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고문 인간백정 치안본부】 「‘분단과 착취에 맞선 싸움꾼’ 백기완 선생,」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21-02-15 16:24:37
수정 2021-02-15 16: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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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와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며 민중·민족·민주 운동을 이끈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향년 89세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한 '민중의 지도자'였다. 고령의 나이에도 투병 직전까지 늘 투쟁의 현장에 서 있던 '영원한 청년'이었다.
백 소장은 한반도가 분단되기 전 1933년 1월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백 소장이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온 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던 열세 살 무렵이었다.
이후 한반도 분단이 한 가족의 분단으로 이어져 여덟 식구가 남북으로 나뉘어 살게 되자, 갈라진 집안을 하나로 잇기 위해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서울 경교장에서 만난 백범 김구 선생의 뜻도 그의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 소장은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독학으로도 출중한 실력을 뽐냈다. 시·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고, 영어사전을 모두 외워 '영어 천재'로 신문에 알려지기도 했다.
1954년, 스물두 살, 전쟁이 끝난 직후 백기완(오른쪽)은 벗들과 함께 자진학생녹화대를 결성하여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나무심기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7년 동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강산에 2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고, 이어서 강원도 양양, 지리산 일대, 경기도 여주 등을 돌며 자진농촌계몽대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통일문제연구소
1950년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부산제5육군병원(임시육군)에서 군복무를 했다. 이듬해 그는 해외유려장려회에서 첫 수혜자로 해외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싸우는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백 소장은 빈민·농민 곁에서 함께 투쟁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열었고, 도시빈민운동과 나무심기운동(자진녹화대), 농민운동(자진농촌계몽대) 등에 앞장섰다.
1979년, 마흔일곱 살. 연이은 구속수감과 고문으로 몸무게가 반토막 나기 전 81kg의 건장한 체구였던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 운동에 뛰어들었고, 정치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1964년에는 6.3세대와 연대해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변영태 선생 등과 반일 투쟁에 나섰다가 연행돼 구속되기도 했다.
1966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를 끝장 내기 위해 재야 연합전선의 하나로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선생과 함께 야권 통합운동을 성사시켰다.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하는 등 박정희 정권에 맞서 대대적으로 싸웠다.
그 무렵 백 소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재야 정치인인 고 장준하 선생(1915~1975)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 설립과 민족학교 운동도 전개했다. 항일운동 연구에도 계속 매진해 신채호, 백범 등의 글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일민족론', '백범어록'을 잇따라 출간했다.
청년노동자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는 등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 분출하던 1970년대에는 민중항쟁의 주체적 맥락을 다시 세우고자 애썼다.
1973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창립하고, 유신헌법 개헌을 문제 삼고자 재야인사들과 함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이 때문에 백 소장은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과 함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1974년, 마흔두 살. 박정희 정권 아래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의형제를 맺고 박정희 타도 싸움을 맹세하였던 독립군 출신 장준하와 군법재판을 받는 장면ⓒ통일문제연구소
그런데도 백 소장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수차례 끌려가기도 했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직후인 1979년에는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구속됐다. 죽음 직전까지 가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며 생사를 넘나들던 시간을 백 소장은 시를 지어 주문처럼 읊으며 견뎌냈다. 그의 장편 시 '묏비나리'는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로 일부가 쓰이게 됐다.
또한 딸에게 주는 편지 형식의 서간집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출간했는데, 24시간 만에 판금 조치가 됐음에도 대학가와 노동운동 진영의 필독서가 됐다.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풀려나 한양대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던 백 소장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 소식을 듣고 분개하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그 바탕에서 비매품으로 옥중 시집 '젊은날'을 펴내기도 했다.
1986년, 쉰네 살.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치안본부를 규탄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농성 지지방문. 백기완(왼쪽에서 두 번째), 문익환, 계훈제의 모습.ⓒ박용수
이후 민중의 투쟁 현장을 지원하며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백 소장은 1986년 명동성당에서 '권인숙 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또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백 소장은 형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6월 항쟁에 참여했다. 당시 시민대표로 연설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연세대에서 열린 백기완 민중후보 지지 행진(왼쪽), 쉰다섯 살 제13대 대통령선거 민중후보 백기완의 포스터(오른쪽)ⓒ박용수/통일문제연구소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가 열린 서울 대학로ⓒ통일문제연구소
1987년에는 30년 가까이 이어진 군사독재 청산을 위한 학생, 노동자, 민중들의 요구로 민중대통령 후보로 추대돼 대선에 출마했다가 야권 분열로 군사독재가 연장될 위기에 처하자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눈물의 사퇴를 했다. 이후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해 완주하면서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 시대를 열었다.
낙선 뒤에도 그는 민중 운동에 매진했다. 1989년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인사 '89인 선언'을 주도했고,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의 연합기구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했다. 1990년에는 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결성을 지원하고, 고문을 맡았다.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 1주기 추모식ⓒ민족사진연구회
또한 백 소장은 우리민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민중의 힘으로 제국주의의 분단과 지배를 타파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살려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1989년 북쪽 김일성 주석, 남쪽 대표인사 7인에게 남북정치협상 제안한 데 이어 1990년 방북 질의서를 발표하는 등 통일운동에도 열을 올렸다. 2000년에는 북쪽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직접 초대되어 평양에서 열세 살에 헤어진 누님을 상봉했다. 반핵평화운동과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에도 앞장섰다.
2000년, 예순여덟 살. 615남북정상 회담 뒤 북쪽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방문한 평양에서 헤어진 지 57년 만에 누님(백인숙) 상봉ⓒ통일문제연구소
2000년대 들어서도 백 소장의 민중 운동은 분야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이어졌다.
2000년에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담은 민중 사상인 '노나메기' 운동을 제창하고, 각계각층에 이를 제안하면서 관련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2019년에는 민중의 전형을 빼어나게 빚어내고 노나메기 사상을 담은 서사 '버선발 이야기'를 출간했다.
2003년, 일흔한 살. 미국의 이라크침공에 항의하는 반전집회. 대학로ⓒ노순택
또한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2003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희망버스 운동(2008년), 용산참사 투쟁(2009년), 밀양송전탑 반대 투쟁(2011년), 한미자유무역협정 저지 투쟁(2012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 시국회의(2014년), 백남기 농민 사망 투쟁(2015년),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2016∼2017년) 등 수많은 민중 투쟁 현장의 맨 앞자리를 지켰다.
2015년, 여든세 살. 민중총궐기 집회 중 경찰 물대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백남기 농민 쾌유와 민중생존권 사수를 위한 행진ⓒ채원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지난 2019년 2월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의 영결식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김슬찬 기자
투병 직전인 2019년에는 태안화력 청년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을 계기로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을 촉구하는 촉구 시민 사회원로 기자회견을 주도했다. 백 소장은 임종 직전에 글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김진숙 힘내라", "노나메기!"라는 말을 남겼다고 통일문제연구소가 전했다.
백 소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장례는 시민사회가 함께 하는 사회장으로 5일 동안 치러진다. 명칭은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이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유족으로는 '평생 동지'로 불린 부인 김정숙 여사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