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경제사-3rd
1차 대전을 치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야 했다는 데에 있었다. 불구가 된 사람, 굶주린 사람, 형제, 아버지, 남편, 아들을 잃은 사람 등 이 무수한 사람들은 그렇게 스러져간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어야 했다. 정치지도자들은 ‘전쟁 영웅에 걸맞은 나라’를 창출하려고 노력했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복지 및 인프라 프로그램을 정부가 책임지고 떠맡는다는 것, 그리고 노동계급 남성들에게, 나아가 모든 여성에게까지 투표권을 확장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요구가 나타났다. 엄청난 정부 지출이 이어지고 유권자들은 가치를 상실한 자기 재산의 보상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들어주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갈 터였다. 그 결과 재정적 물가 이론이 작동했고,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경제학의 좁은 시각으로만 보면, 인플레이션은 그저 세금, 재조정, 혼란일 뿐이다. 우선 인플레이션은 현금에 대한 세금이다. 현금의 가치가 그것을 획득한 시점과 그것을 사용하는 시점 사이에 하락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재조정이다. 돈을 빌린 사람들이 가치가 떨어진 통화로 대출을 상환하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가치가 떨어진 통화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은 혼란의 근원이다. 계좌에 입금되는 금액이 그 임금 날짜마다 각자 다른 구매력을 가지므로 기업, 가정, 개인으로서는 무엇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인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차대전으로 망가진 것은 다 복구할 필요가 있었다. 금본위제도의 수리를 뜻한다. 이 조치는 부자들은 기쁘게 한다. 금본위제는 인플레이션을 막는 하나의 안전장치가 생길 터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말이 되면 서유럽의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천박한 거짓말이 지배했던 전쟁이 벌어진 1910년대만이 아니라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귀족, 장군, 정치가 등이 안장에 앉아 세상을 이끈 시대의 마지막 헐떡거림이었으며, 그 결과는 거의 완벽한 파국이었다. 전쟁 이후 경제학자들이 안장에 앉았다. 이들이 내놓은 정책들은 그전처럼 1,000만 명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신속한 성장, 안정된 소득, 물가 안정, 완전고용 등을 가져오는 데에는 실패했다. 시장경제에는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상인이 농부들에게 공예품을 팔려 하지만 농부는 살 생각이 없다. 장인은 소득이 없어 농산물을 살 수 없고, 결국 농부들도 자기들이 기른 작물을 판매할 수 없게 되는 사태다.
‘레닌’의 사회주의 깃발 아래 모인 사회주의자들은 소수의 집단이었다. 내전을 겪으면서 연마를 시작한 이들은 자신들이 운영하고 현실사회주의라는 수단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함을 알게 된다. 아주 큰 나라인 러시아는 누구도 사회주의가 시도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던 나라다. 전시 공산주의로부터 ‘신경제정책’으로 후퇴해야 했다. ‘레닌’은 자신의 혁명 이후 오래 살지 못했다. 1922년 5월에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일어났다 하다 1924년 1월 혼수상태에서 죽는다. 그는 자신의 유언장에 후계자에 대해 썼다. ‘레닌’의 후계자는 당이 선택 하도록 되었다. 당은 인민이고 인민의 선택은 서기를 임명하는 서기장인 ‘스탈린’이었다. 3년 뒤에 스탈린은 최고지도자가 된다.
소련 정부는 2,500만 농민 중 94%를 국가 소유의 집장 농장으로 모았고, 집단농장 하나당 농민 숫자를 50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농민이 총살당했고, 무수한 이들이 굶어 죽었다. 농민이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마도 1,500만 명 정도가 죽었다. 농업생산은 1/3이 줄었다. 소련의 가축 수도 절반으로 줄었다. 농민들은 농노제 시행을 간파하고 정부 관료들이 빼앗아 가기 전에 자기들이 가축을 도살하여 먹어 치우는 일도 빈발했다. 공장노동자들도 위에서 할당한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총살당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가 수백만 사람으로 채워져 이들로 인해 ‘수용소 군도 Gulang Archipelago’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파시즘은 끔찍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로 보였다. 모든 이들이 한데 뭉쳐서 막지 않았다면 파시즘이 이 공포의 경주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파시스트 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5,000만 명은 파시스트들이 이 세계에 대접하고자 꿈꾸던 만찬 중의 애피타이저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근본적으로 경제를 처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이전은 사람을 계급으로 나눴고, 협상하고 충동하는 이해집단의 정치를 만들어냈다. 파시즘은 통일된 국민, 연대 공통의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유한 사장이 노동자 집단과 교섭하는 시장경제로는 이러한 통합을 만들 수 없다. 당시 세계 경제는 글로벌 자원의 분배라고 파시즘은 주장했다, 문제는 가난하고 과도한 노동의 부담을 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라 자원, 식민지, 토지를 빼앗긴 프롤레타리아 국가다. 파시스트 지도자의 한 가지 주요한 목적은 세계 경제를 ‘뿌리 없는 세계시민’으로 이루어진 일부의 글로벌 엘리트가 아니라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무솔리니의 대단한 속임수는 전 세계나 이탈리아인들에게 자신과 파시즘이 실체가 있는 무언가라고 확신시킨 것이었다고 선언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이탈리아의 선출된 정치인은 파시즘에 대한 탄압과 협력을 번갈아 시도했다. 선거에 승리한 ‘무솔리니’는 자신이 수상으로 임명되지 않는다면 이탈리아가 대규모 폭력 사태로 통치불능에 처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국왕은 무솔리니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1939년 3월 독일 전차부대에 프라하 진군을 명령했다. ‘맬서스’의 경제학에 기반한 아리아 인종의 지배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 즉 나치즘을 시험대에 올린다. 독일의 전차부대가 소련으로 공격하여 자신의 새 이데올로기를 추구했다. 그는 독일 동쪽 경계 너머의 모든 슬라브 민족들을 말살시키고 쫓아내고 노예로 만들고자 했다. ‘히틀러’의 나치군을 앞세운 침략에 ‘스탈린’은 나치를 ‘자극할 위험이 있으니 일체 반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결과 소련의 공군은 파괴되고, 육군도 서있던 자리에서 죽거나 포로가 된다. ‘스탈린’은 군부에서 위협이 될 사람은 누구든지 숙청한다. 1941년 나치의 보급선이 끊어져 잠시 전진을 멈춘다. ‘스탈린’은 독일군에 반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독일군은 400만 명이 포로가 된다. 1942년부터 2차 대전이 진정한 세계 전쟁이 되자, ‘히틀러’의 패배는 거의 불가피했다.
‘흐루쇼프’는 1990년이면 크렘린 궁전의 자신의 후계자들에게조차 현실사회주의가 인류에게 막다른 골목이라는 점이 분명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성공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을 매장했던 것도 아니었다. 냉전은 벌어지지 말아야 할 사건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은 대전 이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닌’이 볼 때 자본주의는 제국주의가 필요했다. 제국주의는 캡티브 마켓을 제공하는 식민지와 무기에 대한 엄청난 수요와 함께 군사화를 낳았다. 이런 것은 완전고용에 가깝게 경제를 유지하고 공항과 같은 경제위기를 막는 데 필연적이다. ‘레닌’의 후계자들은 자본가들이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더 이상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파시스트들을 지지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탈이라는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프랑스의 ‘필리페 페탱’, 일본의 ‘도조 히데키’가 각각 나타났다. 이러한 파시즘으로의 전환은 제국주의와 국구주의를 필요 없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필요하게 만들었다.
1950년대 서유럽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DC를 설립하고 석탄과 철강의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이 기구가 훗날 유럽연합 EC가 된다.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은 국제무역을 자국의 번영뿐 아니라 국제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보았으므로, 이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이 무렵 국제적인 자선 원조가 사라지고, 자유세계와 글로벌 공산주의의 기나긴 황혼의 싸움에 즉각적인 현금을 지원해달라는 요구가 나타났다. ‘마셜’플랜의 시기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혼합경제’가 만들어졌다. 혼합경제는 대규모의 사회보험 국가, 일부 산업과 유틸리티 부분의 공공 소유, 상당한 정도의 총수요 관리 등의 맥락에서 가격의 자유로운 작동과 환율 안정을 회복하고 시장의 힘에 의존하는 경제이다.
김일성은 남한을 접수하기 위한 탱크와 지원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남쪽에 미군은 철수하고 없었다. 미군의 방위선이 “알루이안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를 지나 필리핀에서 끝난다고 했다. ‘스탈린’은 소련에서 훈련받은 김일성의 군대를 전쟁의 개로 풀어놓았다. 미국이 UN소집을 하자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이 깜짝 놀란다. 그리고 UN군이 파병된다. 한국전쟁 중 ‘스탈린’은 뇌졸중으로 죽고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한국전쟁이 무의미하며 끝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한국전쟁은 한국에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세계를 변화시킨 나비의 날갯짓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전에 비해 군비 지출을 다섯 배로 늘리고 진정한 글로벌 영향을 추구하도록 하는 새로운 경로로 들어섰다. 간단히 말해, 한국전쟁의 결과 미국은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4.10.12.
20세기 경제사-3rd
브레드퍼드 들롱 지음
홍기빈 옮김
생각의힘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