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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
□ 본문 : 창세기 24장 28-53절 (봉독은 50-52절)
※ 제자훈련교재 ‘예수님의 사람 2’에 나오는 유기성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제가 철원에서 군목으로 근무할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제가 죽어서 하나님 앞으로 걸어가는 꿈이었습니다. 저 혼자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텐데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맞아주실까?’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때 소원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안아 주시면서 “수고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시는 그 한 마디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만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것도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안타까워 하다가 깨어나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이 저의 일평생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때 나의 유익을 구하며 살았던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의 유익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로 하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일에 모든 갈등이 사라진 것입니다.
(위의 책, pp, 104-105)
성도에게는 두 가지 신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8:15)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목요일에 주일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목요일 새벽부터 두통으로 고생했습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열도 없고 목도 아프지 않고 두통만 있었습니다. 또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저도 늘 체온을 체크합니다.) 저는 무리를 하면 두통으로 옵니다. 그런데 보통은 오후나 저녁에 두통이 오고 하룻밤 자고나면 괜찮아지는데, 그날은 새벽에 일어났는데 두통이 있는 것입니다. 순간 오늘 하루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전력투구를 하는데 이런 컨디션으로 어떻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을까 순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주셨기에, 기도로 걱정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새벽기도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두통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휴식하는 월요일에도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자리에 눕지 않는데 그날은 두통도 있고 몸도 힘들어서 결국 약을 먹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계속 누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요일이 아니면 설교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금요일에는 주일설교초고를 살펴보며 수정하고 보완하고 원고를 완성해서 통역자들과 PPT 담당자에게 보내드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보작업을 하고, 성령집회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설교준비를 위해 목양실로 올라와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약을 먹어서 두통은 많이 가라앉았는데 힘이 없었습니다.
설교원고를 써내려 가는데『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8:15)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이 부분에서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러면서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신데, 내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약함은 아무 것도 아니지. 내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데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지. 그러면서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 힘을 가지고 오늘 설교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데 낙심하고 절망할 것이 무엇입니까? 열방을 경영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데 기죽을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그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데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시간에 진심으로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 보십시오. 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예배가 바로 그런 시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찬양할 때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나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도에게는 또 한 가지 신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분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말했습니다.(롬1:1)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니라)와 유다도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종입니다.
마지막 날 모든 성도는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두 부류로 나누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말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종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1) 예수님의 종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희생하고 헌신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충성된 종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왼편에 있는 종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5:26,30) 예수님의 종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자꾸 중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하고 게으른 종은 아니야.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하니까. 나의 유익을 구하지만 때로는 희생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중간쯤을 될 거야.’
성경은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중간 길을 생각합니다. ‘차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지는 못하겠어. 좁은 길은 너무 힘들고 어려워. 세상에서 살려면 타협할 수밖에 없어. 주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그렇다고 넓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야. 세례도 받았고 집사라는 이름도 있고, 그리고 주일에는 이렇게 교회에 나와 예배도 드리잖아. 헌금도 하고. 그러니까 적어도 넓은 길은 걷는 사람은 아니야. 나는 중간 길을 걷는 사람이야.’
그러나 성경에는 중간 종이 없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중간 길이 없습니다. 좁은 길 아니면 넓은 길입니다. 그러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인 것입니다. 좁을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면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분도 있을 것입니다. ‘나도 유기성 목사님처럼 그런 꿈이라도 한 번 꾸면 좋겠다. 그러면 경각심을 가지고 더 이상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서는 순간을 준비하며 살 텐데.’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꿈을 꾸게 하신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기록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은 얼마든지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심지어는 미혹될 수 있지만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성도라면 충성된 종으로 예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간절함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예수님 앞에 서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1. 사명이 먼저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 그 사람이 이르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이르되 말하소서.”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이 아브라함의 종에게 음식을 베풀어줍니다. 가나안에서 출발해서 하란까지 700km 넘는 여행을 했습니다. 긴 여정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겠습니까? 육체적으로도 매우 지쳤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동지역에서는 주인의 접대를 받기 전에 방문 목적을 밝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종은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주인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맡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필요보다도, 그 당시의 상황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이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착하고 충성된 종도 똑같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25:16) 바로 가서입니다. 주인이 맡긴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일보다도 주인이 맡긴 일, 즉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마귀는 나중에 하라고 유혹합니다. 지금은 공부하기에 바쁘니까 나중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지금은 직장생활이 바쁘니까 어느 정도 안정된 다음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지금은 승진해야 하니까 나중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승진하고 나니 그 다음 자리가 보입니다.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는 올라간 다음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은퇴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건강해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으니 나중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일평생 사명은 뒤로 하고 자신을 위해 살다가, 세상을 위해 살다가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결혼해야 하니까 결혼 한 후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살림이 안정된 후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아기를 낳아야 하니까 아기를 키워야 하니까 학교에 들어간 후에 사명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니 더 바쁩니다. 아무래도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는 사명을 위해 사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래도 부모니까 결혼은 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자녀가 결혼하면 이제는 마음껏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손자손녀 봐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일평생 사명은 뒤로 하고 내 자녀, 내 가정만 외치다가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바로 가서’ 입니다. 사명은 곧장 순종해야 합니다. 뒤로 미루면 안 됩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일은 끝이 없습니다. 직장일 회사일 하자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도 가정일도 똑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 위해 산다고 학교도 직장도 가정도 내팽개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은 사명이냐 직장이냐, 사명이냐 가정이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먼저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 먼저 하십시오. 성경 먼저 펴십시오. 자녀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래도 기도 먼저 하십시오. 가정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도 성경 먼저 펴십시오. 내가 있는 곳이 사명의 땅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만약 그것으로 인해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사명이 먼저인 종입니다. 자녀들을 말씀대로 양육하십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학교생활에서 희생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들이 힘들어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희생을 지불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이 먼저인 종입니다. 사명이 먼저 인 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희생할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사명을 뒤로 하면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사명을 뒤로 하면 갈등도 없고 편하겠지만, 절대로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둠에 삼켜버리게 됩니다. 나중에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마5:13)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을 손가락질 하는 이유는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들과 똑같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시지요. 믿음대로 살면 핍박합니다. 반대로 세상과 타협하면 앞에서는 웃고 좋아하면서 뒤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종은 세상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능력도 있어. 다른 사람 배려할 줄도 알고 베풀 줄도 알아. 그런데 말이야 예수를 믿어. 그게 흠이야. 예수만 안 믿으면 딱 좋은데 말이야.’ 이것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종이 들어야 할 평가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사명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먼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일평생 자신을 위해 살아도 모자랍니다. 일평생 세상을 위해 살아도 모자랍니다. 일평생 자녀들을 위해 쏟아 부어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이고 세상이 먼저이고 자녀가 먼저이면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시간도 물질도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위해 살아간다면 절대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사명을 위해 살라고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위해 사는 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명이 먼저인 자,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먼저인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주시기 때문입니다.(마6:3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이것이 사명이 먼저인 종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사명이 먼저 인 종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2. 말씀대로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경험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분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말대로 했습니다. 라반을 만나서도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신 것과 자신에게 보여주신 증거를 그대로 전합니다. 덧붙이지도 않고 빼지도 않습니다.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말씀대로만 행합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랬습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저는 49절을 읽으면서 말씀대로 행한 종의 담대함을 봅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말을 듣는 라반과 브두엘은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이들은 지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친족이고 가나안 땅에서 대단한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65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소식 한 번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선뜻 자신의 딸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한 번 보내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먼 길로 시집을 보내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과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을 설득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정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종은 담대합니다. ‘나는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당신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제는 당신들이 결정할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다고 하시면 리브가를 데리고 가고, 그렇지 못하겠다고 하면 떠나가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결정해 주십시오.’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은혜를 보았습니다. 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았습니다. 주인 아브라함이 두려움으로 죄를 짓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에 가만히 계실 리가 없습니다. 700km 넘는 긴 여정을 정확하게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결과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뜻이 아니라면 자신이 아무리 애원하고 설득해도 안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리브가는 자신을 따라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라반과 브두엘이 어찌 가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그 무엇이 가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종은 이렇게 담대합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 에스더가 기도하며 금식하며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부르지 않은 자가 왕 앞에 나아가면 사형인데 말입니다. 이것이 페르시아의 법입니다. 아내라도 자식이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이렇게 고백하며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4:16) 잘못하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합니까? 말씀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벗어나는 종은 주님 앞에 섰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받기 때문입니다. 종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좋은 주인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주인이 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립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주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까지라도 맡길 수 있습니다. 종은 오직 말씀대로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그래서 종은 걱정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행복입니다.
3.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52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그 종이 착하고 충성된 종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도 얼마든지 사명이 먼저 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도 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복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성사된 후를, 성공한 후를, 승리한 후를, 많은 열매를 맺은 후를 보아야 합니다. 그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면 그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주인이 받아야 할 영광을 자신이 차지한다면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이미 주인의 자리 앉아 주인 노릇을 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모든 일이 성사된 후에, 성공한 후에, 승리한 후에, 많은 열매를 맺은 후에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랬습니다. 여기까지 가야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명이 먼저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직 주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사명이 먼저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모든 결과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성사된 후에 갑자기 마음이 흔들립니다. 성공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습니다. 승리한 후에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많은 열매를 맺으면 그 중의 얼마를 자신이 가지고 싶습니다. 마귀의 유혹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도 받고 싶은 교만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유혹합니다. 핍박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사명을 위해 살아가면, 그래도 우리가 말씀대로 행하고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면,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무기로 공격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 무기가 얼마나 강한지 아담과 하와도 교만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명이 먼저가 되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행하고 있나 살피고 또 살펴야 합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성사된 후입니다. 성공한 후입니다. 승리한 후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은 후입니다. 이 때 조심하지 않으면 교만으로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잘 달려갔는데 마지막 순간에 교만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이름을 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내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착하고 충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갑시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칭찬받고 상급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