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무덤의 노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메멘토모리/아모르파티/카르페디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푸쉬킨의 시가 생각나는 날들이 있거들랑 차라투스트라의 이 글을 염두에 두세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무덤의 노래〉와 〈자기 극복의 노래〉를 읽고 예전에 써 두었던 내 글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내 생각을 썼다.
나는 <무덤의 노래>를 이렇게 해석하였다. 이 글을 읽고 있다 보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자라도’ 시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니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의 큰 맥락 아래를 흐르는 또 하나의 강줄기는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고 생각되었다. 나에게 <무덤의 노래>는 이 시에 대한 니체적 해석의 각주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제목을 ‘아모르파티’로 바꾸어도 될 정도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무덤’이 내포하고 있는 것들에서 ‘메멘토 모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의 무덤은 “거기 내 젊은 시절의 무덤들도 있다”에서처럼, 이 무덤은 곡두들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저마다 그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의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무덤의 노래〉를 니체의 내면의 존재자들과 그 존재자들이 외부의 타격에 의해 스러져간 것을 모사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존재는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다. 더구나 어떤 희망들은 너무도 부질없이 스러지기도 하고 시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때마다 무덤의 섬에 곡두의 무덤 하나가 늘어간다. 누구나 마음 안에 공동묘지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곳은 그 자신의 곡두들의 공동묘지이다.
“바로 그 때문에 너희는 젊어서 그것도 아주 일찍 죽어야 했던 것이다” 곡두들은 언제나 젊어서 죽는다. 그것도 아주 일찍 죽는다. 그 곡두들이 죽을 때마다 어떤 감정들은 고통이 되어 몸서리쳐지며 전환을 일으킨다. 곡두들의 주검을 밟지 않고 존재로 온전하게 있는 자는 없다. 곡두들의 상속자인 존재는 “너희에 대한 추억을 일깨우는 다채로운 야생의 덕이 꽃을 피우고 있는 너희의 토양이다” 그렇다. 존재는 곡두들의 대지이다. 곡두들이 일찍 죽어간 이유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찍 죽어간 모든 곡두들의 현재는 ‘카르페디엠’이었다. 그러므로 신성한 시간이었다. 그때 순전純全한 영혼이었다. 차라투스트라의 적은 누구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너희’라고 말한 그들은 누구인가?
순결을 죽인 유령, 신성을 죽인 번민, 갈망을 죽인 역겨움, 모든 역겨움을 뿌리치겠다던 고결한 다짐을 죽인 농양, 복된 길을 죽인 오물, 극복의 승리를 죽인 이간질과 모략, 덕의 신념에 상처를 내어 죽인 연민의 정, 가장 신성한 제물을 질식시켜 죽인 기름덩이에서 피어오르는 증기속의 경건, 여지껏 춰본 적이 없던 황홀경의 춤을 죽인 가인의 소름 끼치는 노랫가락.
유령/번민/역겨움/농양/오물/이간질과 모략/연민/경건/노랫가락이 차라투스트라의 영혼을 죽였다. 곡두들의 무덤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순결/신성/갈망/고결한 다짐/복된 길/극복의 승리/덕의 신념/신성한 제물/황홀경의 춤은 모두 곡두들이다. 그러니까 이건 차라투스트라의 현재들의 시간이었다.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들 역시 자기의 그림자가 아닐까. 곡두들은 여기서 그 자신의 환영이자 환상이면서 어떤 비전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보통 신기루라고 번역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망각 역시 빠르게 일어난다.
그러나 무덤은 그 자신의 고통과 직결되는 것이고 그것은 감정으로 남아 있다. 기억이 휘돌 때 감정 역시 되살아 난다. 그것들은 서로 같이 맞물려서 공진화하고 있다. 사람은 그 자신의 비전을 스스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기호와 같아서 그것들이 보여 지는 존재자들은 아니지만, 분명 그것들은 자기 안에 있는 존재자들이다. 왜냐하면 신체에서 비롯된 곡두들이기 때문이다.
“나 어떻게 이 일을 견뎌냈지? 나 어떻게 이 같은 상처를 이겨내고 극복했지? 어떻게 나의 영혼은 이들 무덤으로부터 다시 소생한 것이지?”
그 시간을 지나서 곡두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어떻게 살아났을까?
“ 그렇다. 내게는 상처를 입힐 수 없는 불사신적인 것, 영원히 묻어둘 수 없는 것, 바위까지 폭파해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다. 나의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나의 의지는 묵묵히 그리고 변함없이 세월을 가로질러 간다.
나의 친애하는 의지는 나의 발로 그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의 기질은 박정하며 상처를 입는 일이 없다.
나는 발꿈치에서만은 상처를 입치 않는다. 너 더없이 인내심 많은 자여, 너 여전히 살아 있고, 변함이 없구나! 너 여전히, 무덤이란 무덤은 다 뚫고 나왔지!
내 젊은 시절의, 구제받지 못한 어떤 것이 네 안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그래서 생명과 젊음을 구가하며 너 희망을 품고 여기 폐허가 된 노란 무덤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 너 여전히 무덤이란 무덤을 다 파괴하는 자다. 나의 의지여, 건투를 빈다! 부활은 무덤이 있는 곳에만 있게 마련이니. ”
불사신적인 것/영원히 묻어둘 수 없는 것/바위까지 폭파해버리는 어떤 것, 즉 세월을 가로질러 가는 ‘의지’이다. 의지는 상처 입는 일이 없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의지는 그렇게 자기 길을 간다. 의지는 무덤이란 무덤은 다 뚫고 나왔다. 사지 안에 갇혔던 일찍 죽어간 곡두들은 생명과 젊음을 구가하며 늘 그 모습 그대로 희망을 품고 폐허가 된 노란 무덤에 앉아 있다. 무덤이란 무덤은 다 파괴하고 무덤 밖으로 나와 그렇게 순전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곡두들의 부활이다. 일찍 죽어간 곡두들의 무덤은 언제나 다시 부활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메멘토 모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일어난 현재의 시간들 그러니까 그때 꿈꾸고 행했던 것들이다. 몸은 매순간 그 자신 안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매순간 애도한다. 또한 어느 순간에서 그때의 역할을 맡았던 그 자신의 죽음도 경험한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 그 자신의 부활 역시 경험한다. 의지와 의지의 이어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자신은 언제나 그 자신의 페르소나를 창조한다. 그 페르소나는 그리고 그때에 태어나고 또 어느 순간에 죽는다. 어찌 보면 이 페르소나를 요즘은 ‘부캐’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한 시기의 현재는 한 시기의 부캐가 담당하고 있다. 그 부캐는 그때의 희망이자 꿈이다. 그때는 그 부캐가 그 자신이 만든 가장 최신 버전이다. 그러나 그 버전은 곧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은 때마다 어떤 역할에 의해 그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한다. 이를테면 사회나 직업 또는 만남 등은 모두 그때의 그 자신의 캐릭터가 튀어 나오는 것이다. 이 캐릭터는 그 자신이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그 캐릭터에 그 자신을 담는다. 그렇게 하나의 신체는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며 그때그때 주어진 역할을 소화하며 살아간다.
하나의 캐릭터를 벗는 순간이 그 자신이 변태에 들어가는 시간이다. 어떤 모습으로 확정되지 않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캐릭터의 시간에서 그 자신은 자연인이 된다. 은둔자의 형태로 그 자신의 동굴에서 산다. 그리고 무수한 자기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무덤들에 화환을 바친다. 그 무덤들은 곧 파괴될 것이고 곡두들은 부활할 것이다. 애도와 리비도 회수라는 동시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중의 의미를 갖는 화환을 바쳐야 한다.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 할 것이므로.
혹자는 그래봤자 사람은 늙어갈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뭐 어때서! 늙어감을 담보로 인간은 시간 속에 베팅을 하는 존재다. 인간의 삶 속에 메멘토 모리가 아닌 순간은 없다. 다만 미래로 기투하는 자신의 의지가 그것을 보류하고 있다. 자기 안의 죽음을 경험하는 자신은 그것으로 그 자신을 밀고 나가며 미래를 연다.
이렇게 썼지만 막상 자기 안에서 늘 감지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생각을 해보지 않으면 감정으로까지 전이가 잘 안 되어 느끼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면 상상이 안 되니, 그 무덤들이 있는 곳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일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결국 기억의 치밀함이 약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미래를 상상할 때 하는 AI와 로봇형 인간에 대해 말할 때, 휴머노이드가 몸을 바꾸어 가며 업그레이드되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점점 늙은 몸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캐릭터의 교체는 그 자신의 창작력이다. 그리고 그 자신과의 교감에 의한 결과다. 인간은 다만 늙어갈 뿐, 기억을 치밀하게 사용한다면 인간 역시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치밀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현재에서 공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 공은 몇 초 후에 그 자신이 받을 수도 있지만, 시간 안에서 숙성되다가 어느 순간 그 자신이 받게 될 수도 있다.
아모르파티는 바로 생략된, 괄호 속으로 들어간 그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내 운명을 사랑하라/ 내 운명을 긍정하라는 바로 현재에서 그 어느 시점, 그 사이에 감추어진 그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망각된 지금의 이 현재가 언젠가는 기억된다는 것을. 되돌아온다는 것을.
지금의 현재는 그 어느 순간의 현재였지만 망각된 채로 기억에 묻혀 있다가, 문득 오늘 현재로 이어진 것처럼, 모든 무덤을 다 파괴하고 나온 의지는 바로 그것들의 주체이기도 하다. <무덤의 노래>를 통하여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모든 무덤을 관통하여 온 ‘의지’, 죽지 않은 의지, 혹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혹여 삶이 그대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차라투스트라의 <무덤의 노래>의 끝 단락을 기억하자. ‘부활은 무덤이 있는 곳에만 있게 마련이니’ 모든 무덤은 그 자신 안에 있다는 것도!
* 이 글은 저만의 해석이며, 저의 생각이니 그렇게 이해하세요~~~^^
#차라투스트라_제2부_무덤의노래
#아모르파티_메멘토모리_카르페디엠
*사진은, 내 차나무 찻잎으로 만든 차(한 5~6g 되려나~ ㅋㅋ) 첫탕 사진과 낭독 19회차 알림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