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교의 기독 학생회 모임인 "하나님의 양떼" 겨울 모임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 앉아 지난 추억을 반추하고 있을 때 문득 작년에 한 후배에게 졸업선물로 받았던 핸드폰 줄이 아직도 내 핸드폰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생각, "아직까지 내가 여자친구가 없었군..."
요즈음은 사랑의 홍수 시대라 부를만 하다. 곳곳에서 "사랑해, 사랑해"를 외치고 있다. 교회에서도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TV에 나오는 수많은 가요, 드라마의 대부분의 주제 역시 '사랑'이다. 어떤 가수는 그녀의 팬이 아닌 이들에겐 조금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팬들에게 "여러분! 사랑해요!"를 외친다.
얼마 전 송구 영신 예배 때에 후배들로부터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오빠(형), 왜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어?" 내지는 "올해는 짝을 만나야지."였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예비역이냐 짝 찾고 다니게...'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계속 듣다보니 이것이 요즘 우리들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애 인 권 하 는 사 회."
요즘은 이성친구가 없으면 좀 바보같고 모자란 사람처럼 보이는 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도 매체에서, 주변에서 떠들어 대니 말이다. 얼마 전 메일 매거진 '오늘의 유머'에 실렸던 글이다.
커플 & 쏠로 best 5
>> 5위
커플 - 사고 치면 아기가 생긴다. ^^;;
쏠로 - 사고 치면 전과가 생긴다. -_-+
>> 4위
커플 - 만난지 며칠이 됐는지 계산하고 기록한다.
쏠로 - 천장에 같은 무늬가 몇 갠지 세 아린다..
>> 3위
커플 - 내일을 기약하며 잠이 든다.. 가끔 설레임으로 잠을 뒤척이기도 한다.
(좋겠다^^)
쏠로 - 늘 잔다.. 자다가 지치면 일어난다.
가끔씩 엄마가 히떡 디비주고 간다. 일명 찌짐
>> 2위
커플 - 상대방을 위해 늘 깨끗이 씻는다..
가끔 상대방의 몸도 씻겨준다.. --;;; (정말일까??? 0.0)
쏠로 - 언제 마지막으로 머릴 감았는지 기억을 못한다.
어깨위로 눈이 내린다..
>> 1위
커플 - 상대방이 뭐하고 있을까..하고 항상 궁금해 한다.
전화나 e-mail을 통해 수시로 확인한다..
쏠로 - 난 뭐 하는 놈인가 궁금하다....
아버지한테 "아버지... 난 누구에여?? " 하고 물어봤다가 뒤지게 맞는다..^^:
헐... 이런 것들이 난무할 정도면 이성친구 없으면 바보다라는 생각에 세뇌될 만도 하다.
'사랑'이 난무하면서 현대의 아이들에게 '사랑의 고결함'은 이제 사라져 가고 있다. 얼마 전 후배와 함께 걸으며 했던 대화가 생각이 난다. 아까도 말했듯이 요즘이 애인 권하는 사회이기에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성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져갔다.
"야, 너는 여자친구 없냐?"
"없어요. 에이~"
"왜? 너 정도면 인물 좋지, 성격 좋지 뭐 빠질 게 있냐?"(장난 삼아...^^;)
"전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사귈래요. 요즘 그냥 단순히 좋아서 사귀고 금방 깨지고 하는 것 보면 좀 천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헐~ 그럼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거랑 어떻게 틀린대?"
"......!?"
"좋아하는 것은 요만큼 호감이 있는 거고, 사랑하는 것은 이~만큼 호감이 있는 거?"
"음...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닌가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감정의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사랑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 빠져있다. 물어보면 거의 80%다. 그래서 자꾸만 운명적인 사랑을 찾게 되고, 감정을 넘어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과도한 스킨쉽과 육체관계를 주로 한 이성관계를 갖게 된다. 나는 과감하게 이러한 오해를 "초등학교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오해가 얼마나 우리들을 망쳐 놓고 있는지도.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인격적인 것이다. 인격의 세 요소인 지성, 감정,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잇는 것이다. 사랑이 감정의 차원에서만 머물게 될 때 그 사랑은 참으로 멋진 것처럼 포장된다. 운명적인 만남, Feeling, 젊은 이들의 전유물 쯤으로 여기게 된다. 도덕과 이성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한다.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고방식에 젖어들게 된다. 사랑을 감정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부모님은 가장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다. 별로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평생을 살고 앞으로도 죽기까지 함께 살아야 할까... 참 이상할 뿐이다. (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분명히 감정의 소유물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의 차원을 훨씬 뛰어 넘는 전 인격적이고 젊은이들이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참되고 아름다우며 진실한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게 되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말 성경에 '사랑'이라고 말한 것을 원어는 다 '사랑한다'는 동사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인격을 통해 행동으로 열매 맺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교제에 이 완전하고 인격적인 사랑이 회복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선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인격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잠시 한 걸음 뒤에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냉철한 이성을 통해 상대방과 자신이 정말 합당하며 올바르고 무리가 없는 사이인지 관찰하고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이성교제에 무슨 조건이냐!"라고 따질지는 모르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학력이나 돈 따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럼이 없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이인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친구의 칼럼에서 좋은 글을 발견하여 그 일부를 싣는다.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하나님을 순간 순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함께 계심을 잊어버릴 때 그것을 증거해주는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과의 만남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것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바라보셨던 대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셨던 정체성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다윗이라는 남자와 아비가일이라는 한 여자의 만남을 다룬 글을 읽으며 자신의 배우자를 위한 기도 목록에 '아비가일 같은 이'를 추가했다고 간증한다.
내가 말하는 조건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첫째로는 서로의 영적, 인격적 주파수가 맞는지 따져야 한다. 둘째로 서로의 인간관계(가족, 친지, 사회적 위치)의 주파수가 맞아야 한다.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꼭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만나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라이프 스타일의 주파수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번 찾아보라. 과연 나와 '딱 맞는' 짝은 있는가? 답은 '없다.'이다. 세상에는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그들은 저마다 다 다른 모습을 하고 산다. 여기서 우리의 '의지'가 발동한다. 사실 나와 딱 맞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교제 상대를 위해 우리는 희생하고 용납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을 나도 먹고, 상대방이 때로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해도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감정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이 주가 되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이 감정의 작용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의 의지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의 사랑과 이성교제가 감정에만 이끌려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감정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위의 글을 죽 읽으며 독자들은 감정이 나쁜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오해다. 감정은 인격의 한 부분이고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다. 감정은 우리의 의지를 고무시킨다. 감정은 우리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살찌운다. 사랑에서 감정이 빠지면 사실 이성이나 의지가 빠지는 만큼이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연인들의 따뜻한 눈빛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라. 끔찍하지 아니한가. 다만 우리가 균형을 잃고 있기에 사랑의 이성적 측면과 의지적 측면을 이 글을 통해 부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가장 위대한 잠언인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