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의 판이 또 한번 요동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에 미사일 등 주요 무기를 제공하는 미국과 독일이 지난 31일 자국산 무기로 국경 너머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단, 러시아군에게 크게 밀리고 있는 북동부 하르코프(하르키우)주(州) 전선에서 사정거리 80Km 이하의 무기만 사용하도록 했다.
미국의 다연장로켓시스템 '하이마스'/사진출처:록히트 마틴
하지만, 그동안 확전을 우려해 자국 무기의 러시아 본토 공격을 완강히 거부했던 미국과 독일이 비록 제한적이지만 이를 허용한 것은, 서방이 의도치 않게 계속 우크라이나 전쟁에 깊숙이 끌려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차(탱크)와 F-16 전투기 등 중화기에 이어 다연장로켓발사시스템인 '하이마스'(HIMARS)와 장거리 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도 논란 끝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됐는데, 이중 일부의 러시아 본토 공격 허용이 언젠가는 '서방 무기의 사용 제한을 완전히 풀자'는 나토(NATO) 진영의 합의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관련,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영국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폴란드 등 10여 나토 회원국이 이미 (본토 공격 제한 해제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헝가리 등 일부 국가는 여전히 반대하는 쪽에 서 있다. 친러 성향의 헝가리(시야르토 페테르 외무장관)는 “러시아의 반격 가능성을 생각하면 이는 미친 아이디어”라고 반발했고,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도 “러시아 본토 공격보다 우크라이나 방공망을 강화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만나는 블링컨 미 국무장관/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최종 결정권은 결국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의 결정에 유럽 국가들이 뒤따라간다고 보면 된다. 이번에도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31일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나토 외무장관 회의 이후 “우크라이나의 요청에 따라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발표하자, 독일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독일 정부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협의했다"면서 "독일산 무기의 러시아 본토 공격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 조건부 러시아 본토 공격 허용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이날(31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에서 "우크라이나에 주요 무기를 공급하는 미국과 독일은 키예프(키이우)가 오랫동안 요구해 온 러시아 본토 공격 요청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다"면서 그러나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기대에는 못미쳤다"고 분석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미-독 양국의 이날 발표를 환영했지만, "현재 드론만으로 공격이 가능한 러시아 본토의 비행장과 창고, 군사 기지 등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300㎞의 '에이태큼스' 미사일의 사용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또 '스톰 섀도' 장거리 미사일을 제공한 영국도 "우리가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나온 보도로만 보면,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하르코프주 볼찬스크(보우찬스크)와 리프치 등과 가까운 러시아 영토를 향해 미-독 무기를 쓸 수 있다. 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북부 수미주(州) 등지로 새로 공격을 가해올 경우, 이 지역 너머 러시아 영토를 서방 무기로 타격이 가능하다.
사용이 가능한 무기는 사정거리 80Km 이하의 야포와 다연장로켓시스템(MLRS)이다.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미국의 '하이마스'(HIMARS)와 중거리 유도 다연장 로켓 시스템(GMLRS), M777 곡사포 등 야포, 독일의 PzH2000(Panzerhaubitze 2000) 자주포와 '독일의 하이마스'로 불리는 '마스(MARS) II' 등이다. 독일 일간지 빌트는 그러나 "독일은 특히 국경에서 40km 이내에서, 하르코프 지역 방어를 위해서만 독일 무기의 사용을 허용했다"고 썼다.
'독일판 하이마스'로 불리는 마스-2/사진출처: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측이 강력히 요구해온 '에이태큼스'와 같은 장거리 미사일은 이번 조치에서 배제됐다. '스칼프 미사일'(영국 표기로는 '스톰 섀도') 장거리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보낸 프랑스도 같은 입징이다. 독일은 아예 '타우러스' 장거리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거부해 왔다.
◇하르코프 전선의 뒤집기 전략?
이번 조치로 서방 측이 노리는 것은, 하르코프 주변의 동북부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러시아군이 이미 진입한 하르코프 지역과 공격 작전을 준비중 수미 지역이 그 대상이다. 러시아군은 지난달(5월) 10일께부터 우크라이나 제2 도시인 하르코프를 겨냥해 동북부 지역으로 전선을 넓혀가는 중이다. 기존의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전선과 남부 전선(자포로제주와 헤르손주)에 배치된 우크라이나군이 하르코프 전선의 방어를 위해 서둘러 이동해야만 했다.
하르코프는 러시아 국경에서 불과 30㎞ 떨어져 있다. 지형적으로 러시아 영토에 막강한 지원부대를 두고 국경 너머 하르코프 공략에 나설 수 있는 거리다. 특히 지난 2월 전략 요충지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 함락 과정에서 가공할 만한 위력을 선보인 '에어폭탄'(활공폭탄) '카브'를 러시아 상공에서 하르코프를 향해 발사가 가능하다.
하르코프의 지형적 위치. 표시된 지역은 러시아군이 공세를 가하고 있는 볼찬스크(보우찬스크)이고, 왼쪽 위로 러시아 국경도시 벨고로드가 보인다/출처:얀덱스 지도
우크라이나군은 '카브'가 날아오는 방향과 지점(벨고로드 주변)을 뻔히 알면서도, '카브'가 발사된 러시아군의 폭격기 격추에 나서지 못했다. 보유한 장거리 자주포와 미사일·로켓 등이 대부분 미국 등 서방이 지원한 것으로, 국경 너머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독의 이번 조치로 우크라이나군은 '카브' 발사를 위해 러시아 상공에 이륙한 적 폭격기를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 등 서방 무기로 격추하는 게 가능해졌다. 사실상 한쪽 팔이 묶인 상태로 러시아군의 공세에 대응해온 우크라이나군으로서는 전술적 수단과 전략적 입지를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하르코프를 겨냥해 발사된 러시아 미사일을 러시아 상공에서 요격하거나, 우크라이나 땅에 폭탄(에어폭탄 '카브')을 떨어뜨리는 러시아 폭격기를 격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방공 무기(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에어폭탄 '카브'의 설명 영상/텔레그램 캡처
나아가 만약, 우크라이나군이 하르코프 지역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기 위한 반격 작전이라도 편다면, 이번 조치는 우크라이나군의 공격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군은 서방 측으로부터 타격 목표의 촤표 설정 등 다양한 군사적 지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판이 바뀌거나 뒤흔들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여전히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핵심 군사 시설을 공격해 확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최근 자국산 드론으로 러시아의 장거리 조기 경보 레이더 시스템 ‘보로네시-DM’을 2차례 공격한데 대해 ‘경고성 우려’를 전한 게 대표적이다. 이 레이더는 러시아의 핵 공격 조기 경보 시스템의 일부로, 자칫하면 러시아의 보복 핵공격을 부를 수 있는 ‘전략 핵시설’로 간주된다. 이번 조치가 실제 군사적 효과를 크게 능가하는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스트라나.ua는 31일 미국은 이번 조치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 의지를 보여주면서 △푸틴 대통령이 설정한 '레드 라인'의 범위와 대응 수위를 탐색하고 △맞대응을 둘러싸고 러시아가 내분을 일으킬 수 있도록 자극하는 한편,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다음 단계, 즉 장거리 미사일의 사용 허가도 가능하다는 신호를 러시아 측에 보낸 것으로 풀이했다.
우려되는 것은 러시아와 서방 측의 강경 세력이다. 서방 측의 강경파는 러시아의 핵무기 위협은 '공갈포'이며, 겁낼 이유가 하등 없다고 주장하면서 "나토군을 우크라이나에 파병해서라도 러시아군을 무력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러시아 강경파는 선제적으로 전술 핵무기를 사용해 '핵 전쟁'의 심각성을 서방 측에 직접 전달하자는 주의다. 유럽 국가 중 한 곳에 시범적으로 핵무기를 발사하면, 핵전쟁을 두려워하는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의 요구 조건을 수용할 것이라는 논리다.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유럽에서 '핵 위기'로 재현하자는 주장이다.
안타깝게도 양측 강경파의 논리는 모두 '가정'을 전제로 한 '불장난' 성격이 강하다. 서방 측은 '푸틴 대통령이 나토의 직접 참전에도 감히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러시아 측은 '서방이 러시아 맞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핵전쟁'에는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전제다. 이 전제들은 현실과 맞지 않을 수도 있고, 특정 시점과 상황에 따라 틀릴 수도 있다. 그 경우 인류에게 재앙적인 결과는 불가피하다. 인류 전체를 놓고 벌이는 '치킨 게임'과 다를 바 없다.
◇ 러시아의 대응은?
러시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 측의 대(對)우크라 지원이 확대될 때마다 내놓은 '심각한 후과(後果) 경고'를 이번에도 반복했고, 크렘린은 아예 "미국의 미사일은 이미 (크림반도 등) 러시아를 공격하고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반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가 서방 무기의 러시아 본토 공격에 대응해 감히 비전략적 핵무기(전술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서방이 믿는 것은 착각"이라며 "이는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으며, 유럽의 국가들은 인구 밀도가 매우 높아 전술적 핵무기의 효과는 이론적인 파괴력을 넘어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3성 장군 출신의 안드레이 카르타폴로프(Картаполов, Андрей Валериевич) 국가두마(하원) 국방위원장도 “러시아 본토 공격에는 ‘비대칭 보복’을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비대칭 보복’은 공격받은 이상(전술핵무기)으로 반격하겠다는 뜻이다.
바티칸은 앞서 지난 30일 우크라이나가 서방 무기로 러시아를 공격하도록 허용하면, '통제할 수 없는 확전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 3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크라이나의 패배를 전제로 한 듯, 협상에 응할 용기를 내야 한다고 충고한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서방의 이번 조치에 즉각 보복 대응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조치가 전쟁의 흐름을 바꾼다고 판단할 경우, 맞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더 높다. 러시아는 이미 돈바스 지역에서 '하이마스'(HIMARS)의 공격을 여러 차례 체험했고, 대처 방안도 찾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러시아군이 주요 전선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한, 모스크바가 '핵 카드'를 뺄 가능성은 낮다.
서방 측이 앞으로 크렘린의 '레드 라인'을 더 과감하게 넘어설 경우, 러시아의 대응은 달라질 것이다. 장거리 미사일의 러시아 본토 공격 허용이나,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의 비행 금지 구역 설정, 나토군의 우크라이나 파병 등이 대표적이다.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평화협상이 재개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 평화협상의 재개 조짐은 전혀 없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31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은 어떤 합의도 깨뜨릴 것"이라며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의 평화협정은 '함정'일 뿐,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 5월 20일 이후 (공식 임기가 끝난) 젤렌스키 대통령의 법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미국의 고민
미국은 지난 3월 오랜 고민 끝에 장거리 미사일 '에이태큼스'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결정한 뒤, 한발 더 우크라이나 전쟁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다. 거꾸로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의 빗장 하나를 더 푼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의 에이태큼스 미사일/사진출처:위키피디아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2월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무기 지원을 불사하면서도 미·러 두 핵보유국 간의 직접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수준의 전쟁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해 왔다. 방어용 무기는 제공하되 파병하지 않고, 미국이 제공한 무기는 우크라이나 영토 안에서만 쓰도록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전황이 점점 더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5개월 앞으로 다가온 11월 대선을 생각하면,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우크라이나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또 의회로부터 608억 달러(약 83조원) 규모의 우크라이나 추가 군사지원안을 가까스로 따낸 상황이다. 머뭇거렸다가 자칫하면, 대선 상대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 공격의 빌미를 줄 수도 있다. 최소한 현재의 전황이라도 유지해야 하는 게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필요하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이 프라하 나토 외무장관 회의에서 앞으로도 몇 년간 우크라이나에 대한 400억 유로(약 60조원) 상당의 군사지원을 약속하고 이를 나토 동맹국이 공평하게 분담하자고 제안한 것도 미국에게는 위안이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