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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수요일. - 알아듣기 어려운 말일지라도 참 제자라면. 등 )
*** 05:24,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10:30, 김명겸 요한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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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20 05:16
- 알아듣기 어려운 말일지라도 참 제자라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이 길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생명이시라는 말씀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길이시라는 것은, 당신께서 하늘과 땅 사이의 길이라는 것,
곧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이어 주시는 길이라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시라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없으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그 차이만큼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벌어져서
하느님은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고,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분이실 것입니다.
아무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가교요 통로가 되어 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길이시라는 것은 이렇게 고맙고 가깝게 다가오는 것에 비해
진리시라는 것은 그리 가깝지 않고 그래서 그리 고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주님은 우리의 느낌에 가깝지 않고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진리의 주님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말처럼 말씀이신 주님이십니다.
말씀이신 주님은 하느님께서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분으로 모든 것이 생겨났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지만
정작 그 말씀을 하신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는 분이고,
그래서 멀리 계시는 분이고 신비이신 분이십니다.
아무튼 진리의 말씀이신 주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게 했기에
이때의 진리는 원리 곧 모든 생명의 원리요 생성의 원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주장하며
진화론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진화론은 창조적 진화론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생겨났기에
자연 만물과 모든 일도 이 진리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고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진리는 이치 곧 자연의 이치요 작동의 이치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이치에 따라 모든 것이 돌아가고 움직이면
일은 순리대로 잘 풀릴 것이고,
생명은 죽지 않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치를 따르지 않고 누가 제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때의 자유는 진리에 역행하고 순리를 따르지 않기에
일은 꼬이게 하고 생명을 죽게 하는 자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그리고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의 길을 가면 생명의 길도 갈 것이고,
진리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자유라야
그 자유가 생명의 자유요 참자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씀 참으로 알아듣기 쉽지 않지만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라면
그러기에 오히려 이 말씀 안에 오래 머무는 오늘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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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터넷에서 텀블러를 구입했습니다. 사실 몇 개의 텀블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쇼핑몰에서 텀블러 가격이 터무니없이 싼 것입니다. 840원. 그것도 배송비 포함이었습니다. 주문하고 며칠 뒤에 텀블러를 받았습니다. 워낙 가격이 쌌지만, 텀블러의 질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허접하고 지저분했습니다. 물로 깨끗이 닦다가 글쎄 손을 베고 말았습니다. 텀블러의 입구가 제대로 마감되어 있지 않아서 날카로운 것입니다. 싸게 샀지만, 현재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혹시 입술을 베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게 쓸데없는 짐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매우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결코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를 떠올렸을 때 결핍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것이 없어서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욕망하는 것이 적을수록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로우며, 더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면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줄어들게 됩니다. 온전히 나의 노력을 통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나’를 만들려다 보니 남과 비교하면서 부러운 이유만이 늘어납니다.
미국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는 “더 강한 사람일수록 원하는 게 적다.”라는 말을 자기 외투에 새겨놓고 늘 다짐했다고 합니다. 원하는 게 적을수록 ‘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더 강한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모든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삶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하라고 하셨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통해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세상 것에 욕망을 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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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선으로 다가가려 노력할 때, 악에서 멀어지려 자신을 통제할 때 두 단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 떳떳하고 평온한 삶을 확보해 줄 그 두 단어는 바로 ‘지속하라’와 ‘저항하라’이다(에픽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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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요, 동시에 진리와 자유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을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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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 안에 자유롭게 되기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그냥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라2,20)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않았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17,21.).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야 합니다.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넌 내 마음 몰라.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내 마음 몰라. 떨리면서 떨리지 않는 척하는 내 마음 몰라.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열병을 앓고 있는 내 마음 몰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나를 아는 분은 누굴까? 참새 마음은 참새가 알고, 비둘기 마음은 비둘기가 안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속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를 알고, 저도 주님을 압니다.’하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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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이를 먹으면서 하지 않아야 할 말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잔소리’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지내기 마련입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 심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잔소리가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멀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배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자주 여세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철이 들면서부터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되었으니 저를 믿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침묵이 더욱 무겁게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반복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따분하고 귀찮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지난날의 허물을 들추어내면서 험담하고, 불평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부부간에 다툼이 있을 때라도 지금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예전에 있었던 일까지, 특히 친정과 시댁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꺼내면 다툼은 싸움에까지 이르고,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기도 합니다. 셋째는 ‘나 때는’이라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저도 예전에 선배들이 ‘나 때는’이라고 하면서 훈계를 하면 귀찮았습니다. 돌아보니 저도 가끔 ‘나 때는’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일 수 없다고 합니다. ‘나 때는’이라는 말은 서랍 속에 깊이 넣어두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를 경청하면 좋겠습니다. 본당 모임에서, 사목회에서 이 3가지 말만 조심하면 사목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우리 삶의 등대가 되고, 지치고 목마른 영혼에 단물이 되지만 제게 특히 가슴을 뛰게 했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저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상선벌악(賞善罰惡)은 문화와 문명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품성구로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로 정했습니다. 성실하게, 정당하게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득세하고, 불로소득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을 사유화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신학교에서 강의 시간에 이 성경말씀을 들었는데 마치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본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는 있지만 참된 자유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유는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는 상태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희망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었지만 라자로에게 인색했던 부자는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부자청년은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비록 불가마 속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 놓았기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기꺼이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했으니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희망 때문에, 열정 때문에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면 감옥에 있어도, 병중에 있어도, 가난할지라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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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떤 자유를 이야기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그 ‘자유’일까요? 과연 주님의 자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종노릇을 한 적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종노릇을 한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는 모두 틀렸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자유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노릇을 한 적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 죄의 종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어둠은 우리 영혼은 어둠에 묶어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다른 죄와 연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유다인들의 첫 번째 죄고 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두 번째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를 수 있다면 진리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 진리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 말이 어렵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머무름이 우리에게는 더 큰 깨달음을 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말씀에 머무르십시오. 그 말씀을 되뇌고 또 되뇌십시오. 그 말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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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회복이 빠릅니다.
마음보다….
몸도 상처를 입습니다.
마음도 상처를 입습니다.
몸의 상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그렇게 새살이 돋아납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저 앓고 있습니다.
그저 덮어 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깊숙이 곪아 갑니다.
마음 상처 잘 봐주세요.
몸보다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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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로와 인간이고 자유로와 행복입니다. 자유가 있을 때 인격이지 자유가 없으면 인격도 없습니다. 과연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자유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천지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존재임을 알림이 자유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그리스의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명도 특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평생 자유를 추구했지만 자유롭지 못한 작가였습니다. 우리 수도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하고 날로 자유로워지는, 자유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자유를 추구하지만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세상의 노예되어, 종되어 살아가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된다’라는 말마디는 저의 지론입니다. 광야인생 셋 중 하나 즉, 성인이 아니면 폐인, 또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된 자들 얼마나 많은지요! 잘못된 자유의 헛된 추구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으로 괴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제 저는 얼마전 영국의 유명한 베네딕도회 출신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1923-1999)에 대한 글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느 유다인 랍비의 흄 추기경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내가 흄 추기경을 생각할 때 나는 유다이즘의 초기 성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묻는다: “누가 영웅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드는 이다(One who turns strangers into friends).” 그것이 바로 흄 추기경의 위대한 은총이었다. 그는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감정으로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였다. 너희는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너희들은 한없이 넓어짐을 느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친구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는 삶안에서, 죽음의 면전에서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했다. 흄 추기경은 참으로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든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만나는 낯선이들을 누구나 친구들로 만들었던 흄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매력적인 참 자유인입니다. 대하는 이들을 누구나 무장해제시켜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 바로 참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역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또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자유 역시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참 다양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 자유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참 자유의 비결은 이 하나뿐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저절로 자유가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제자로 사는 선택이 우선입니다. 바로 이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이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진리의 자유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혼자 격리된 자유가 아니라 더불어 주님안에 머물러 제자들로 살 때 비로소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떠나서는, 더불어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참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의 여정은 우리 각자 날로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알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불간분의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진리없는 자유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라 물으니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은 침묵뿐이었을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함께 갑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조자”라 불리길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 역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진리에 몸바치는 것이 소원”이라 했더 불가의 고 성철 대선사 역시 익명의 크리스천이자 대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 자유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교회에서 죄의 종으로 머문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정녕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님과 일치를 깊이해주는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진리자체이신 예수님을 떠나 자유의 추구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은 행위일뿐입니다.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함이 참 자유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참 자유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자유로이 거니는 세 청년들 참 자유인의 상징입니다. 세 청년이 ‘이슬 머금은 바람 서늘한’ 불가마 속에서 한 일은 오늘 독서에서 생략됩니다만 단 하나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드리며 찬미하였다.’
새삼 불가마 같은 공동체 생활 중에도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는데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은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 찬미에 전념할 때 온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기절초풍하여 그 사유를 묻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입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참으로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온전한 자유인들의 공동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귀신이 곡할 기적에 놀란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입니다.
“사르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의 진리의 용사로서 참 자유인의 삶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리이신 당신 안에서 날로 자유로워지는 예닮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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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유>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믿음 안에 머무르는
의심으로부터의
자유는 믿음
희망 안에 머무르는
무기력으로부터의
자유는 희망
사랑 안에 머무르는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랑
진리 안에 머무르는
허위로부터의
자유는 진리
선 안에 머무르는
악으로부터의
자유는 선
빛 안에 머무르는
어둠으로부터의
자유는 빛
포용 안에 머무르는
독선으로부터의
자유는 포용
자비 안에 머무르는
비정으로부터의
자유는 자비
화해 안에 머무르는
배척으로부터의
자유는 화해
일치 안에 머무르는
분열로부터의
자유는 일치
섬김 안에 머무르는
군림으로부터의
자유는 섬김
살림 안에 머무르는
죽임으로부터의
자유는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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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요한 8,31)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처한 조건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인내는 가르침이 깊이 뿌리내렸을 때 가장 잘 샘솟습니다. 땅에 깊이 뿌리 박은 참나무를 뿌리 뽑아 버릴 수 있는 바람은 없듯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미음으로 못 박힌 -뿌리내린 데서 더 나아가 못까지 박혀 있다면 - 영혼은 파멸할 수 없습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싶어 하십니다. 신앙의 겉모습만 지니고 있지 않은지 알아보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더 충격적인 말로 그들의 영혼 깊이 파 들어가십니다 ...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믿지만 머무르지 못할 이들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굉장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들이 실로 당신의 제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때는 믿었지만 머무를 수 없어 떠나간 이들에 대한 암묵적인 꾸짖음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하느님의 존재가 나의 생명입니다. 나의 생명이 하느님의 존재라면, 하느님의 존재는 나의 존재일 것이고, 하느님의 방법은 나의 방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 지혜서에서 우리는 이런 구절을 읽습니다. ‘의로운 자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 그들이 받을 상은 하느님 안에 있다.’"
존재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거나 맛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장애물은 우리 자신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시간을 대하는 우리 태도가 우리를 그렇게 방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우리의 이분법적인 태도다. 이분법적 의식이야말로 존재 및 하느님과의 합일을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근본적인 태도다. 존재 안에서 대립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를 거스르는 또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체적으로 대립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립이란 무엇입니까? 사랑과 슬픔, 흰색과 검은색 - 이러한 것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존재 안에서 대립은 영원하지 않습니다.”(139)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3절: 1054년의 동방 대이교
콘스탄티노플에서의 교섭은 처음부터 불행하게 진행되었다. 사절들은 대단히 자신있게 총대주교와 맞섰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와 베드로의 후계로 이어지는 교황의 절대적인 수위권에 의거하여 로마의 재치권상의 수위권과 그들이 유일하게 유효하고 또 전통에 따른 것으로 여기던 서방 관습들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를 진본으로 여기고 위조로 인식못하고 있었다.
야심적이고 거만하고 타산적인 총대주교는 모든 교섭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결국에는 사절들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거절하였다. 그래서 훔베르트는 그에게 자신의 격렬한 논쟁문 - 결투장 - 을 내던지고, 파문 교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1054년 7월 16일 미사에 참여할 준비를 갖춘 성직자와 회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항의하며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중앙 제대 위에 놓고, “하느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지어다” 라고 외쳤다.
훔베르트에 의하여 작성된 파문 교서는, “서방의 교회가 얼마나 새롭고 고유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는가, 그리고 개혁가들이 얼마나 그리스 교회의 정신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사건 전체는 대부분이 비극적인 오해와 인간적인 거절과 규율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음이 확인될 때, 그만큼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과연 훔베르트 추기경이 그렇게까지 지나친 행위를 할 전권을 위임받았던 것인지 아닌지는 오늘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레오 교황은 이미 1054년 4월 19일에 사망하였고, 그의 후계자 빅토리오 2세(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으므로 교황좌는 공석중이었다. 따라서 체룰라리오스측에서는 교황도 아니고 로마 교회도 아니고, 다만 사절들만을 파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절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자주 되풀이되어 일치의 시 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교는 오늘까지 존속되고 있다.(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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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사순 제5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2024.03.20 06:51
요한복음에서는
계명을 어기는 것 자체를
죄라고 보기보다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데
그것 가운데 하나는
빛으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는
육화를 이야기하면서
빛이 이 세상에 왔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다보니
빛을 거부하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죄의 종이란
어둠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어둠 속은 보이지 않기에
자유롭지 않고
자신이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행동을
숨기고 싶은 사람은
더 깊은 어둠을 찾아 들어갑니다.
요한복음에서 어둠은
인간이 선택하는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으로 오시기에
우리에게 어둠을 주시려하거나
어둠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빛을 주시려 합니다.
하지만 어둠을 선택한 인간은 대부분
하느님께서 나를 어둠으로 몰아내셨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추고 숨기고 싶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이 저지른 실수가
만천하게 공개된다면
그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주려고 하십니다.
자유를 주려고 하십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그리고 약함에서 빚어진 실수를
다 인정하신다는 말씀
그래서 탓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인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약함에 갇히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자유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고 억압하기보다
하느님의 사랑에 나를 맡기면서
자유로운 진리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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