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시여 저는 무죄입니다.저는 단지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저는 무죄,무죄,무죄....."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간경화증의 진단을 받고,죽음의 벼랑끝에서 시한부인생의 처절함을 비참과 실의속에서 기다리던 사람이었다.그의 이름은 신동훈씨!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남은 아내와 세아이의 힘없는 눈망울을 위해서라도 오직 살아야만 하겠다는 신동훈씨 였지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간경화증의 병마앞에서는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에 올라간 사형수의 초췌한 모습 그대로였다.그러나 신동훈씨는 그의 손으로 현대의 불치병인 간경화증을 고쳤다.뿐만 아니라, 이 충격적인 치유는 간장질환으로 고생하는 모든 분들에게 한줄기의 빛을 비춰준 것이다.의사들도 손을 들었던 간경화증,숨막히는 악몽과 암흑의 현실. 이와같은 막다른 상황속에서 그는 손으로 간경화증을 고쳤던 것이다.이 모든 결과는 바로 그의 철저한 식이요법의 결과였으며 그의 강인한 의지의 소산이었던 것이다.신동훈씨 지난 70년 4월 29일 충남 옥천경찰서에서 순경으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던 그에게 병마와 검은 손길이 덮쳐오기 시작한 것은 74년 5월경이었다.그 후부터 그에게는 병색이 완연히 나타나, 눈자위 주위에는 푸른기가 감돌았으며 얼굴색 마져 검으스레하게 변해갔다.간경화 증세는 여러가지 형태의 질환에서 나타나기도 한다.가벼운 황달로 시작해서 배에 물이 고이는 복수증세와 배꼽을 중심으로 상복부 및 전흉부 피부에 정맥이 굵게 솟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미 간경화증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세다.그래서 그는 절대안정이 가장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유로 6개월간의 휴직계를 내고 서울로 상경, S병원,K대학병권등에서 종합진찰을 받았으나 결과는 그대로였다.주변에서 간경화증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초췌한 그의 모습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그후 다시 광주로 내려와 내과의 권위자로 정평이 나있는 J원장을 찾아가서 정밀진찰을 받은 결과 간경화증세는 아직 오지않고 만성간장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74년 8월 20일. 아내의 간호와 함께 입원생활에 들어간 신동훈씨는 3개월만인 11월 2일 드디어 병원문을 나서게 되었으며, 건강의 호전으로 이듬해인 1975년 1월 14일 복직하여 수사과 유치장근무를 시작했다.그러나 불행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복직한지 3개월이 지난 어느날 아침에 출근하려고 눈에 떴는데 몸이 뻐근하고 어지러웠다.간신히 일어나 소변을 보자 샛노란 물감같은 색깔이었으며,손바닥도 부어올라 있었다.그는 눈앞이 캄캄했다.다시 병마가 그를 덮쳐버린 것이다.소변 색깔이 차츰 벽돌색으로 붉게 변하더니 배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신동훈씨는 4월 20일 휴직계를 제출하고 아내의 어려운 입원비 마련으로 다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그러나 간경화증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마침내 그는 병원치료를 포기, 마지막 지푸라기를 붙잡은 심정으로 신앙에 기대게 되었다.또한 신앙생활과 함께 평소 복용하던 약과 식이요법으로 굼뱅이 말린 것 쇠고기 간을 먹으며 신앙생활을 한 결과, 두달쯤 지나서 배에 찼던 물이 빠지게 되었으며,다시 복직하였다.그러던 어느날 그는 선지같은 핏덩어리를 쏟으며 다시 쓰러지게 되었다.간경화증환자가 죽음직전에 맞게 되는 과정이었다.그후 그는 병원에서는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됐으며 마침내 병원치료를 포기한채,식이요법의 투병생활로 들어갔다.이런 가운데 그는 고 박정희대통령의 영애 박근혜양으로 부터 금일봉을 받는 등 각계 각층에서의 격려편지와 성금으로 삶의 강한 의지를 느꼈으며, 철저한 식이요법으로 드디어는 피눈물나는 투병생활을 마치게 된다.
첫댓글 네~ 그렇군요 정말 소중한 자료입니다.이 글을 소중히 간직 하겠습니다.
지혜삭이트는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