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포늪 가을 노래/이미영
우포늪 제2 전망대에서 김민기의 ‘가을 편지’를 불렀어요. 우리가 우포늪에 간 날이 김민기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 100일째라고 해요. 우포늪과 우리와 추모에 어울리는 노래를 뽑아오느라 늦은 밤까지 컴퓨터 앞에 있었다는 친구는 칠십을 바라보는 언니입니다. 초등학생 딸을 둔 동생 같은 친구는 김민기가 우리와 함께 노래 부르도록 인터넷에서 ‘가을 편지’를 찾아 배경으로 띄웠어요.
누가 우포늪에 찾아와 노래를 불러 주었겠어요. 새소리, 바람 소리, 나무 흔들리는 소리만 듣던 우포늪에게 생전 처음 듣는 김민기의 노래를 여섯 곡이나 들려주었어요. 그의 투박하게 정감 어린 목소리와 우리의 어설프게 정성스러운 노래가 싫을 리 없을 테지요. 새벽녘에 내리던 가을비가 느지막이 멈춘 덕분인지 월요일 때문인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우포늪은 우리의 노래가 기꺼웠겠지요.
전망대에 놓인 망원경으로 따오기를 찾아보고 이름도 모르는 아무 새도 구경했어요. 아무 새들은 꽤 시끄럽게 이야기하며 날아다녔어요. 새들이 말수가 많은 족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지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는지 잘 모르지만, 우포늪을 바라보며 노래 부르고 새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너르디너른 늪지대가 사랑스럽게 다가왔어요.
한때는 전국 산속을 다람쥐처럼 돌아다니던 친구가 무릎 연골이 찢어져 더는 산행이 어려워졌어요. 산행에 동반하던 지팡이를 들고 와서 늪지대 구릉을 조심조심 짚고 다녔어요. 무릎이 견딜 수 있을 만큼 숲속을 누비고 나면 속이 뻥 뚫린대요. 영주의 깊은 산골에서 나고 자란 그는 밤낮없이 들판을 쏘다니며 산딸기와 머루를 따 먹어 입가가 시커멓던 어린 시절을 들려주었어요.
산골 소녀였던 친구는 늘 산행이라고 말했지만 도시 아이였던 저는 항상 등산이라고 대꾸했지요. 생태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산행 mountaineering이 등반 climbing보다 더 나은 말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산에 대한 우리의 숭배 방식이었지만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산 자체였으니까요.”라고 했어요. 산행은 자연에서 뛰노는 사람의 말이었나 봐요.
제2 전망대를 돌아 목포제방으로 가는 길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났어요. 창녕지역에는 계절 노동자들이 많거든요. 모처럼 쉬는 날 고향 친구들과 놀러 나온 모양이에요. 우리가 웃자, 그들도 설핏 웃어 주었어요. 제방 위에서 사진을 부탁할 참이었는데 그냥 지나가고 말았어요.
낮은 풀이 넓게 깔린 목포제방에 서 있으면 전망대에서 느끼던 광활한 우포늪은 박새가 발 옆으로 총총 지나갈 듯이 다정하게 다가와요. 왕버들과 습지가 어우러져 우포늪이 한 컷 안에 고스란히 들어가는 곳에서 깔깔거리며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목포제방 위에 다른 무리가 나타났어요. 어디서 왔어요, 어떤 관계여요, 전망대에서 만났던 수다쟁이 새들처럼 우리도 전에 없던 높은 소리로 지저귀었어요. 휴가를 나온 수녀님들이었어요. 같이 공부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섬기는 수녀 동기생들이랍니다. 오랜만에 만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친구들이 서로를 위해 사진을 찍어줍니다.
한 분이 먼저 우리에게 단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어요. 우리도 수녀님의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기념사진을 찍어주었어요. 몇 번이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라고 인사했어요. 다 합하면 백 번이 넘을지도 모르겠어요.
조그맣게 멀어진 외국인 노동자들의 뒷모습이 허전해 보였어요. 잘 쉬다 가라는 인사를 못 했어요. 우포늪이 한 컷에 담기는 곳에서 그들의 기념사진도 찍어주지 못했어요. 이곳은 철새들이 마음껏 쉬었다 가는 곳인데, 고향 떠난 그들도 여기서 텃새 같은 우리와 자유롭게 지저귀었으면 좋겠는데. 다 함께 기념사진도 찍지 못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자니 미안한 마음이 일렁거렸어요. 괜한 텃새의 생각일까 싶어 우물쭈물 바라보기만 했어요.
사람은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하지만 자연은 사람과 함께 아니어도 평안하다. 맞는 말이 아닐지도 몰라요. 식물에 음악을 들려주면 더 파릇해지고 동물에게 들려주면 더 건강해진다는 보고가 있어요. 우포늪은 1만 5천 년 전 빙하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해요. 여태 이 자리에서 사는 걸 보면 사람보다 듣고 본 것이 많을 텐데 어떻게 음악을 모르겠어요. 우리의 노래를 즐겼을 거예요. 어떻게 웃음을 모르겠어요. 우리와 수녀 친구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웃음소리에 기뻤을 거예요. 우리 세 무리가 목포제방 위에서 다 같이 사진을 찍으며 웃었더라면 더 좋아했겠지요. 자연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평형을 만들면서 나이를 먹었잖아요. 조화도 평형도 이루지 못하는 우리를 보면서 자연스러움을 가르쳐주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나이가 스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친구들이에요. 우포늪에서 한목소리로 가을을 노래했어요. 이국땅에 건너온 계절 노동자들은 고향을 닮은 우포늪에서 고향 친구들과 편안한 한때를 보냈겠지요. 수녀 동기생들은 목포제방 위에서 단체 사진을 찍으며 오늘을 행복해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겠지요. 1만 5천 살 먹은 우포늪은 새와 나무의 소리와 사람들의 노래와 웃음소리를 기억할 거예요. 언제라도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면 좋겠어요. 누구라도 거기에서 즐거이 노래하고 깔깔 웃어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