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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제 6장 고조되는 핍박과 사역의 확장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본장에 이르러 두 가지 면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갖는다.
첫째, 예수의 제 2차 갈릴리 사역과 제 3차 갈릴리 사역이 교차되고 있다. 1-6절에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기사를 기점으로 제 2차 갈릴리 사역은 끝나게 되고 3차 갈릴리 사역이 시작된다.
둘째, 본장 이후로는 예수의 교육 대상이 다수 군중에서 열두 제자에게로 집중된다. 이는 공생애 마감 시점에 대비하여 열두 제자를 굳건히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갈릴리 사역의 절정을 장식하는 이적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1. 고향에서 배척당하심 (6:1-6절)
예수께서 제 2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신 적은 제 1차 갈릴리 사역 때에도 있었으며 이제 두 번째 배척을 당하신 것이다. 그동안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설교와 치병 기적을 통한 분주했던 활동은 이제 나사렛으로 돌아옴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께서 제 2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때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당하셨다. 나사렛은 가버나움의 남서쪽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30년 동안 자라나셨으며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고향이라고 일컫는다.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실 때 제자들도 함께 했다는 표현은 예수의 고향 방문이 단순한 휴식이나 가족 상봉만을 목적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셨는데 당시 회당을 방문한 랍비에게 회당장은 성경을 강해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누가는 ‘규례대로’라는 말을 첨가하여 예수의 강해가 지극히 상례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예수가 읽은 성경의 내용까지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이사야 61장 1-2절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설교하신 이후에 회당을 통한 선교에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은 반응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라고 하면서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워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지난 30년 동안 저들은 예수의 성장 과정을 줄곧 지켜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탁월한 성경 강해를 경악스러움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저들은 시기심과 질투심의 노예가 되어 천박한 언행을 쏟아낸 것이다. 저들은 예수의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오히려 그 가르침과 그의 권능의 근원에 대해 의심하였고 그 출처에 대해 하나님이냐, 아니면 사탄이냐 하는 시비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즉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불신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의심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청중들은 동네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족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언급이 없고 족보에 대한 언급도 없고 다만 여기서 예수의 신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진다. 즉 예수에게는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목수였다는 것이다. 마태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누가는 단순히 요셉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으며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한 말은 예수를 경멸하는 천박한 표현이다. 유대인의 전통적 관습에 따르면 비록 아버지가 생존해 있지 않은 때라도 그 자녀를 그의 어머니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사생아를 지칭하는 경멸적 표현인 것이다. 당시에 양부 요셉이 살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출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설교와 능력이 비록 놀랄만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예수를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한 말 즉 ‘목수가 아니냐, 형제가 아니냐.’ 라는 말투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결국 저들은 고의적으로, 맹목적으로, 천박한 시기심으로 예수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예수의 친형제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 네 사람이며, 또한 누이들도 다수가 있었다. 로마 카톨릭은 마리아가 죽기까지 순결을 지켰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한 그릇된 가설에 불과하다. 마리아는 예수를 출산한 후 요셉과 자연스런 성관계를 통하여 예수의 동생들을 낳았다. ‘야고보’는 예수의 바로 아래 동생이며 초대교회의 지도자,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서신서인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또한 둘째 동생인 ‘유다’는 공동 서신인 유다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 아래 동생들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회심하여 초대교회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했는데 ‘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라는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에게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로서 그들이 마치 덫에 걸린 듯이 예수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현상적으로, 육신적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예수의 본질적, 신적 존재를 차악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족하고 말았던 것이다.
둘째, 예수를 배척하여 내쫓았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당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속담을 인용하여 고조된 긴장을 표현하시며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받지 못함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친척’ ‘자기 집’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가족까지 예수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치명적인 장애로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태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라는 표현으로 보아 예수를 신뢰하고 믿음을 가진 자가 극소수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했는데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특별히 고향이라는 친근한 의미와는 달리 그들의 골이 깊은 불신으로 정반대의 현상이 발발한 것이다. 이 실망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이 마8:10절에 나오는데 로마 백부장의 진실한 믿음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고향을 떠나 갈릴리 전도 여행을 다시 시작하셨다.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의 실질적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예수는 제자 훈련에 박차를 가하셨으며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비밀을 서서히 공개하시게 된다.
2. 열두 제자의 파송 (6:7-13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대신할 열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전도 방법을 조심스럽게 당부하신다.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약속하셨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따로 불러 교육을 시키셨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무수한 이적적 권능을 목격하고 그 메시지의 핵심들에 이미 익숙해졌던 것이다. 열두 제자의 파송은 제자화 훈련 및 예수의 사역의 확대라고 하는 이중적 목적을 가지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10장 강해에 나타나 있다. 열두 제자 파송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의 선교 활동이 조직화, 저변화 되어 감을 보여 준다.
둘째, 그 활동 영역이 확장되고 장기화됨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파송 직전에 선교에 관한 설교를 하시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는데 이제 그들이 선택된 원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을 파견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내신 이유는 증인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세우라는 관습에 근거한 것으로 6쌍의 제자들은 갈릴리 전역에 여섯 방향으로 산개되어 천국 확장 사업에 매진하였다. ‘보내시며’라는 말 ‘아포스텔레인’이라는 말은 ‘보내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대표한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신 후 파송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파송되는 제자들의 직무는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누가는 병 고치는 능력을 첨가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는 것을 밝혔다. 마가는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하였지만 13절에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함으로 병의 치유에 대한 권능도 주신 것이다.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신 여행 지침은 세 가지이다.
첫째, 자신들이 전파하는 복음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자기 신변에 대한 염려는 일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다.
둘째, 매일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는 것이다.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는 것이다.
셋째, 복음 전파나 병자 치유를 위해 부름 받은 전도자는 청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절대 의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명령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거처할 집이 정해지면 떠날 때까지 그곳에 유해야 했는데 마태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곳에 유하라.’고 하였다. 즉 경제적인 조건이나 전도활동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전도 활동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고향에서조차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배척을 당하게 될 상황에서 취할 자세까지 알고 있어야 했는데 제자들을 영접하지도 않고 제자들의 말도 듣지 않을 경우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다. 이는 유대인들의 생활 습관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을 밟거나 여행하고 돌아올 때에는 발과 옷에 묻은 먼지를 모두 털어내는 습관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신 것은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은 마치 이방인 지역과 같이 멸망의 자리에 놓이게 됨을 알리고 또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에 대하여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어떤 의식주의를 고수하거나 편당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하는 경멸적 행위를 유대인들에게 함으로써 반대자들에게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잘못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 같은 행동을 명령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진리를 선명하게 밝히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서 그들이 구원의 가능성에서 단절됨을 선언하는 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원한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복음과 그 권위를 거부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제자들의 선교 주제가 예수의 선교 주제와 일치하고 있는데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예수의 외침과 일치하게 제자들도 ‘회개하라’고 전파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의 활동까지 ‘회개’라는 말로 묶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정신적, 육체적 치유 사역의 대표적인 두 가지 내용 즉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사역을 병행하였다. 치유 이적은 복음의 진실을 확증하고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한 궁극적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이 예수의 사역과 온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복음 선포 즉 설교와 가르침을 통한 진리 선포이다.
둘째, 치병 활동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온전한 구원은 영과 육이 모두 구원을 얻는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것이다. 결국 지상에서 펼쳐지는 선교 활동은 영, 육 모두가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는데 이는 치료의 효과가 있다는 의학적 측면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병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도움 곧 신유의 은혜와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로마 카톨릭은 제 2차 바티칸 공회에서 도유라는 성례전을 제정하여 환자에게 기름 바름을 통하여 죄 사함과 병 나음을 소원하게 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9세기 경 카톨릭에서는 병자가 아니더라도 죽음에 직면한 자에게 교회가 베풀 수 있는 최종 예식으로 도유를 행하여 죽음을 예비하게 하였다. 이것을 천주교에서는 부유식, 종유식이라 부른다.
3. 세례 요한의 순교 (6:14-29절)
열두 제자가 파송되어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내용 사이에 끼인 중간 삽화이다. 열두 제자의 전도 활동으로 인해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을 때 마가는 이러한 세평과 함께 헤롯의 평을 소개하면서 자연히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암시하는 전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마가는 본서 전체를 통해 수난 받는 종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13절과 30절을 이어서 읽어도 무방하다.
제자들의 활동으로 예수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는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이 무르익을 때였다. 헤롯왕이 이 사실을 듣고 예수의 존재에 대하여 이미 죽은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오해를 했던 것이다. 헤롯은 헤롯대제와 부인 말타스 사이에 태어난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킨다. 그를 갈릴리 분봉왕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로마 황제로부터 왕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렸으며 유대 나라의 1/4을 다스렸으나 왕이 아닌 일종의 로마 황제가 임명한 관료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왕이라고 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며, 사실 아버지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헤롯은 아라비아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자신의 동생의 처인 헤로디아를 다시 아내로 맞이했다. 그 때문에 본처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아라비아가 전쟁을 일으켜 헤롯을 패전시켰다.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들은 것은 제자들의 활동 때문이었는데 제자들이 헤롯이 거하는 디베랴 지역까지 전도를 했기 때문이다. 헤롯은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죽인 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던 중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살았을 때에는 이적을 행하지 못했으나 이제 부활하여 이적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헤롯의 미신적인 발상은 결국 예수의 활동이 자신에게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안겨 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헤롯의 왕궁에서는 예수의 실체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었는데 헤롯의 불안한 심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 신하들은 세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살아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예수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들이 예수를 엘리야라고 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심판 날에 앞서 엘리야를 보낸 것이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때문이었다. 특히 세례 요한이 증거 하기를 ‘내 뒤에 오실 이’라고 한 것은 엘리야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죽은 세례 요한의 영혼이 부활하여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서 활동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고 함으로 요한을 죽인 책임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영혼이 예수를 통하여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무서운 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는 헤롯의 부도덕성에 대해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헤롯이 범한 죄는 간음죄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것이다. 헤롯 가문은 살인과 치정으로 둘러싸인 수치스러운 모습이었다. 특히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볼로스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친형이며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하였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범죄를 단호하게 비판했는데 다윗의 간음에 대해 선지자 나단이 비판했던 것처럼, 아합 왕의 우상 숭배 죄를 비판했던 엘리야처럼, 담대하게 지적하고 고발했던 것이다. ‘말하되’라는 말의 시제가 미완료형이기 때문에 요한이 계속해서 헤롯의 죄를 고발했음을 나타낸다.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두었는데 그 이유는 ‘그 여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겼으며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고, 보호했고, 그의 말을 번민하면서도 달갑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그의 비판을 인정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는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헤로디아에게 마침 좋은 날이 찾아왔는데 그 날은 헤롯의 생일이었다. 헤롯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대연을 베풀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교적 관습으로 치부하여 이 생일 지키기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헤롯은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고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 귀인들을 초대하였다. 자기 수하에 있는 행정 관료들, 군대를 지휘하는 고위 계층들, 그 지방의 유지들이 총동원되었다.
헤로디아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 있었는데 이름은 살로메이다. 15-17세 정도의 어린 딸인데 ‘여아’라는 말 코라시온‘은 어린 소녀를 막 벗어난 처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살로메는 하객들 앞에 나와 춤을 추었는데 본인이 자청해서 춘 것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실상 분봉왕의 딸이라면 공주로서 술을 마시는 연회장에서 하객들을 위하여 춤을 춘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짓이다. 당시 연회장에서 무희들이 추는 춤은 외설적이고 음란한 몸짓으로 남성들의 말초 신경을 자극시키는 관능적 춤이었기 때문에 이는 헤롯 궁전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질 만큼 문란하고 퇴폐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헤로디아는 요한의 비판을 받을 만큼 간교하고 음란한 여자였던 것이다.
헤롯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헤로디아의 딸에게 상급을 주리라고 맹세했는데 그의 말에서 특권 계급의 전횡과 왕실의 해이한 기풍을 감지할 수 있다. 헤롯은 매우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 과시적인 사람이었다. 왕의 맹세는 구두로 제시된 왕의 인준이며 서약으로서 결코 변경될 수 없는 절대 약속이다. 율법에는 이 같은 맹세의 불변성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헤롯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한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헤롯은 나라의 절반까지도 준다고 했는데 헤롯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한 말이다. 왜냐하면 헤롯은 자기 영토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통치자가 아니라 로마 황제의 명령을 받는 하급 군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 솜씨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허풍을 떨었는데 그 결과 자기 맹세의 올무에 걸리고 만 것이다. 살로메는 그의 어머니에게 가서 왕에게 무엇을 구하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했다. 살로메는 왕의 약속의 의지가 사라지기 전에, 고조된 분위기가 식기 전에 급히 들어가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참으로 잔치 석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왕은 자기가 한 맹세에 대하여 근심했는데 ‘맹세’라는 말이 복수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그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하여 확인했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거절할 수 없어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왕이 시위병사 하나를 보내어 세례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게 하였고 병사는 명령에 따라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 왔다. 참수된 머리는 딸에게, 그의 어머니에게 전달되었으며, 여기서 헤로디아의 악마성이 부각되는데 어린 자식과 함께 살인공모, 어린 딸에게 살인교사 뿐만 아니라 딸과 함께 살인의 결과까지 확인하는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감옥에 찾아가서 스승의 시체를 요구하였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하였다. 헤롯은 이것으로 세례 요한과 자신과의 관계가 끝난 줄로 생각했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 후 A.D 30년 헤롯이 나타비아 족과 전투에서 참패했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이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마태는 본 사건을 기록할 때 요한의 제자들이 그 모든 일을 예수께 고했다고 하며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잠시 떠나셨다고 했다. 요한은 그의 말대로 그 자신은 쇠하여야 하겠고 오실 그분 곧 예수는 흥하여야 하겠다고 했듯이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것이다.
4. 오병이어의 이적 (6:30-44절)
열두 제자의 선교 사역을 서술해 가다가 예수의 소문에 대한 헤롯의 반응을 소개하기 위해 과거에 있었던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을 잠시 회상하며 언급한 마가는 이제 다시 예수의 사역으로 돌아왔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마가는 긍휼에 풍성하신 예수의 넘치는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금 전에는 헤롯 궁전의 화려하고 풍성한 연회를 소개했지만, 지금은 디베랴 벌판에서 일반 민중들의 궁핍한 형편을 소개하여 대조시키고 있다. 이 백성의 무리들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궁핍하며 고생하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목자 없는 양 같은 궁핍하고 답답한 실정에 놓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육간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시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13절에 이어서 사도들이 파송 받아 복음 전파와 치병 기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다소 흥분되고 긴장된 제자들의 보고를 일일이 귀담아 들으시고 한적한 곳에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전도활동으로 몹시 피로해 있었기 때문에 영육간의 재충전을 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장소는 매우 분주한 곳으로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한적한 곳’이라는 말 ‘에레모스’는 ‘외롭고 적막한 광야’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노동을 착취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들에게 휴식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광야’이다. 그런데 후일에 이 휴식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이다.
*사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사63:14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렘3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호수의 동쪽에서 북동쪽을 향하여 광야로 갔던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누가에 의하면 ‘어촌’이라는 이름을 가진 벳새다였다. 갈릴리 해변에는 벳새다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두 곳이 있었는데 33절에 도착한 벳새다는 헤롯 빌립이 도시로 승격시키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스의 이름을 따서 벳새다 율리아스라 명명하였다. 이곳에 예수께서 도착하신 것이며, 45절에 나오는 벳새다는 갈릴리 서쪽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벳새다이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가시는 것을 본 군중들은 도보로 걸어서 예수보다 먼저 그곳에 당도했는데 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는 약 30km 정도의 거리였으나 지칠 줄 모르고 걸어서 달려간 것이며 무리들의 기대 심리는 이제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자신을 만나려고 달려온 무리들을 보신 예수께서는 휴식의 장소를 빼앗긴데 대한 불쾌한 반응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강하게 느끼셨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율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들이 있었음에도 무리들은 예수를 따랐으며 진리에 심히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물도, 꼴도, 안식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처럼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며, 다윗처럼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무리들을 가르치셨는데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했고, 마태는 병을 고치셨다고 하였다. 즉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으며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 되셨다.
교훈과 병 고침이 어느 정도 끝나자 저녁 먹을 시간 즉 초저녁 때가 되었다. 제자들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시는 예수께 나아와 가르치고 병 고치는 일을 그만 중단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곳은 빈들이요 인적이 없는 한적한 광야였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무리를 해산시켜 각자가 인근에 형성된 조그마한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여 청중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명령의 주어는 ‘너희가’라는 말이다. 이는 제자들의 절대적 무능을 일깨우고 예수께 대한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예수님의 특별 교육 방법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의 명령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청중들을 먹이기 위하여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액수의 돈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 돈으로 마을로 가서 떡을 사서 운반해 온다는 것은 두 가지가 다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청중의 숫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식사의 대금은 대략 2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 돈은 인부가 8개월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으로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한다면 약 4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요즈음 한 끼 식사비가 8천 원이라고 한다면 5천 명이 먹을 수 있는 식사비용이다. 그러나 남자만 5천 명이요 전체 인구는 2만 명이라고 한다면 1인당 식사비용은 2천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빌립은 이 돈이라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처럼 계산에 밝았던 제자들이 그들에게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시는 예수의 초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던 것이다.
제자들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예수께서 직접 문제 해결에 참여하려 하신 것이며,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첫째,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고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라는 것이다. 즉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를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이다.
둘째,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나 예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놀라운 이적의 실체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요한은 떡이 보리떡이며 소유자가 어린아이라고 하였다. 이 음식은 천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이며, 어린아이의 음식이기 때문에 어른의 식사 양으로는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잔디 위에 앉게 하셨는데 오십 명씩, 백 명씩 앉게 하셨다. ‘떼를 지어’라는 말은 마치 집에서 가족들이 식탁 주위를 둘러앉은 것처럼 푸른 잔디 위에 둘러앉는 것이다. ‘이곳은 빈들이요 광야.’라고 했지만 사실은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치 시편 23편의 푸른 초장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팔레스틴의 우기가 끝나는 3-4월경이었을 것이다. 요한은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고 하였다. 즉 예수께서 잡히시기 만 일 년 전의 유월절 시기였을 것이다. 무리들이 50명씩 둘러앉은 것은 식사의 공동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제 2의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의 위치에서 가족을 위해 하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유대인들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인데 땅에 양식을 내리시는 만유의 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축사하신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셨는데 ‘떼어’라는 말 ‘카테크라센’은 그 행위의 사실성과 장중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떡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떼어내신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주어’라는 말 ‘에디두’는 예수께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분배해 주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때 이적이 일어났는데 예수의 손 안에 있는 떡은 떼어도, 떼어도 계속해서 커졌으며 떼어낸 떡 조각은 바구니에 담았을 때 원래의 떡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물론 물고기 역시 그렇게 분배하셨다. 한 사람도 부족함이 없이 골고루 나눈 것이며 이는 창조의 능력으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권능을 단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충분히 만족했다는 것이며 이로써 기적은 완결되었고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공동 식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와는 달리 놀라거나 소동이 일어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의 평화로움이 깃드는 조용한 잔치로 끝났다는 것이다. 사람은 먹고 배가 부르면 모든 사실을 잊어버리고 평화로움에 빠져 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스스로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바구니에 음식과 물과 생필품을 넣고 다녔다. 제자들은 청중들이 먹고 남은 떡과 물고기를 회수하여 본 즉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이는 제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바구니에만 차게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식사가 끝나고 이제 군중들의 숫자가 밝혀지는데 남자만 오천 명이었다. 마태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의 권능이 얼마나 탁월하고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 훈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30절에 보면 사도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와서 자신들의 행적에 대하여 자랑하듯이 예수에게 낱낱이 고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저들을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시고 배를 타고 직접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다. 이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우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한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예수께서는 시험하시고자 한적한 곳을 가자고 제안하신 것이다. 그곳에서 ‘너희가 떡을 주라.’고 명령하신 것은 지금까지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승리자들이라면 주님을 의지하고 이만한 능력은 감당해야 함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떡을 살 돈만 계산하며 모든 일이 불가능하다는 자신들의 무능과 무지와 불신을 드러냈던 것이다.
5. 물 위를 걸으심 (6:45-56절)
오병이어로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벳새다로 급히 가는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다. 갈릴리 바다는 돌풍이 부는 경우가 허다하였는데 제자들이 밤새 시달린 것도 이 돌풍 때문이었다. 오병이어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의 반응에 대해 요한은 무리가 예수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급히 떠나셨다고 전한다. 혁명의 본거지였던 갈릴리 주민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을 위한 정치적 지도자로 삼으려고 열광했던 것이다. 저들이 예수를 열렬히 열광했던 이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하려 한 것이다. 마태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서 베드로도 건너보고자 시도했던 사실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신앙 고백을 상세히 수록하여 제자훈련이라는 주제를 부각시켰다.
본 이적의 목적은 세 가지이며 첫째,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며, 둘째,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며, 셋째, 임박한 환난과 핍박을 암시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마가는 특별히 거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적과 함께 자연을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이적과 본 이적의 차이점은 전자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 풍랑을 말씀으로 다스리시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제자들과 합류하시기 위하여 물 위로 걸어오시고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저절로 잠잠해진 것이다.
이 기적 사건은 오병이어의 이적과 연관되어 있다. 그 이유는 52절에 급식 이적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식 기적 직후에 예수께서는 친히 무리들을 서둘러 해산시키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떠나 보내셨다. 이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었는데 본문에서 ‘즉시’와 ‘재촉하사’라는 표현으로 보아 예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몰아세우셨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예수께서는 고조되었던 급식 분위기와는 달리 서둘러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셨는데 마가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요한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요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사람들이 예수를 ‘그 선지자’곧 메시야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이는 예수를 구원자로 알기보다는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여 극도로 흥분했기 때문에 무리들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야 했던 것이며, 이들이 제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분리시키기 위하여 군중은 해산시키고 제자들을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의 시간을 보내시고자 산으로 가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헤롯의 박해가 임박했음을 예감하시고 대중 집회를 서둘러 해산하신 것이며, 배척과 대적과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군중들의 유혹을 물리쳐야 했던 것이다.
제자들을 건너가게 하신 장소는 벳새다이다. 이곳은 급식 사건이 일어났던 벳새다가 아니라 갈릴리 서안의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벳새다이다. 마태는 이곳을 게네사렛이라 했고 요한은 가버나움이라고 했는데 세 곳은 서로 비슷한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차이가 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급식 이적을 행하시던 때가 이미 저녁이 되었으므로 지금은 날이 저문 시간이었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셔서 해변의 평지에 계셨고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 ‘산’이라는 말 ‘오로스’가 아니라 ‘뭍’이라는 말 ‘게’가 사용된 것은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이제 평지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는 주변의 협곡을 통해 회오리바람 같은 바람이 불어와 파도를 일으킨다. 이 바람은 제자들이 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왔기 때문에 역풍을 맞으며 배가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항로를 이탈하여 항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바람은 지난번에 있었던 ‘광풍’같은 폭풍이 아니고 은근하고도 끈덕지게 불어와 항진을 괴롭히는 음산한 바람이다.
제자들은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는데 ‘괴로이’라는 말 ‘바사니조메누스’는 ‘시험하다’ ‘지치게 하다’라는 뜻으로 비록 제자들 중에 어부들이 많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을 느끼고 심히 고통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보시고’라는 말 ‘이돈’은 ‘주목하다.’ 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 광경을 계속적으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갈릴리 바다는 폭이 약 10km 정도이기 때문에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뭍으로부터 약 5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시력으로는 어두운 밤에 5km나 떨어진 바다 위에서 사람들이 노 젓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초를 신적 직관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계셨던 것이다.
‘밤 사경’이라는 말은 로마 시간에 맞춘 것으로 일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이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삼경은 12시부터 3시까지, 사경은 3시부터 6시까지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자들은 9시간 정도를 풍랑 속에서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다가가셨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예수는 곧장 지나치기라도 할 듯이 배 곁을 스쳐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고난을 간과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이 예수를 향한 믿음을 보일 때 구원하시고자 한 것이다.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 놀라고 있으며 유령인가 하여 소리를 질렀다. ‘소리 지르니’라는 말 ‘아네크랔산’은 경악을 금하지 못할 정도로 고함치며 두려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모습을 실체가 없는 환영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내린 자연적인 결론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이 육신의 눈을 가진 인생의 한계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것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가 갑자기 시공을 초월하여 물 위로 걸어 오셨기 때문에 놀라고 경악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실체를 보았을 때 그들은 두 가지 사건을 기억했어야 옳았다.
첫째, 4장에서 보았던 기적 즉 예수께서 광풍을 말씀으로 제압했던 기적이다.
둘째, 낮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이 두 가지 기적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어느 정도 침착하게 예수를 인식하고 믿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는 바람이 불고 물결은 높고 거기에다 어두운 밤이었으며, 육체를 가진 사람이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온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르세이테’라는 이 말은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라는 의미로서 용기와 위로를 더하라는 강한 명령형이다. 이제 더 이상 바람이나 유령의 악몽에 짓눌리지 말고 담대하게 떨치고 일어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내니’라는 말은 ‘에고 에이미’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의 표현인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다. 따라서 예수의 ‘나’라는 선언은 곧 ‘신의 현현’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자기 계시는 심한 두려움에 놓여 있던 제자들에게는 더 없는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스스로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예수께서는 바람과 풍랑과 지구의 중력까지도 정복하시고 바다 위에 우뚝 서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무서운 상태를 중단하라는 참으로 단호한 명령이다. 이는 나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함께 있을 것이며 너희를 보호하고 지킬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시니 바람이 갑자기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지므로 제자들이 또 한 번 놀랐던 것이다. 이는 예수의 기적이 물 위로 걷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바람을 잠재우는 권능까지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바람아 잠잠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무언의 명령으로서 바람의 기운을 지치게 만드셨던 것이다. 결국 이 기적의 주제는 자연을 다스리는 신적 권위가 예수에게 있음과, 그러한 권능의 모든 귀결점은 바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가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는 마가에게 이 사건을 전해준 베드로가 자신이 철없이 행한 모습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의 능력에 의지했기 때문인데, 베드로가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전했더라면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여 마치 베드로가 자기 능력으로 물 위를 걸어 다닌 이적을 행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의 이적이 희석된다는 점에서 마가에게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이 잔잔해지자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랐는데 이 말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태는 이 사실에 대하여 ‘제자들이 예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적의 결과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신적 권위를 느끼고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단지 제자들이 기적의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놀라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는 제자들의 외면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고, 마가는 제자들의 숨겨진 내면의 상태를 주시했던 것이다. 마가는 제자들의 영적 감각이 무디고 현명하지 못한 실체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 마가는 물 위에서 일어난 두 가지 기적을 보고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놀라고만 있는 이유를 급식 기적과 연결시키고 있다. 만약 앞선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를 깨닫고 온 우주의 주관자이시며 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고 하는 것을 깨닫기만 했다면 그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제자들의 큰 과오는 험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누구신지 그것을 바로 깨닫지 못한 데에 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하였지만 그 신앙고백을 전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가는 길에 갑자기 풍랑이 일자 수 시간 고통을 당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졌던 것이다.
배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자 배를 대고 내리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곳은 호수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북쪽 광야, 혹은 광야에 있는 한 도시였을 것이다. 게네사렛은 한 도시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갈릴리 서안의 큰 평야지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곳의 토질은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많은 촌락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아침에 도착하신 예수 일행을 곧 알아보고 그 지역에 다니며 소식을 알렸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환자를 메고 예수 앞으로 달려 나왔다.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온다는 것은 가히 예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의 인기와 영향력은 어떤 큰 변화를 예감이라도 하듯이 민중들 사이에 놀랍게 퍼지고 있었으며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동시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핍박이 더욱 가중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예수의 활동 영역은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이나 시장을 막론하고 넓혀져 갔다. ‘시장’은 마을 어귀에 있는 광장으로 법정과 공공기관이 있으며 사람들의 상거래와 교제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병자들을 두고 사람들은 예수께 와서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고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선교는 성공적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고 갈릴리 사역이 거의 절정에 다다랐다는 조용한 암시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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