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가디언」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0권’ 선정
*2019년 BBC Arts ‘가장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 100선’ 선정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
1950년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주디스 헌은 40대에 접어든 독신 여성이다. 그녀는 마치 형벌을 받듯이 세상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냉정하고도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가난하고 나이가 많고 못생긴 그녀는 세상이 원하는 가치를 하나도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40대는 아직 희망을 다 버릴 수는 없는 나이이고, 어쩌면 그 희망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하숙집에서 만난 중년 남성에게 반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오해가 있었고, 그 오해는 겨우 세상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던 그녀를 무너뜨리려 한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이하 ‘주디스 헌’)』은 실제로 벨파스트 태생인 작가 브라이언 무어가 1955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출간 당시 영화사들이 판권 경쟁을 벌였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이 작품의 정점은 바로 주인공 주디스 헌의 캐릭터다. 심지어 출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디스 헌은 입체적인 캐릭터의 전범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뉴욕 타임스는 현대 소설에서 거의 만나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캐릭터라고 평했다).
그녀는 ‘거의 무고한’ 인물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다가 자신의 바람과 욕망을 충족할 기회를 날려 버렸을 만큼 소심하고 선한 사람이다. 명백한 운명의 희생자다. 그러나 브라이언 무어는 그녀를 쉽게 응원하거나 동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녀는 공상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다 억누르지 못한 시기와 증오를 종종 터뜨리고, 알코올 의존증이 있다. 살아온 사정을 감안하면 큰 흠결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 주디스는 미워하기보다는 모른 척하고 싶은 인물이다. 친해지기에는 불편하고 방치하기에는 미안한, 그래서 그냥 없는 셈 치고 싶은 사람. 설득력 있게 구축된 주디스의 캐릭터는 소설 속 인물들은 물론 독자까지 딜레마에 빠뜨린다. 무고하지만 불편한 자를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 ‘환대받을’ 자격은 누가 어떻게 부여하는가.
브라이언 무어는 여러 장치를 통해 이 씁쓸함을 증폭시킨다. 특히 전지적 시점과 인물들의 내면 독백을 오가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이 서술 방식은 뜨거운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들의 내면과 잔인하리만치 차가운 현실을 교차시키면서 둘 사이의 강렬한 대비를 선보인다. 또한 북아일랜드의 흐리고 습한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담백하게 느껴지면서도 깊이 가라앉아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삽입된 소설 기법들은 버려지는 자의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강화한다는 목적에 완벽히 부합하고 있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가 이 작품을 일컬어 ‘소설이 추구해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유행어처럼 연대와 환대를 말하는 시대에, 그러면서도 ‘우리끼리’를 말하는 시대에, 『주디스 헌』은 그 ‘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1955년에 제기된 이 질문은 지금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소설가 존 밴빌은 이 작품이 ‘여전히 신선하고 가슴 아프게 읽힌다’고 말했는데, 어쩌면 그 평가는 (이 작품과 더불어) 오늘의 세상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디스의 각진 얼굴이 거울에 비친 얼굴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시선을 고정한 채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꾸기 시작했다. 누렇고 창백한 얼굴의 윤곽을 바꾸었고, 차갑고 초라한 눈물이 모이곤 했던 길고 뾰족한 코는 솜씨 좋게 수정되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 경악할 만한 상상 속에서 쉴 새 없이 내달리던 그 눈동자는 동그랗고 부드럽게 반짝거렸다.싸구려 옷걸이처럼 밋밋한 몸매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채워지더니 가슴선까지 섬세하게 변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평범한 여인이 고혹적인 미인으로 탈바꿈하는 즐거운 환상을 지켜보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추함은 뒤늦게 꽃피울 운명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청춘이라는 꼴사나운 미숙함에 가려져 있던 그 추함은 한창 젊을 때 못남의 싹을 틔웠고, 이제 40대 초반의 성숙함을 통해 서서히 꽃을 피우는 중이었으며, 그러면서 오직 쇠락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그윽하고도 화려한 결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울 놀이를 하려는 열성마저 모조리 앗아가 버릴 그 마지막 순간을.
--- pp.36~37
빗방울이 다시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특유의 부드럽고 끈질긴 비는 케이브 언덕의 그늘에 가려진 벨파스트만을 넘어오면서 점점 거세졌고, 도시 위에 자리를 잡더니 짙게 드리운 밤의 장막을 축축이 적셨다. 그녀는 비스킷과 치즈, 사과를 먹은 뒤 안경을 찾아 쓰고 도서관에서 빌린 캐나다 소설가 마조 드 라 로슈의 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난롯불에 맨발가락을 쬐며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기나긴 밤을 죄수처럼 기다렸다.
--- pp.61~62
한 잔 마시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술은 망각을 돕는 게 아니라 기억을 도왔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불쾌한 사실들을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한 패턴으로 재정리해 주었다. 알코올 중독자. 주디스는 위험하고 실망스러운 순간을 떨치려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건 이 모든 시련을 좀 더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더욱 꼼꼼히 따져 보기 위해서였다. 이성을 거절하는 각성제의 힘을 빌려서.
--- p.205
새벽 5시야! 어쩌다? 저녁이 벌써 다 갔다고?
술병이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내가 거의 비어 있잖아. 술병은 침대 근처 바닥 위에 서서, 그 작고 검은 입으로 그녀를 향해 나무랐다. 텅 비었어. 네가 그랬지.
무슨 소리야. 주디스는 술병을 바라보며 웃었다. 너도 참 고리타분한 소릴 하네. 내가 너한테 왜 미안해야 해. 그녀는 술병에게 말했다.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하나도 없어. 왜냐하면 그 이유를 알려 준 사람이 아직 아무도 없었거든. 그래서 난 그 이유가 드러나길 기다리는 중이야. 친애하는 술병 씨, 난 지금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중이야.
--- pp.364~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