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慶南 咸安面 地名由來 紹介 (경남 함안면 지명유래 소개)
함안면(咸安面)의 전신(前身)은 상리(上里) 전부와 하리(下里)의 일부였다. 상리는 지금의 봉성(鳳城), 강명(康命), 파수리(巴水里) 등지이며 후에 상리면(上里面)이 된다. 당초의 하리는 북촌(北村), 괴산(槐山), 검암(檢岩), 광정(廣井), 말산(末山) 및 도항리(道項里)였으나, 뒤에 동지산(冬只山)과 성산(城山)을 가로질러 산내면(山內面)과 산외면(山外面)으로 분리되면서 여항산 내측인 북촌 대산 괴산리가 산내면이 되고, 그 외측인 검암, 말산, 광정, 도항리 일부를 산외면이라 하였다. 1914년 3월 1일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에 따라 상리면과 산내면이 병합(倂合)하여 읍내면(邑內面)으로 개칭(改稱)되고 1918년 다시 함안면(咸安面)으로 고쳐져 오늘에 이른다.
읍내면이라 함은 향교(鄕校)가 위치해 있던 곳을 읍(邑)이라 일컬었다고 하는데, 향교가 소재하는 봉성리 덕암동(德岩洞)이 옛날에는 상리면의 향교동(鄕校洞) 혹은 교동(校洞)으로 불렀다. 또한 함안읍성(咸安邑城)이 면(面) 중심부(中心部)에 위치해 있고 지리적으로는 함안의 진산인 여항산 내측에 속하므로 읍내면(邑內面)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읍성안(邑城內) 즉 봉성, 북촌을 위치한 중심가를 읍내라고 지칭하고 있다. 함안이란 면명(面名)은 군청 소재지 면으로 군명(郡名)을 따서 지은 것이다.
군소재지(郡所在地)의 변경사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함주지(咸州誌)는 가야읍 가야리에 고국유지(古國遺址)가 있고, 광정리의 성산산성(城山山城)을 가야국구허(假倻國舊墟)라고 하였다. 신라에 망한 후의 군청소재지는 알려진바 없고, 고려 제6대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 할 때에 함안을 함주(咸州)라 하고 자사(刺史)를 파견하게 된다.
함주시절(咸州時節) 함주도호부청(咸州都護府廳)이 북촌리 백암동의 당산(堂山)아래에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조 14년(1586년)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군수로 부임하여 풍수지리설에 따라 백암동의 동헌을 불 지르고 봉성동으로 동헌을 옮겼다는 낭설(浪說)이 전해오고 있는데 어찌되었던 고려 때부터 함안면이 군의 소재지가 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1950년 한국동란으로 군 청사가 소실되어 1954년 11월 12일 대통령령(令) 제953호로 군청 소재지를 가야면으로 옮겼다. 군청소재지였던 함성중학교에 동헌의 흔적인 주춧돌이 아직 남아 있다.
상리면이나 산내면 시절의 면소재지는 알려진 바가 없고, 읍내면 때부터 소재지였던 봉성리 1195-2 번지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던 면청사(面廳舍)도 한국동란에 전소되어 1955년 목조 시멘트 기와로 149.24㎡(45평)의 새청사를 신축하게 된다. 1986년 5월 20일 북촌리 943번지에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로 현대식 청사 537.87㎡를 신축 이전하였으며 옛 청사터에는 보건지소가 들어섰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令) 제11027호의 행정구역 변경으로 신개동(新開洞)이 신개(新開)와 득성(得城)으로 분동(分洞) 되었고, 1988년 8월 1일 군 조례 제1005호에 의거 봉성동을 봉성리로 북촌동을 북촌리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11월에 6개리 22개동에 가구(家口) 1,280호, 인구(人口) 4,435명(남 2,193명, 여 2,242명), 2016년 9월 현재 가구(家口) 1,331호, 인구(人口) 2,561명(남 1,259명, 여 1,302명), 총면적 28,92㎢이다.
(1)봉성(鳳城)함안면 봉성리
봉성(鳳城)은 함안면의 중심지인데 조선선조 14년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군수로 부임하여 동헌터(東軒址)를 둘러보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나무도 심고 연못도 만들고 지명(地名)도 바꾸었다고 한다.
봉성(鳳城)이란 봉황의 집이란 뜻이고 동헌(東軒) 터였던 함성중학교는 봉황의 알자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봉황의 집 주의에는 숲이 무성해야만 봉황이 잘 깃들고 보호된다하여 읍성(邑城) 남쪽의 신교(新校) 하천변에는 포고나무⋅느티나무 등을 심었고, 밤밭곡(李峴) 좌우에는 밤나무를 북동쪽인 대산리(大山里) 일대에는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가꾸어 봉림(鳳林)이라 불렀다.
지명으로는 향교산(鄕校山)을 필봉산(筆峰山) 봉양대(鳳養臺)라 하였고 특히 동헌뒷산(함성중 뒷산)은 봉이 비상(飛翔)하는 형상이라 하여 비봉산(飛鳳山)이라 하였는데 봉황이 동헌 자리에 깃들다(알을품다)가 날아올라 무진정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대동수에서 오동열매를 먹고 대밭곡(竹嶺谷)에서 쉬다가 다시 봉성으로 돌아와 깃든다는 것이다.
(2)중촌(中村)
함안면 봉성리 중촌
봉성리는 봉성, 중촌, 신교, 덕암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이곳에 4대문을 가진 성이 있었는데 비봉산의 봉(鳳)자와 성(城) 성자를 합해 봉성(鳳城)이라고 불렀으며 중촌은 봉성리의 가장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부른 지명이다.
(3)생원골(生員谷)
함안면 봉성리 덕암동
생원(生員)이란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이나 선비를 높여 부르던 이름이다. 선비들이 향교(鄕校)에서 학문을 닦아 입신(立身)하는 예가 많았으므로 향교가 있었던 봉성리 덕암(德岩) 마을을 옛날에는 향교동(鄕校洞), 향골(鄕谷) 또는 생원골(生員谷)이라 불렀다.
함안향교 앞에는 영귀정(永歸亭) 노압(盧押) 선생이 심었다는 선비 기상의 은행나무가 5백 수십년 동안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덕암서원유허비(德岩書院遺墟碑)와 후세교육에 힘써 성균관 진사 10여명을 배출한 정구청덕비(鄭逑淸德碑)가 있다.
또한 봉성리 신교마을 앞 국도79호선(옛 지방도 1035호선) 옆에는 당시 향교의 권위를 상징했던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가로 30cm 높이 50cm의 작은 이 돌비(石碑)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원님마저 말에서 내려 향교에 출입했다고 전한다.
(4)악어담(鰐魚潭)과 삼수정(三樹亭)
함안향교 입구 우측의 산기슭 아래가 덕암서원의 터(德岩書院址)였고 그 옆에 악어담(鰐魚潭)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이 악어담에는 거대한 악어가 살고 있어 사람을 해치는 등 갖은 피해가 많아 고심하던 중 임진왜란 때 힘이 장사이면서 개(犬)를 데리고 다니던 박개별이란 장군이 악어담을 막아버렸다고 전한다.
악어담 남쪽이며 지금의 중촌동에 있는 함읍교(咸邑橋) 서쪽 산 밑쯤에 삼수정(三樹亭) 이 있었다고 전하며 함주지(咸州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三樹亭在客舍大門外十步許三樹亭立故名一樹最高古大可三十圍隱覆官道可庇千人在古累石爲臺歲久頹毁萬曆丁亥(1587) 夏改築高五尺餘周回一百四十九尺迎風夾塏爲一城第一亭?....이하생략」
(5)밤밭고개(栗峴)
함안면 봉성리 봉성
함안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약 400m 떨어진 파수리(巴水里)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을 밤밭곡(栗峴)이라 한다. 이 고갯길은 역로(驛路)로서 파수(巴水)⋅춘곡(春谷) 군북의 월촌(月村)⋅어속현(於束峴)을 경유하여 의령과 진주로 통하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대로(大路)였다.
선조 14년(1586) 봉(鳳)을 보호하기 위하여 읍성(邑城) 주변에 나무를 심게 하였는바, 이 곳 고개 양쪽 산에도 밤나무를 많이 심어 울림(栗林)이 무성했던 관계로 이곳을 밤밭골(栗谷)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고사되고 없다.
(6)심제소학교지(尋帝小學校址)
함안면 북촌리 동촌동
지금의 함안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한 동촌동에 있었던 일제시대 때 일인(日人)들의 귀족학교로서 일본인의 자녀들만 다니는 학교였다. 1932년경에 설립(設立)되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학교는 폐교되었으며 1950년 6⋅25 동란 때는 건물마저 소실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7)옥골(獄谷)과 말무덤(馬墓)
함안면 봉성리
옥골(獄谷)이란 조선시대 죄인을 가두는 감옥소(지금의 교도소)가 있던 곳을 말하며, 말무덤(馬墓) 역시 당시 늙고 병들어 죽은 말을 묻었던 곳을 일컫는다.
함주지에 형옥(刑獄)은 "동문 밖에 있다"라고 하였다. 읍성(邑城)의 동문지(東門址)는 현재 함안면사무소 창고우측 폐 우물 있는 곳이며, 옥골은 면사무소 정문에서 약 50m 정동으로 가는 길옆에 조그만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남쪽 방향으로 30m 정도의 논에 위치해 있었고, 말 무덤은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2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그곳에는 돌무지가 있다.
(8)에밑, 붕밖
함안면 북촌리, 괴산리
함안읍성(咸安邑城)의 북문(北門) 자리는 국도79호선(옛 지방도 1035호선) 상에서 북촌리와 괴산리가 만나는 지점이다.
양리(兩里) 서북쪽은 읍성(邑城)을 경계하여 갈라지는데 북문안(北門內) 성아래(城下)의 동서촌(東西村) 마을을 에밑, 또는 애밑지라 했고, 북문밖(北門外) 성아래의 신개마을을 붕밖이라 불렀다. 에밑, 즉 북성내(北城內)의 회화나무 아래에는 읍성 축조 당시 파놓은 커다란 웅덩이가 있으며, 이 웅덩이는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9)성곡(城峴), 병막골(개양골)
함안면 북촌리 및 괴산리 득성동
북촌리 서촌마을에서 괴산리 득성(得城)마을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성곡(城峴)이라 했으며, 옛날 이 서성(西城) 아래에는 거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또한 서성밖(西城外 : 城峴外)에는 불치병이나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마을과 격리시켜 환자들만 살게 했던 곳이 병막골로 후에 개양골로 불리워오다가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때 득성(得城)으로 바꾸었다.
당초에는 덕성(德城)으로 동명(洞名)을 고치기로 했으나 덕(德)이 득(得)으로 상부에 보고되어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덕성이 득성으로 동명이 바뀌어 버린 웃지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 당시 가야읍 도항리의 돈산(豚山)도 돈산(敦山)으로 되어야 할 것이 득성(得城)과 같은 예로 "돼지산의 마을"이란 뜻의 돈사동(豚山洞)으로 잘못 되어 버렸으니 언젠가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10)똥뫼
함안면 북촌리 정동
정동(鼎洞)마을 앞에 있는 야산(野山)을 똥뫼, 장고산(長鼓山) 또는 장군산(將軍山)이라고도 부른다. 똥뫼란 글자 그대로 사람이나 동물의 분비물인 똥의 산이란 뜻이고, 장고산은 가운데 부분이 잘록하고 양쪽은 솟아 있어 흡사 장구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또 이 산의 남쪽 이웃 마을인 백암(白岩)마을에서 강지(康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활(弓)모양으로 굽어 활곡(弓峴)이라고 하는 데 살을 매겨 거궁(据弓) 했을 때 화살촉에 해당되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장군산(將軍山)이라 부르게 된 것은 옛날 어느 장사가 고성에서 무진정으로 산을 지고 가는 도중에 빨래하던 여인이 산이 기어간다며 놀리는 바람에 화가 난 장군이 지고 가던 산을 이곳에다 내려놓고 가버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장군이 지고 가다가 내버려둔 산이라 하여 장군산이라 불려진다.
(11)흰바구(白岩)
함안면 북촌리 백암동
흰바위(白岩)는 함안면사무소에서 동으로 2km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 뒷산에 기묘하게 생긴 흰바위(白岩)가 있었다 한다. 그 바위가 이따금씩 색깔이 변하면서 이상한 빛을 발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아무런 병(病)없이 죽는다든지, 미친 사람이 생겨나는 등 재앙이 겹쳐지자 동민이 모여 의논 끝에 재앙의 원인은 마을 뒷산에 있는 흰바위 때문이란 결론을 내리고 그 바위를 보이지 않게 묻어 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마을에 흉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하며, 이러한 연유로 마을을 흰바구(白岩)라 이름지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이 마을 앞에 당산(堂山)이 있고, 이 당산 모퉁이를 당산모리라 한다. 당시 이러한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좋은 일이나 굳은 일이 있을 때마다 지성을 드리며 안가태평과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한다. 그러나 20여 년전부터 당산제(堂山祭)드리는 것을 폐지하였다.
(12)새터(新開)
함안면 괴산리 신개동
새터(新開)는 읍성(邑城) 북문밖(北門外)으로 붕밖이라고 불렀다. 1586년 정구(鄭逑) 군수가 부임하여 괴산리 무진정에서 함안 조씨 시족장과 인사한 후 무진정 남쪽으로 약 500m 지점에 미개척지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도록 한 것이 새터(新開)다.
이곳 신개동의 앞산은 범산(虎山)이라 하고 이랫 마을인 괴항동의 뒷산 계곡을 개골(犬谷)이라 부른다. 범산과 개골 사이에 연못(무진정)이 있어 신개의 범이 괴항의 개를 잡아먹지 못하였으므로 괴항의 개골은 살아있는 개(犬)가 되는 셈이다. 또한 개골(犬谷)에 대한 다른 이야기로는 예부터 이 골짜기에 괴물이 많이 나타났다고 하여 개골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13)한절골(大寺谷)
함안면 대산리 대사동
한절골(大寺谷)은 가야읍과 함안면의 경계 지점인 무진정 동쪽 함안천(咸安川)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대사동(大寺洞)을 말한다.
마을 일대가 대산리사지(大山里寺址)였다고 구전(口傳)되고 있으며, 이곳에는 보물 71호인 함안대산리석불(咸安大山里石佛)이 있다. 이 석불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화강암제(花崗巖製)의 좌불(坐佛) 1구와 좌우보살 각 1구가 있다.
한절골(大寺谷)이란 대가람(大伽藍)이 있었던 골짜기란 뜻일 뿐 당시의 사찰명(寺刹名)과는 무관한 것 같다.
그것은 함주지 불우조(佛宇條)에 「北寺在冬只山南有彌勒西有六層塔」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지산 남쪽이면 대산리(大山里)가 틀림없고, 대산리 내에는 이곳을 제외하고 사찰은 물론 암자 한 채 있었던 흔적이나 기록이 없으므로, 이곳의 사찰명은 북사(北寺)임이 분명하다. 이로 미루어 대산리사지(大山里寺址)나, 대산리석불(大山里石佛)을 북사지(北寺址)또는 북사지석불(北寺址石佛)로 고쳐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읍내(邑內)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큰 사찰만이 꽉 들어차 있고 민가는 띄엄띄엄 한두 집씩 한적하게 산재해 있어 한적한 골짜기란 뜻으로 한절골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어떠한 연유로 언제 이곳 가람이 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승려가 떠날 때 절내(寺內)의 소중한 물건들을 우물속에 묻어버렸다고 전한다. 이 우물은 동서는 짧고 남북이 긴 방형(方形)으로 돌로 축조된 것으로 현재 석불 뒤의 조윤섭씨 밭에 위치하고 있다.
(14)대밭고개(竹嶺)
함안면 대산리 도림동
함안면 대산리 도림동(道林洞)에서 산인면 입곡리 중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대밭고개(竹嶺)다. 대밭곡은 도림동에서 북동쪽 약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성동에 동헌(東軒)을 새로 지으면서 봉(鳳)이 비봉산(飛鳳山)에서 날아 무진정(無盡亭) 연못에서 목욕하고 대밭(竹田)에서 죽순을 먹고 오동나무 숲에 깃들게 한다는 뜻으로 이곳 주변에 대나무와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고갯마루에 대나무 일부만 있을 뿐이다.
6⋅25당시 일화로 UN군 작전도에는 이 고갯길이 기재되어 있었으나 북괴군 작전도에는 없어 아군이 이 고갯길로 철수하여 적의 기습 없이 무사히 철수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15)들기미
함안면 대산리 동지산
들기미는 해발 160m정도의 동지산(冬只山) 분지(盆地)에 자리잡은 산동네(山村)로 동쪽은 산인면 입곡저수지와 접하고 서쪽은 가야읍 상검동과 경계짓고 있으며, 남쪽은 함안면 대사동과 금천동이고, 마을 옆 북쪽에 동지산성(冬只山城)이 있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부터 낙향(落鄕)한 인사(人士)나 고인(高人)들의 은둔처이기도 했다.
들기미란 옛사람들이 몰래 훔쳐간다 하여, 다시 말해 들치기 잘한다는 의미에서 불렀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동네가 높이 들어 얹혀 있기 때문에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전해오는 이야기로서 조선말(朝鮮末) "유한"(柳漢)(또는 가야읍 관동출신 유육환?)이 '들기미'를 근거지로 의적활동(義賊活動)을 하였다고 한다. "유한"은 부하들을 모아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하여 부자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명성이 높았다. 그러던 중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인(日本人)들만 대상으로 재물을 빼앗으니 그 피해가 많아 관가에서 유한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유한은 날쌔고 변장술에 능하여 검거가 어려웠고, 붙잡아 가두어도 어느새 사라져버렸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 후 음식을 잘못 먹어 호열자(虎列刺)에 걸려 죽었다고 전한다.
(16)벌말(筏村)
함안면 강명리 강외동
벌말(筏村)은 국도79호선(옛 지방도 1035호선)에서 봉성저수지로 진입하는 도로 좌우에 있는 강외동(康外洞)의 자연마을을 말한다. 함안의 지형이 남고북저(南高北低)하여 물이 역류하므로 이곳이 마땅히 벌(平野)이 되어야 이치에 부합되기 때문에 벌말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봉성저수지 아래에 위치하므로 만약 저수지가 붕괴될 경우 벌로 변해 버릴 것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7)샛담
함안면 강명리 강외동
강명리에 위치한 샛담은 여항면과 경계지점에 있는 강외동의 자연마을을 말하며 새로 생긴 새동네란 뜻으로 붙여졌다.
(18)미리기
함안면 강명리 강외동
미리기는 여항명과 경계지점인 샛담마을 입구에 있었던 미륵사 아래를 말하는데 오래전부터 길가에 미륵불(彌勒佛)이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19)영대암지(靈臺庵址)
함안면 강명리 강외동
영대암지(靈臺庵址)는 함안면과 여항면의 경계지점인 함안면 강명리 강외동 앞 함안천 서쪽 산록에 위치하며 여항면 사무소에서 북쪽으로 200m정도의 거리이다. 영대암지라고만 전할뿐 뚜렷한 흔적이나 유래는 알 수 없고 다만 이곳에 미륵사란 사찰이 있으며 도로 우측에 223cm의 입불미륵(入佛彌勒)이 있는데 백회로 발라져 조각 수법은 알 수 없다. 대웅전도 낡아 퇴락된 것을 허물고 시멘트콘크리트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근래에 신축하였으나 지금은 국도 79호선이 개설되면서 이마저도 사라지고 없다.
(20)행수바위(行水岩)
함안면 강명리 강외동
행수바위(行水岩)는 강명리 강외동의 벌말(筏村) 앞 동쪽 함안천 건너편에 있다. 이곳에는 다른 곳보다 유달리 바위가 많으며 항상 바위는 하천수(河川水)에 잠겨 있으나 이 가운데 유독 배(舟)모양으로 생긴 큰 바위 하나가 물위에 떠 있어 행수암(行水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21)강지골(康址谷)
함안면 강명리 강지동
마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광려산(匡勵山) 서북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 강지골(康址谷)이며 정골, 양지담, 아래각단, 영담 등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돼 있다.
마을 위쪽에 홀로 떨어진 산을 똥뫼라 한다. 똥뫼란 똥무더기처럼 생긴 산이란 뜻이다. 강지골 북쪽 영담소류지가 있는 골짜기에 돌산(石山)이 있어 1970년까지만 해도 함안의 상석(床石), 비석(碑石)등 석물(石物)을 비롯한 석공예(石工藝)가 이곳에서 다 이루어지다시피 해 삶이 풍족한 편이었으나 자연보호를 이유로 채석이 중단되면서 석공예가(石工藝家)들이 객지로 떠나는 등 전업하는 바람에 사양길을 걷다가 요즈음은 석공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22)굴바대
함안면 강명리 장명동
굴바대는 봉성저수지 아래이며 벌말(筏末) 서쪽 하천변에 자리한 장명동(長命洞)의 자연마을 중 하나이다. 이곳은 안개나 구름에 덮여 그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워 예부터 운평(雲坪)이라고 불러져 왔다.
1942년 봉성저수지가 완공된 후부터 저수지가 붕괴되면 깊은 소가 생겨나는 바다로 변하게 될 것을 예상하여 굴바다→굴바대로 불러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23)너드리
함안면 강명리 장명동
너드리는 장명동(長命洞)의 자연마을 중 하나로 함안면소재지에서 남으로 1.8km정도 떨어진 국도변의 들밑들 바로 위에 위치한다. 옛날에는 현재의 강외동을 윗너드리, 장명아래 마을을 아랫너드리라 했다. '너드리'라는 말은 네거리(四街里)라는 뜻으로, 옛날 이곳은 사통오달(四通五達)하여 동서남북 어느 곳으로도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랫 너드리에 술을 파는 기생이 있었는데 그 기생이 하도 영악하여 행상인(行商人)들을 유혹하여 가진 돈을 다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렸다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곳 기생집에 들리게 됨에 넌더리를 치게 되었고, 또한 이 집에 들게 되면 신세 망치는 까닭에 넌지시라도 들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너드리란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전한다.
(24)중산골(中山谷)
함안면 강명리 장명동
중산골(中山谷)은 강명리 장명동의 자연마을중 하나이며 아랫 너드리 서쪽 여항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산과 산 사이에 위치하여 예부터 구름만 끼어도 비가 내린다고 할 정도의 산중협곡이다.
유래는 산 가운데 생긴 동네라는 뜻으로 중산골(中山谷)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다른 한편은 이곳에 중산사(中山寺)가 있어 중이 사는 골짜기란 뜻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 위에는 중산사지(中山寺址)가 유존(遺存)하고 있으나 그 유래(由來)는 미상(未詳)이며 다만 사지(寺址)에 석축(石築)일부와 탑의 기단석(基壇石) 일부가 남아 있고 주변에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다.
(25)들밑들
함안면 봉성리, 강명리
들밑들은 봉성리 신교동의 소하천(小河川) 건너부터 남쪽(진동 방향) 너드리(중산골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있는 자연마을로 장명이라함)까지 들녘을 말하는데 진동에서 함안으로 들어오는 들(평야)의 머리밑에 있는 들이란 의미에서 "들밑들"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2014년 9월 국립시설원예시험장이 들 하단부에 7만5천평의 부지에 자리 잡아 이전해 왔다.
들밑들 중앙에는 암수의 느티나무가 500m의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는데 서쪽 산 아래에 위치한 군목 2호인 암나무는 1978년에 불에 타버렸고, 동쪽의 숫나무는 군목 1호로 보호되고 있으며 전국 일련번호 2174호이다.
이 숫나무는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를 지내신 청금정 조윤규(趙潤奎)선생이 낙향하여 심은 것으로 전한다. 지금도 선생의 호(號)를 딴 청금정(廳琴亭)이란 조그만 돌비가 나무 아래 서있다. 이 노거수(老巨樹)의 수령은 530여년이며 높이 25m, 둘레5.4m, 면적 40㎡인데 영험이 있다하여 자식이 없는 사람은 정월 대보름날 자식 점지를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26)갓바위(冠岩)
함안면 봉성리, 강명리
들밑들 동쪽 함안천(咸安川)에 봉성 제1, 제2 보(洑)가 상하로 나란히 있고, 보(洑) 아래 산기슭의 바위가 하천쪽으로 약간 튀어나와 물이 굽이쳐 흘러 그 밑에 얕은 소(沼)가 생겨져 여름이면 이 물 웅덩이가 주민들의 좋은 목욕터가 된다.
이 바위에서 강지마을(康址洞) 앞 고지골까지의 산이 갓(冠)처럼 생겼고 이 바위마저도 조금 솟아 나왔기 때문에 갓바구(위)로 불러지게 된 것이라 한다.
(27)서원마을(書院村)
함안면 파수리 원촌동
서원마을은 함안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파수천(巴水川)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이곳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이 있었던 관계로 서원촌(書院村)이라 하였으며, 또한 이곳에는 글방인 재실이 있어 서재골(書院谷)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원촌(院村)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원촌(院村)은 조선시대(朝鮮時代) 함안 제일의 역원(驛院)이 있었던 곳으로 진주 등 서부 경남으로 통하는 시발점이었다. 마을 뒷산을 방구산(方龜山)이라 하는데 이는 산의 형태가 거북처럼 모나게 생겼기 때문이며, 방구산과 마주보는 산의 가운데는 반드시 명당(名堂)이 있다고 필유명산(必有名山)이라고 전한다.
(28)고심이(高深)
함안면 파수리 원촌동
원촌동의 자연마을 중 하나이며 의상대 앞산 밑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로 가야읍 혈곡리와 경계하고 있다. 파수리(巴水里)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부터 물과 깊은 연관을 맺어오고 있다. 고심이는 파수리에 물이 차게 되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고심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원촌마을 좌측 골짜기를 「큰지골」이라 하며, 뒷산에 있었다는 「봉산정」에는 옛날 원촌의 원호들이 주로 살았고 또한 아전들이 여기에서 글을 많이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29)갈매기들, 쫍지골
함안면 파수리 상파
파수리 교회 아래의 들판을 갈매기들이라고 부른다. 이 들에는 예부터 갈매기풀이 많이 자생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쫍지골은 상파(上巴) 본동 위에 있는 들로서 골짜기가 좁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갈매기들을 중심한 아래(하파)⋅위(미산)가 한때는 뽕나무 밭으로 유명했으나 전부 고사하였고 지금은 감나무 단지로서 조선초기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함안 파수곶감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다.
(30)뱀산, 날가지, 못산(池山)
함안면 파수리 상파
상파(上巴) 본동(本洞) 동쪽 도로변에 있는 산을 뱀산(蛇山), 뱀산 기슭의 자연마을을 날가지, 뱀산 동쪽 아래 산으로 둘러싸인 곳을 못산(池山)이라 부른다. 뱀산은 야트막한 야산(野山)이기는 하나 뱀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며, 날가지는 뱀산과 그 주변이 흡사 용이 비상하려는 모습과 같아 "용이 난다" 즉 용이 날으려는 옆이라 하여 날가지라 이름 지어진 것이라 하며, 못산은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예부터 못(池)이 하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31)오리모곡
함안면 파수리 상파
오리모곡은 파수리와 봉성리의 경계지점으로 상파에서 덕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파수리가 홍수로 물이 들게 되면 이 고개로 올라가서 배를 탄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지금도 옛 길의 흔적이 또렷하다.
(32)밤가지골(栗谷)
함안면 파수리 미산
밤가지골(栗谷)은 미산동(眉山洞) 아래 서쪽 골짜기로써 예부터 밤나무가 울창하여 불러진 지명이나 지금은 밤나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나무가 들어차 있다.
(33)배닿치 고개
함안면 파수리 하파
배닿치고개는 함안면 파수리에서 가야읍 신음리 뭇둑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배닿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옛날 천지개벽 당시 이 고개를 통하여 배가 넘나들었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586년 한강(寒岡) 정구선생이 군수로 부임하여 이곳을 둘러보고 파수리가 배(舟)처럼 생긴데다가 만일 물이 차게 되면 이 고개가 배를 대는 선착장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서 배닿치고개라고 지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조선조(朝鮮祖)때 성지도사(聖智道士)란 분이 이 고개에서 군북면 명관리 평광(平廣)이 복지(服地)임을 알고 그곳을 바라보고 세 번 절을 했다하여 배다치(拜多峙)고개라 했다고도 한다.
|
첫댓글 이승철 ~ 일 2021-01-03 오후 5:55 ~ 함안 옛 고향 생각이 남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