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고객을 가진 1위 리테일 뱅크 국민은행이 흔들리고 있다. 도쿄지점에서 지점장이 1700억원 부당대출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해온 것이 드러난데 이어 국민주택기금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90억원 규모 횡령을 한 것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직원들의 도덕성과 경영진 내부통제능력에 문제가 있음이 두 사건을 통해 나타났다고 금융권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외풍에도 쉽게 흔들리는 국민은행의 취약한 지배구조가 근본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쿄지점장 부당대출하고 금품 수수
도쿄지점 부당대출은 2012년 국민은행 내부 감사를 통해 적발됐다. 당시 국민은행 도쿄지점의 실적이 뛰어나 이를 포상하려던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조사를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부당대출을 해준 것이 드러났고 이 모 전 지점장은 올해 1월 대기발령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와중에 일본의 금융감독기관인 금융청이 국민은행 도쿄지점을 검사 하던 중 자금세탁 혐의를 발견하면서 이 사건은 세간에 드러나게 됐다. 금융감독원 조사결과 도쿄지점은 2008년부터 일본 현지 기업들에 1700억원 규모 부당대출을 실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도를 넘는 대출을 받기 위해 바지사장을 내세우거나 담보가 확실하지도 않은데 대출을 해주는 식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출을 해주는 데 따른 금품을 받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 지점장은 이렇게 받은 금품으로 수십억원 비자금을 조성해 국내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 12월 11일 이 지점장을 구속해서 조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부당대출과 금품수수에 이 전 지점장 뿐 아니라 다른 도쿄지점 직원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 부지점장인 안 모씨도 이 지점장과 같은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금융청이 17일 공동으로 도쿄지점을 조사하기 시작하자 도쿄지점에서 현지에서 채용한 한국인 직원 1명이 은행 서고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일본 현지에서는 대출업무를 담당했던 이 직원이 금융청 조사가 시작되자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선 직원들까지 조직적으로 부당대출에 연루되어 있음을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각에서는 조성된 비자금이 KB금융지주 및 국민은행 경영진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도쿄지점은 국민은행의 내부감시 사각지대에 있었다. 시중은행에서 도쿄지점장을 지낸 한 은행원은 “국민은행은 도쿄지점장 전결로 5억엔(약 50억원)을 대출할 수 있었다”면서 “다른 은행에서는 본사 결재가 없으면 대출 자체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히 합병전 구 주택은행 출신이 도쿄지점장을 돌아가며 맡으면서 부당대출을 통해 재산을 축적했다는 의혹도 현지에서는 나오고 있다. 잘못된 관행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고 이를 본점에서는 장기간 모르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채권 상환업무 담당직원이 위조로 90억원 횡령
국민주택채권 횡령사건은 지점장 급이 아닌 일반 직원이 저질렀다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이다. 특히 횡령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오랫동안 해왔다는 부분에서 한편의 범죄영화 같은 사건이다.
국민주택채권은 우리가 집을 살 때 의무적으로 사게 되는 채권이다. 서민의 내집마련을 지원하는 국민주택기금이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다. 지금은 전자식으로 되어 있어서 실물을 볼 기회 없이 바로 할인해서 매각하게 되지만 2004년 이전에는 실물이 발행됐다. 국민주택채권은 대표적인 할인채다. 5년만기 채권이라면 이 채권을 8000원에 구입한 후 5년 후 국민은행 창구로 가져가면 1만원을 준다. 그런데 이후 5년이 지나도 상환받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지나 국고인 국민주택기금에 귀속된다. 실물로 발행된 국민주택채권의 경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국고로 상환되는 금액이 상당했다.
횡령은 이런 상환업무를 담당자인 국민은행 본부 주택기금 사업부의 박 모 차장이 저질렀다. 국민주택채권이 소멸시효가 되도 찾아가지 않는 규모가 상당한 것을 알게 되자 본인이 채권을 위조해서 대신 받아가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른 은행창구 직원과 공모했다는 점이다. 위조한 채권임을 들키지 않으려면 창구직원의 묵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 직원이 횡령한 금액은 2010년부터 최근까지 90억여 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횡령 과정에서 많게는 10명의 국민은행 직원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직원이 횡령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일부는 공모한 직원들에게 준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은행 내부에서는 나오고 있다.
국민주택채권 상환업무는 엄밀히 말해서는 은행업무는 아니다. 국민주택기금의 업무를 국민은행이 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 주택은행이 국민주택기금 관련업무를 하고 있었고 구 주택은행과 구 국민은행이 합병하면서 국민은행이 자연스럽게 맡게 된 업무다. 이렇다보니 상대적으로 내부통제가 소홀했고 이런 헛점을 노리고 횡령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박 모 차장의 지시를 받은 지인이 공모한 창구직원이 아닌 다른 창구직원을 찾아가 상환을 요청했다가 발각됐다. 공모한 창구직원이 마침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완전범죄가 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은 우연한 실수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윤리문제냐 내부통제냐
이 두 사건의 파장은 컸다.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지난 11월 27일 여의도 국민은행 본사에서 머리를 숙여 대국민 사과를 했다.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대대적인 쇄신책을 내놓겠다고 공언했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도 기자들을 만나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난 12월 18일에는 박동순 국민은행 상임감사가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금융당국과 다른 금융권에서는 국민은행 ‘내부통제’의 문제를 먼저 지적했다.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행은 씨티은행 출신인 강정원 전 행장 때 선제적으로 내부통제장치를 마련해 다른 시중은행들보다 내부통제에 앞서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두 사건처럼 은행원 여럿이 함께 공모를 한다면 내부통제장치로 이를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제도의 문제도 크지만 사람의 문제라는 지적이 많이 나오는 이유다. 부당대출을 하고 금품을 수수한다거나, 채권을 횡령하는 일은 윤리의식의 부재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국민은행의 잘못된 조직문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국민은행의 지배구조를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국책은행이었던 구 국민은행과 구 주택은행은 2001년 인위적인 합병을 통해 1등 메가뱅크로 탄생했다. 이후 국민은행의 CEO는 외부의 입김에 따라 수시로 바뀌게 된다. 통합 후 초대 행장인 김정태 전 행장은 회계기준 위반으로 금감원으로부터 문책경고를 받으면서 연임에 실패했다.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은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재직 시 파생상품 투자로 대규모 손실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역시 금감원 제재를 받고 1년 만에 회장자리에서 물러났다. 강정원 전 국민은행장은 카자흐스탄 BCC(뱅크센터크레디트)은행 투자손실 책임을 지고 중징계를 받고 지주 회장 도전에 실패했다. 어윤대 전 회장은 취임때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가깝다는 점 때문에 회장자리에 올랐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바뀌면서 어 회장도 연임에 실패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재부 출신인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이 취임하면서 이번에는 모피아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말도 나온다. 안정적인 지배구조 하에서 한 사람의 CEO가 오래 재임하는 신한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와는 차이가 크다.
이처럼 CEO가 바뀔 때마다 조직의 분위기와 실세가 수시로 바뀌다보니 줄서기 문화가 생겼다는 것으로 금융권은 분석하고 있다. 국민은행(1채널)과 주택은행(2채널) 중 어느 출신인지를 따지는 채널문화도 생겼다. 고유의 국민은행 조직문화를 갖지 못하다 보니 구성원에게도 이기심과 함께 도덕적 불감증도 생긴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