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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바야흐로 급격한 출산율 감소의 여파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지자체나 교회도 충격이 크겠지만, 저희 살레시오회처럼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단체가 받는 영향을 심각합니다.
신입생 감소로 인해 매년 학급수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학교를 운영하는 재단이나 교사들, 실무자들의 고초도 만만치 않습니다. 점점 비어가는 큰 규모의 건물들 유지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는 교회나 수도회 안에서도 축소 및 통폐합 전문가 양성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이제는 대대적인 성전 건립이나 부속 건물의 신축을 지양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건설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모교회로서 세상 모든 성전들의 원천이요 규범이 되는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로마에 머물 때 종종 라테라노 대 성당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베드로 대성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 위용과 규모가 대단합니다. 걸작의 성화들과 예술품들로 가득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을 제정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성당들을 라떼라노 대성당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면모를 본받도록 하기 위함에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런 축일에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성찰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과 관련해서 참으로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보십시오. 진정한 의미의 성전은 우리 눈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고색창연한 외형적인 성전이기보다는 내적인 성전이요 영혼의 성전입니다. 어찌보면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각자가 또 하나의 성전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죄와 악습으로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이 훼손되고 오염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영혼이지만, 그 안에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로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보면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복음: 요한 2,13-22: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 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대로하셨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 이름의 발음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인데, 늘 ‘조명현’으로 부릅니다(아직도 동창 신부 중에서는 ‘조명현’으로 부르는 신부가 있습니다). 이름에 받침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부모님께서 지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밝을 명(明)자와 뻗을 연(衍)자를 씁니다. 밝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또는 밝음을 지향하며 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이런 생각으로 제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만 불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이름대로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름을 얻게 됩니다. 저의 경우,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조명연’ 외에도 별명인 빠다킹, 제 신분을 나타내는 ‘신부’, 책 냈다고 ‘작가’, 강의한다고 ‘강사’ 등…. 제가 하는 일에 따라 이름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름이 붙일지는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면 ‘죄수’가 될 것이고, 사기를 치면 ‘사기꾼’, 살인을 하면 ‘살인범’….
어떤 이름을 바로 세울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환경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값을 남이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이름을 갖도록 내가 노력해야 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늘 사랑만을 이야기하셨고,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랑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폭력’을 사용하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우리 각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다는 표징으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면서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각자에게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주님의 성전에 걸맞은 이름을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한보다 조금만 더 매일 행하라(로웰 토머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9)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의 강물이
세상을 촉촉이 적시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서
메마른 광야를 지나
깊숙한 골짜기를
굽이굽이 돌아나가면
세상은 생기를 얻고
만물은 되살아난다네.
강물이 닿는 곳마다
말씀의 세례로
세상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내 마음속 성전이
때로는 시장터 같습니다.
때로는 삶이 가져다주는 걱정과 번민들
때로는 일하는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살아가는 복잡한 마음들,
때로는 장사치가 되어
상인이 되어야 하는 마음들 때문에
나의 성전이 속절없이
더럽혀진 시장통이 되기도 합니다.
가장 소중한 성전이 되어야 할
나의 몸과 마음들,
오늘도 저는 제 안을 살피며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리고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을 통해 머물러 봅니다.
나를 비워야 내 마음의 성전이 깨끗해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채울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따름 노래 “성전 오른쪽에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