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로 2006년 12월31일에 출발하여 평소 함께하던 교우들과 성지순례를 떠났다.
2007년 1월1일을 성지에서 보냈다.
솔뫼성지, 신리성지 순례를 한후 마애불상을 돌아보고
해미성지에서 세모를 보낸뒤 해미성지를 순례후 해미성당 미사에 참례하였다.
미사참례후 많은 신자들이 처형당한 해미읍성을 돌아본뒤 수덕사에 들렸다
점심을 먹고 귀가길에 올랐다.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온 빌라노바부부 차로 서울에 올라왔다.
순례하는 동안에는 많은 것을 보고 들을려는 생각에서인지 의미를 몰랐으나
집에 돌아와 가만히 묵상해보니 참 뜻깊은 순례였다.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님의 생가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
25세의 나이로 순교하기까지 교통수단도 불편했던 그 시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던 신부님을 생각하니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
부끄러움을 금할 수없었다.
안내 수녀님께서 신부님 생전의 혼이 들어 있는 것은 생가뒤 기념탑으로 가는 곳
소나무 한그루라고 하시면서 매일 몇번씩 부등켜 안으신다고 하시며
한번 안아보라고 하셔 한아름 반정도의 소나무를 안아보고 왔다.
신리성지에 도착하니 여수출신 남수녀님이 계셨다.
수녀님과의 만남으로 더욱 감회가 깊었으며 수녀님께서 부탁해서인지
신부님께서 직접오시어 성지역사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손씨 일가의 수많은 신자들이 살았는데 순교당하여 지금은 손씨성을 가진 분이
한분도 없다는 것이었다.
야외미사터가 있어 야외미사도 집전하시냐고 물으니 한번도 못했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순례자 신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신부님과 잠깐 대화중에 신부님께서 그러신다.
우리나라에 형이상학이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신자들과 해맞이 준비를 하시고 있는 신부님,
순례지 성당에서 많은 기도를 하고 계시리라 생각되었다.
지금 돌아와 생각하니 정말 마음 아픔이 있으니
얼굴이 부성부성하고 걸음걸이도 두벅두벅 걸으신 노수녀님께 인사도 못하고
손도 잡아주지 않고 온것이 정말 가슴아프다.
신자라고 하지만 몸에 베이지 않은 습성때문이 아니겠는가?
수녀님께 죄송함을 전하며 건강하시기를 수녀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드린다.
온천욕을 하고 식당에 들려 저녁을 먹은 뒤 숙소로 돌아와 저녁행사를 하였다.
아침 일어나 떡국으로 새해를 맞은 후 해미성지를 순례하였다.
해미성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곳이라고 하였다.
성당과 여러 시설이 특색있게 건립되어 있었다.
해미성지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할려고 하였으나
일정상 해미성당 10시미사에 참례하였다.
시골 성당인대도 많은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하였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신자들에게 소개해 주셨다.
뿌듯함도 있었지만 한편 죄송스러움도 있었다.
나만 너무 행복해하고 있는 생각에서였을까?
해미읍성에 들렸다.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는 곳
지금 많은 복원공사를 하고 있었다.
마애불상과 수덕사는 또 한편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유산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짧고 30여명의 인원이 함께 이동한 관계로 순례기간중에는 몰랐으나
아주 뜻깊은 순례였다.
다시 조용히 혼자 또는 두세명이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순례를 떠나고 싶다.
성지를 밟고 순례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순례지성당 신부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역시 순례를 떠나기에 앞서 많은 기도를 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진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속 삶이 순례지로 바로 연결되면 순례의 의미가 감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서이지만
너무 편하게, 너무 풍족하게 다녀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나라에서 순교성인들의 공덕에 힘입어 내가 주님의 은총안에 평화를 누릴진데
가난, 겸손,공경,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순례의 길에 오르지 않는다면
순교 선인들께 누를 끼침이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름없는 많은 순교자들과 103위 순교성인을 위한
'103위 한국성인 호칭 기도'를 드린다.
첫댓글 내가 주님의 은총안에 평화를 누릴진데 가난, 겸손,공경,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순례의 길에 오르지 않는다면 순교 선인들께 누를 끼침이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든다.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은총 가득한 성지순례를 함께 하는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