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회 정기답사)
의성 산수유꽃길과 사촌선비마을
2015년 3월 26일(목)
의성 사촌마을
경북 의성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마늘일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의성’이라는 이름이다.
‘의로운 성’이라 이름 할 만큼 의로운 선비가 많았고,
반촌 마을이 많은 곳이 바로 의성이다.
남부의 반촌이라 불리는 의성 ‘산운마을’이 있는가 하면,
북부의 반촌으로 알려진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 마을’이 있는 곳이 의성이다.
사촌 마을의 이름은 중국의 사진리를 본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룡 등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이곳 사촌마을에서 태어나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18명,
소과에 급제한 사람이 31명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마을에 3명의 정승이 태어난다고 하며,
신라시대 한 명, 조선시대 류성룡 그리고 한사람이 더 태어날 것이어서
마을 어른들은 출가한 여인들이 친정으로 돌아와
애를 낳는 것을 원치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사촌마을은 풍수상 명당으로서 딱 하나가 부족했다고 하는데,
마을 뒷산으로 문필봉이 떡 버티고 서있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서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오른쪽 지형은 광활한 들판이어서 우백호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풍수를 위해 방풍림을 심었는데 지금
이 숲이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돼 있는 ‘사촌리 가로숲’이다.
마을에서는 서쪽에 있는 숲이라 하여 ‘서림’이라 부른다.
방풍림은 주로 팽나무,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류가 대부분으로,
마을을 이룰 때 심은 나무들이 이제 수령이 600년에 이르는 나무들로 자라,
길이 1km에 폭은 45m 정도의 숲길을 이루며 제방을 따라 산책하기에 좋은 숲길이 만들어 졌다.
사촌마을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1392년으로 안동 김씨인 김자첨이
안동의 희곡에서 이주해 오면서 부터이다. 오래된 마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마을에는 지은지 100여년의 한옥들이 유독 눈에 많이 보인다.
그 이유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이 마을을 왜군들이 불태웠고,
구한말에는 명성황후 시해 후 이곳에서 병신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을 불태우는 바람에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촌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은 1582년에 지은
만취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으로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김사원(1539∼1602)이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세운 건물이다.
만취당은 사랑채 격이지만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서 정자같은 느낌을 준다.
본채에는 사랑채가 따로 있는데, 규모가 매우 작다.
객을 맞을 별도의 만취당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촌 김씨의 문화장소로 사용해 오며,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라 전해진다.
만취당에는 만년송이라는 오래된 향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만년송’이라는 소나무 이름을 붙였지만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다.
수령 500년으로 추정을 하지만, 김사원의 증조부이자,
류성룡의 외조부인 김광수의 ‘송은’이라는 호가 이 만년송에서
나왔다는 고사를 미루어 볼 때 이미 송은 김광수 때에도
만년송은 노송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취당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을 갖춘 대형 건물로
만취당의 현판 글씨는 명필로 잘 알려진 한석봉의 글씨이다.
마을 앞 점곡2교를 건너면 보이는 왼쪽 언덕에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잇는 영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은 김광수가 건립한 정자로 김광수는 이곳에 은거하여 살다.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점곡벽화거리
최근에는 사촌리 일대에 벽화거리가 조성돼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의성군은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침체한 지역에 다시 한 번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벽화거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선비문화를 컨셉으로 한 벽화거리는
약 800m 구간에 선비를 상징하는 매화, 학 등 그림 뿐 만아니라 시로 장식했다.
의성 산수유마을
의성 사곡면 화전리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자생한 200-300년생 산수유나무가
3만여 그루 이상 군락을 이루고 있어 봄이면 마을 전체가 노랗게 산수유 물결을 이룬다.
의성군 사곡면은 의성읍의 동남부에 위치해 동쪽으로는 청송군 현서면,
서쪽은 금성면, 남쪽은 춘산면, 북쪽은 점곡면과 옥산면을 접하고 있다.
화전2리는 경사가 완만한 비교적 높은 산이 뒤를 막았고
임진왜란 이후에 개척된 곳으로 당시 다래와 머루 넝쿨이
우거져 넓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여 숲실마을로 불리워지고,
화전3리는 조선 선조 13년(1580) 통정대부 호조참 노덕래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으며,
산수유나무가 많고 산 좋고 물이 좋아 계속 풍년이 든다하여 전풍마을이라고 불려왔다.
산수유 군락지인 화전리 숲실마을은 2006년 행정자치부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한 ‘제1회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자연경연대회’의 대상을 차지하면서
점점 알려져 해마다 노란 산수유 물결을 보기 위해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살기 팍팍하던 시절, 약재로 팔기 위해 산비탈에 드문드문 심어 놓았던
산수유는 화전리 주민들의 훌륭한 수입원이다.
사곡에서 출하되는 산수유는 경북도내 산수유 생산량의 80%(전국의 38%)를 넘는다 한다.
산수유 꽃물결 사이로 보이는 초록빛 공간은 마늘밭이다.
여느 산에 저절로 자란 산수유와는 달리 화전리의 산수유는 임자가 있다.
주변 논밭을 일군 이들이 심은 나무들이니 당연히 그들이 주인이다.
산수유 고목은 산비탈뿐 아니라 마을 한쪽으로 흐르는 물가에,
마을의 돌담길에 화사한 꽃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화전리의 산수유꽃 행렬이 특별한 것은 주변의 초록빛 마늘밭과 어우러져 연출하는
녹황의 꽃물결 때문이다. 낮고 완만한 산등성이와 긴 골짜기를 메우며
봄을 재촉하고 있는 꽃물결이 아름답다.
3월 하순부터 꽃망울을 터뜨려 4월 중순까지 노란 꽃을 피워 장관을 이루는
산수유는 10월에는 빨간 열매를 맺어 또 다른 풍광을 제공한다.
산수유는 관상수로 많이 재배되며, 열매는 해열과 자양강장기능이
탁월해 한약재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곳, 빙계계곡
빙계계곡은 경북 8승의 하나로, 얼음구멍과 바람구멍이 있어 빙산이라 하며,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내를 빙계라 하고, 동네를 빙계리라 부른다.
빙계계곡은 빙계3리 서원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삼복 때 시원한 바람이 나오며 얼음이 얼고,
엄동설한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신비의 계곡이다.
계곡 안쪽에 자리한 보물 제327호 빙산사지오층석탑은 높이 8.15m의 대형탑이며,
화강석으로 조성된 고려 초의 석탑이다.
마을 건너편에 수십 미터 높이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그 아래 맑은 시냇물 가운데 우뚝 솟은 크고 작은 무수한 바위는
빙계계곡의 아름다운 장관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