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봉의 묘
- 김태익 -
중국 서예사에서 왕헌지는 아버지 왕희지와 함께 '2왕(二王)'으로 불린다.
헌지는 어려서 재주는 뛰어났지만 꾀가 많았다.
어느 날 헌지가 '큰 대(大)' 자 한 자를 써놓고 급히 놀러 나가자 왕희지가
들어와 보고 점 하나를 보태 '태(太)' 자를 만들었다.
헌지가 나중에 이를 어머니에게 보여줬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가운데 점 하나만 잘 썼구나."
왕헌지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서예의 비법을 물었다.
왕희지가 마당에 있는 18개 물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이 안의 물을 먹 가는 데 다 쓰고 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조선조의 석봉(石峰) 한호(韓濩·1543~1605)는 평생 왕희지를 흠모했고,
왕희지의 비법을 실천에 옮겼다.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크면서 종이가 없어 뜰 앞 항아리
표면과 가랑잎 위에 습자를 했다.
깜깜한 밤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는 장면은 그의 피나는
연마를 전해주는 한 에피소드다.
석봉은 왕희지체(體)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소화하고 뛰어넘어 자기만의
'석봉체(石峰體)'로 완성시켰다.
그것은 고려말부터 내려온 중국 송설체의 부드러운 아름다움과 달리
조선서예 특유의 엄정·단아한 아름다움이었다.
▶ 석봉이 품성이 괴팍하고 글씨나 쓰는 기능인이라며 문인 사대부 중
헐뜯는 이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 자신 명필이었던 선조 임금이 막아주었다.
대마도 도주(島主)가 현판 글씨를 하나 써달라고 요청해오자 선조는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아무나 보고 쓰라 하라"고 했다.
▶ 북한의 대남 라디오 평양방송이 최근 개성 근처 황해남도 토산군 석봉리
에서 한석봉의 묘비와 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석봉의 호는 그의 고향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묘비에는 생전 가평군수까지 올랐던 그에게 사후 국왕의 비서인 승지 벼슬이
내려졌고, 명나라 학자가 한석봉의 글씨를
"노한 사자가 돌을 부수고 목마른 준마가 샘물을 향해 달리는 듯하다" 고
격찬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 석봉이 살아있을 때 세상은
최립의 문장, 차천로의 시, 석봉의 글씨를 '송도 3절'이라고 했다.
석봉은 안동 도산서원의 현판, 고양 행주산성의 대첩비와 함께 선죽교비,
화담 서경덕 신도비 등을 고향에 남겼다.
천안함 침몰 이후 개성이 갈수록 멀어지는 땅이 되는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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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谷齋/草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