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5.16쿠데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후 정권을 이어받은 장면 내각은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두고 의원내각제를 실시했다. 관점에 따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의 자유 국가를 구가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결국 사회적 분열과 혼란으로 불과 9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군사 쿠데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1공수특전단, 제1해병여단, 6군단 포병대 등이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다. 당시 장면 총리는 소공동 반도호텔 809호를 공관으로 쓰고 있었다. 서너 시쯤 공관 인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장면 총리는 미 대사관과 유엔 사령부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느 곳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새벽 5시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피신한다.
장면 총리가 몸을 피하고 잠시 후 총리 공관에 들이닥친 박정희는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단 3일 만에 박정희에게 정권이 접수된다. 이 과정에서 어쩌면 쿠데타를 막을 수도 있었던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우선 장면 총리는 경찰 첩보로 일부 군인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음을 오래전부터 알았다고 전해진다. 반란 일주일 전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도 받았으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그때마다 “모략이다. 미군이 있는데 말도 안 된다”라며 얼버무리며 거짓말을 했다.
쿠데타를 뒤늦게 알아차린 미 대사가 총리의 피신처를 알기 위해 노기남 주교에게 연락했는데, 당시 가르멜 수녀원의 프랑스인 원장은 주교의 확인 전화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만일 그때 미 대사와 장면 총리가 즉시 만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 C.B. 매그루더는 함부로 군을 움직인 박정희에게 분노했다. 그때는 전시뿐 아니라 평시 작전권도 미군에 있을 때이다. 그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쿠데타 진압을 자청해 허락을 청했지만, 웬일인지 윤보선 대통령은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 오히려 경무대에 쿠데타군이 들이닥치자 “올 것이 왔구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제2공화국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의원내각제에서 민주당의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 대통령과, 신파를 대표하는 장면 총리 체제가 갖추어졌다. 신파와 구파는 서로를 불신했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 깊은 증오의 골을 박정희가 파고든 것이다. 이후 미국도 불개입 원칙을 견지하며 방관자 입장을 보이며 승자의 편을 들 뿐이었다. 장면 총리는 피신 55시간 만에 가르멜 수녀원에서 나와 쿠데타를 인정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 허무할 정도로 쉬운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대구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했는데, 일본인 교사는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가고, 조선인 교사를 하인 다루듯 멸시하는 데에 불만을 품어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일왕에게 충성의 혈서를 쓴다. 민족에 대한 첫 번째 배반이다. 그는 1등으로 졸업하고, 그 상(賞)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진다.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3등으로 졸업하여 일본 육군의 주력부대인 관동군의 견습사관을 거쳐 관동군 보조부대인 만주군의 소위와 중위로 복무한다.
해방 후 그는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셋째 형 박상희의 영향으로 좌익에 가담하여 군대 내의 세포로 활동했다. 1948년 군내 좌익숙군작업에 걸려 사형을 앞두고 있던 그는 동료 좌익 세력의 명단을 주어 군 계급은 면탈되었지만, 군무원으로 좌익 숙군작업에 종사한다. 민족과 동지에 대한 두 번째 배반이다.
그는 쿠데타 후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쿠데타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건 ‘혁명공약’도 이행하지 않았다. 민족과 공동체에 대한 세 번째 배반이다. 혁명공약의 여섯 개 항목 중 마지막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정변으로 영구집권을 계획한다. 그는 위헌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제3공화국 헌법을 정지했다. 그리고 1974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연설에서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영원한 배반이다. 그는 결국 18년 집권의 끝을 부하의 총에 의해 죽음으로 맺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엇갈리고 있다. 경제 분야의 업적을 두고 공이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 학생, 시민들과 그 유가족을 위로해주지 않는다. 100억 달러 수출탑이 짓밟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상해 주지도 않는다. 성장 지상주의의 깃발 아래 노동 착취, 빈부 격차, 지역감정과 같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수많은 청년 학생, 시민들에게 가한 폭압은 정당화될 수 없다. 5.16은 군사 반란이자 민족사의 치욕일 뿐이다. 4.19혁명의 정신을 총칼과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는 독재자 이승만의 후계자이고, 독재자 전두환의 선임자일 뿐이다. 친일 잔재와 이승만 독재, 유신 독재의 청산이 우리 시대 성숙한 시민들이 해야 할 역사적 책무다.
박정희는 스스로 약속한 ‘공약’을 어기고 군정을 연장하려 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반대하자 포기하고, 그 대신 창당을 준비하고 기존 정치인의 손발을 묶는 내용의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는 등 집권을 위한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했다.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민주주의 앞에 붙는 수식어들은 언제나 불순한 목적을 갖는다. 명분이나 목표 추구를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하겠다는 공지일 뿐이다. 1963년 대선을 치를 때는 해방된 지 18년이 지난 때로 일제강점기와 친일파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었던 당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민족’이란 아주 크고 확실한 가치였다. 친일 군관이었고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매력적인 구호라 판단했다. 결국 가짜 민주주의라는 공격을 했던 윤보선을 제치고 승리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친일 청산, 미완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한 정치 술수였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민주를 훼손하거나 희생해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민족을 위해, 공동체 재건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좀 억압한다는, 그러니 독재 통치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협박이었다.
현실을 왜곡한 박정희의 기만은 1964~65년 대부분 국민이 반대하는 한일협정을 추진하면서 그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청구권 행사로 일제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자존심까지 버렸다는 사실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의 자기부정이었다. 민족과 민주 중에 민족마저 내팽개친 것이었다. 이에 청년,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크게 외친다. “거짓을 말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