용서했던 사람도 다시 미워지고 평화로운 관계가 소원해지고 삶에서 비전과 목표가 흔들립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황당함이,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찾아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영원한 대제사장님 예수님이 계셔서 그의 희생으로 영원히 내 죄가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도 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작든 크든 죄를 지을 때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명을 구합니다.
본 문 내 용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을 하도록 허락하자 바울은 손을 뻗어 변호를 시작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오늘 내가 왕 앞에서, 유대 사람이 나를 고발하는 일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왕은 유대인들이 풍속과 쟁점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끝까지 참고 잘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우리 나라와 예루살렘에서 젊어서부터 살아온 삶을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분파인 바리새파로 살아왔음을 그들이 인정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그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여기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열두 지파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망 때문에 유대 사람에게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십니까?
나도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데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들에게 권한을 받아서 그들을 투옥시키고, 처형하는 데 동참하였고, 회당마다 찾아가며 형벌하고, 그들이 부인하고 모독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분노가 극에 달하여 외국에 있는 도시까지 가서 박해의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다마스쿠스로 가서 이런 일을 하려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낮에 햇빛보다 더 눈부신 강한 빛이 우리 일행을 덮쳤고 우리는 모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로 차니 너만 괴로울 뿐이다” 하시기에,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자 이제 일어나서,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너에게 장차 보여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과 이방사람들에게서 너를 건져내어서, 이방사람들에게로 너를 보낸다. 그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서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하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해
지금, 위엄과 거창한 의식을 차린 왕들과 통치자들 앞에서 바울이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은. 다메섹에서 눈이 먼 사울에 대해서 아나니아에게 내린 주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입니다(9.15). 바울에게 하신 ‘가시돋친 채찍을 발로 찬다’는 비유는 당시 통용되는 격언으로서, 사람은 신의 뜻에 저항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소를 몰아갈 때 쓰는 채찍과 같은 막대기는 날카로워서 쿡쿡 찌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전부터 회개를 촉구하며 양심을 찌르셨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여호와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약속 하신 것을 소망하는 데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바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생명을 약속하셨고 그 생명으로 부활하는 소망으로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 같은(히11.12) 자기 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받았고, 그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기 직전 그를 살리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히11.19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받음). 이것이 부활의 신앙이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영원에서 하나님은 생명(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딛1.2). 그것이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이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결국은 부활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라고 반대하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바울을 보내시는 주님은 모든 민족이 바로 이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눈이 열려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그 생명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그 생명은 믿음을 주어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설명하시는 것입니다(18절).
복음은, 약속하신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독생자)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아멘.
나 의 묵 상
주님이 약속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주신 ‘생명’을 귀중히 여기지 않고 풍성히 자라게 하지 않고 낭비하고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소망하지 않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이고 실패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생명의 약속에 대한 증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없으니 하나님과 관계 사람의 관계에 온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순종의 삶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경험한 부활의 신앙이 나에게도 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생명이 그것을 믿는 나에게 임하였습니다. 이제 어둠에서 빛, 사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거룩한 사람으로 주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것에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삼위 하나님 품에 머무르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기 도
주님의 부활 생명을 소망하며 사는 믿음을 부어주소서. 빛을 비춰 주시사 주님의 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모든 사람, 모든 민족들이 부활 신앙을 갖게 하소서. 복음이 약속하신 생명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는 것임을 모두 알고 받아들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