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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계몽주의는 18세기 하반기에 프랑스를 기점으로 유럽 전역에 유행했던 문화적, 철학적, 문학적, 지적 사조다.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진보적 엘리트라고 생각했고, 종교적 정치적 박해에 맞서 투쟁했다. 계몽주의자들의 저작은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의 정치적 대격변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전근대적인 어둠에 이성의 빛을 비추었다. 이성을 척도로 하여 비판했다. 종교, 사회, 국가 등 모든 것을 비판하였다. 이성에 의거하여 생각해 낸 것이 모든 인간 행위나 사회 형태의 기준으로 삼았다.
정치에서는 계약론(契約論)을 주장했다. 인간은 침범받지 않을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유이며, 평등이다. 생존과 재산 소유의 권리가 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은 계약에 의해 국가를 만들었다. 이 견지에서 계몽사상가들은 왕권이나 낡은 제도나 압제나 불평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과 공격을 했다. 계몽사상은 근대적인 여러 혁명에 이론적 지주(支柱)를 제공했다. 전근대적 착취를 비난하면서 흥륭(興隆)하는 자본주의적 사유(私有)를 옹호했다.
종교에 있어서는 이성의 입장에서 신앙의 자유, 종교적 관용(寬容), 교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했다.
도덕은 순수한 이성에 따르는 것을 선(善)이라고 보았다. 행복론은 인간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목표이다.
인식론에서는 감각적 소여(所與)를 오성(悟性) 내지 자아가 종합하는 데에서 진리가 성립한다는 감성(感性), 오성론,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내지 감각론, 나아가서 유물론 등이 나타났다.
계몽사상이 급속도로 발전한 배경에는 자본주의 내지 부르주아 시민의식과 과학 내지 기술의 진보가 있다. 따라서 계몽 운동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에서 시작되어(로크, 흄, 스미스 등), 프랑스에 가서(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백과전서파 등), 독일로 파급되어 갔다(라이프니츠, 볼프, 칸트 등).
영국이나 프랑스에서의 계몽운동은 하층(下層)으로부터 시작하여 상층으로 상승(上昇)함으로 근대혁명의 이론적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근대화에서 뒤떨어진 독일에서는 이와 같은 하층에서의 상승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계몽사상은 머리 속에서만의 자유나 평등이나 인권 존중에 그쳐야 했다. 독일의 계몽사상을 계몽된 전제군주(專制君主)에 의한 '위에서부터의 개혁'에 독일의 근대화를 기대했던 것이다.
*영국
넓은 의미로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17세기 초의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18세기 말의 애덤 스미스, 벤담에 이르는 경험론의 철학과 거의 같다. 좁은 뜻으로는 존 로크에서 스미스까지의 18세기 철학을 총칭한다.
흄은 회의론(懷疑論)에 빠졌는데 이것은 오히려 예외적이며, 대세(大勢)는 도덕감을 강조하든 이기심(利己心)을 강조하든간에 밝은 낙관론(樂觀論)과 인간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계몽사상과 같은 사회 비판은 없고, 온건하고 현상(現狀) 긍정적이며, 이 점에 영국 계몽사의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을 그냥 '철학'이라고 부른다. 18세기 10년대, 가톨릭 신앙의 권위주의, 금욕이나 복종의 윤리에 반대하는 저항이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 아래 문학가 사이에 일어났다. 1715년 이후가 되자 이성적(理性的) 비판으로 발전해 나갔다.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디드로는 앙시앵 레짐(舊制度) 사회에 고착(固着)하는 종교적 편견, 사회적 기성관념에 비판했다. 특히 볼테르는 이신론(理神論), 종교적 관용(寬容)을 가지고 교회를 공격했다. 몽테스키외는 신랄한 사회, 문명 비판을 전개했다. 이 기간에 데카르트의 이성(理性)주의가 확산하였다. 영국에서 뉴턴 물리학의 경험주의, 로크의 감각론(感覺論) 등이 수입되어서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748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발표되는 해는 프랑스 사회의 경제 번영, 경제 자유주의의 성장을 배경으로 계몽주의의 개시기라 불린다. 앙시앵 레짐 사회에 대한 자연법(自然法)이나 사상적, 정치적 입장에서의 비판은 차츰 체계화되었다. 1752년에는 <백과전서(百科全書)>으로 결실을 보았다. 정치 비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과 같이 전체 사회질서에서 국가의 기본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1770년경이면 계몽주의는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철학은 전국의 개명적(開明的) 부르주아를 사로잡아 '생각하는 대중'을 조성(造成)하는 것으로써 실천적인 변혁의 사상이 되었다. 혁명의회에서 전개되는 모든 정치사상은 이미 계몽주의에 원형(原型)으로서 내포된 것이며, 그것이 전쟁이나 경제 위기, 정치적 역관계(力關係)를 계기로 전개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계몽주의의 인식론, 과학론, 역사론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계승되었고, 한편 보편적 이성(理性)에의 신뢰는 루아이에 코랄, 주프로와(1796-1842) 등에 계승되었다.
독일
17세기 말부터 독일의 철학은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이성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철학에 나타났다. 이것은 시민계급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 활동의 고조(高潮)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일 철학은 1690년경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이 간행된 1781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 시대의 주요한 철학자들로서는 라이프니츠, 사상가로 레시 등이 있다.
당시의 독일은 봉건 제후(諸侯) 지배하의 소방 분립(小邦分立) 상태에 있었고, 봉건권력과 손을 잡은 루터 주의 신학이 자유로운 언론을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계몽사상은 신학과 종교 문제로 영국이나 프랑스 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1. 존 밀턴(1608-1674)
시인이자 청교도 사상가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올리버 크롬웰 밑에서 외교 비서관을 지냈다. 《실낙원》의 작가이다.
런던에서 청교도 신앙을 가진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다.
1637년 이탈리아를 여행, 귀국하여서는 국교회에 반대하고(종교와 국가가 일치함으로) 성서주의, 주교제 반대등이 특징인 청교도주의를 받들고 크롬웰을 지지하였다. 말년에는 시력을 잃고 맹인으로 살았다.
급진적인 사상가
청교도 혁명 이후 약 10년간 외국어 장관을 지냈다. 책을 집필했다. 서양 역사에서 최초로 언론/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아레오파기티카를 출판하였다.
간통을 이혼사유로 여기던 영국사회의 전통을 깨고, 이혼의 자유를 주장함으로 난봉꾼이라 별명을 얻었다. 왕정(군주제)에 반대하고 공화주의를 주장하였다.
*교육론 - 무분별한 학습과 체벌을 반대했다. 자유롭고 도덕적인 시민을 육성해야 한다.
*아레오파지티카는 '존 밀턴의 언론 출판 자유에 대한 선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다. 인류 최초로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실낙원
영어로 쓴 책으로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만일 제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저의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실낙원은 이러한 신념의 열매이다.
크롬웰이 죽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추방되었다. 시력마저 잃었. 1667년 딸들의 도움을 받아서 집필한 불후의 대작 《실낙원》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영문학 사상 유일한 세계적 서사시가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뱀으로 변장한 사탄의 유혹에 의해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타락과 사탄의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주제로 하고 있다. 밀턴은 신의 영원한 통찰력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에 일어나는 갈등을 명료하게 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에게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땅을 갈고,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 자손들이 복수해 줄 것을 바라면서 살아간다,
토머스 칼라일은 밀턴의 작품을 "성당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와 같다"고 평가했다.
*밀턴은 소네트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종교적 신념
인위적 전통에 반대하고 성서의 철저한 실천을 주장한 청교도 사상에 따라, 성서를 연구하는데 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2. 대니얼 디포(1660-1731)
영국의 소설가·언론인이다. 런던에서 상인의 아들로 출생하여, 비국교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였다. 이때부터 정치 논문을 쓰며 언론 활동을 하다가 1719년 <로빈슨 크루소>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주요 저서로 <선장 싱글턴의 모험> <세계 신항해> 등이 있다.
사업에서 실패를 거듭하고는 타고난 글재주를 활용해서 쪽수로 계산해서 받는 원고료에 매달렸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만년에는 소설도 썼지만 일생의 유일한 목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큰돈을 버는 일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글을 썼는데, 주요 소설을 집중적으로 발표한 1719년에서 1724년 사이에는 300쪽 넘는 책만 21편을 냈고, 그 후 1731년 사망 시까지 5년여 동안 12권을 더 썼다. 대표작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비롯해서 싱글턴 선장이 있다.
다니엘 디포는 영국이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격동기의 영국의 시대 정신을 잘 구현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후대의 작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로빈슨 크루소를 모방한 작품이 수도 없이 나왔다..
로빈슨 크루소는 탄탄한 구성을 자랑한다. 무인도에 난파 당한 로빈슨은 지금껏 자신이 살면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버리고 생존을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심지어 말하는 법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지독한 고독을 빠진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로빈슨은 자신이 속하였던 문명사회의 일원으로서 과거의 생활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일기를 썼다. 난파선 간신히 건진 잉크가 물에 젖어서 잉크로 쓴 글씨는 흐릿하였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바래서 날아가버린다.
이러한 절대 고독 속에서도 로빈슨은 미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고독을 새로운 형태의 자각으로 받아들였다. 살아가기 위해서 새로운 도구와 물건을 발견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새로운 수단을 고안하였다.
이 이야기는 계몽의 시대가 막 시작하고 있던 세계에 로빈슨이 남긴 유물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쓴다는 유물을 남겼다.
디포의 소설은 악당(惡黨)의 일대기라고 하는 형식으로 된 이른바 ‘악당소설’이 많다. 악행을 하면서도 합리화하려 않는다. 독자가 그들을 비난할 이유도 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 떠밀려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사실적 수법 때문에 영국 최초의 근대적인 소설로 간주되고 있다
3.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
영국계 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성공회 성직자이다. 1704년 이후 정계에서 활약하였으며, 같은 해 익명으로 2개의 풍자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위치도 확보하였다. 1713년 성직자에 임명되었으나, 곧 은퇴하였다. 조너선은 인간이나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는데, 그 근거로 《걸리버 여행기》는 가장 뛰어난 풍자 소설이라 일컬어진다.
1667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영국계 부모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삼촌 손에 자랐다. 더블린에서 하교를 졸업하고 제임스 2세의 왕위 양위와 그에 따른 아일랜드 침공으로 인해 잉글랜드로 이주하였다. 유명한 정치가 윌리엄 템플 경의 비서로 일하며 영국 정치계에서 자리 잡기 위해 노력했다. 템플 경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치적인 야망은 꺾였으나, 발표한 글들이 유명세를 타면서 스위프트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토리당을 대표하는 정치 평론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의 신랄하고 비판적인 글을 두려워한 정치가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반대편인 휘그당(왕당파, 보수파)의 세력이 커지자 아일랜드로 낙향해 더블린의 성 패트릭 성당 사제장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스위프트는 식민지 아일랜드의 기아와 가난이 점령국인 영국의 탓이라고 비난하며, 아일랜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써 아일랜드의 애국자 칭호를 받았다.
노년에는 정신장애로 고생하기도 했으며, 1745년 죽은 뒤 성 패트릭 성당에 묻혔다.
당시의 영국 상황을 풍자한 소설도서 오래 동안 여러나라에서 주로 동화로 각색하여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당시의 토리당과 휘그당이 민중들의 무관심 속에 자신만의 권력을 위하여 투쟁하는 시대 상황을 풍자하였다. 아울러 과학계도 허황하다면서 비판하였다.
스위프트는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출판하였다고 전하였다. 전부 4부로 되어 있다. 특히 4부는 신성모독에 걸려서 삭제하고 출판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동화책으로 발간되는 책은 3. 4 부는 싣지 않는다. 풍자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는다.
우리나라에서는 1890년에 윤치호가 소개하였다. 이후 1906년에 최남선이 펴낸 ‘소년’지에 동화형식을 일부가 소개되었다. 최초의 완역본은 2000년 문학동네에서 출판하였다.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레무엘 갈리버는 우연히 소인국과 대인국의 왜곡된 나라를 거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마침내는 인간의 이성을 갖춘 말과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슴(야후)들이 사는 나라에 이르렀다. 스위프트는 이러한 가상의 공간들을 교묘하게 18세기의 유럽 지도에 끼워넣어서 현실과 가상을 적절하게 섞어서 표현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여행기 양식이었다.
이 소설의 화자는 갈리버로서 독자의 길잡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영국과 영국 문화에 대하여 자신감을 말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여러 경험들이 쌓이면서 그의 확신이 무너진다. 그들이 만나는 경험에서는 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갈리버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독자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갈리버의 질문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게 딘다.
갈리버 여행기는 이야기 내용이 영국 안에 국한하는 바람에 얼마 가지 않아서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는 풍자의 대상이 당시의 영국이 아니고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풍자문학의 백미이다. 풍자문학은 언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나, 언론이 억압받던 시대에 시대를 비판하기 위한 표현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걸리버 여행기>는 절대 동화가 아니다.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출간되었는데, 내가 18세기의 왕이라도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을 것이다. 그만큼 위험하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그가 살았던 18세기의 모든 상황을 강도 높게 풍자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걸리버 여행기>에 적어놓은 얘기들은 비단 18세기라는 특정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고전이 다 그렇지만, 이 책도 시대를 꿰뚫는다.
우리는 동화책으로만 읽었기 때문에 원전이나 완역본을 읽으면 전혀 다른 책이라고 한다. 동화를 읽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4. 존 로크(1632년 - 1704년 10월)
왕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이다. 로크는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이다. 사회계약론도 평가받고 있다. 가장 영향력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이다. 그의 저서들은 볼테르와 루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뿐만 아니라 여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2] 그의 영향은 미국 독립 선언문에 반영되어 있다.
국가의 임무는 이 최소한의 안전보장에 있다고 하는 야경국가론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과 계약에 의하여 국가에 맡긴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국민 주권에 기초를 두었으며, 명예혁명 후의 영국 부르주아 국가를 변론하고 영국 민주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법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크의 아버지는 청교도 혁명 당시 올리버 크롬웰 밑에서 싸운 의회파 군대의 기병대장이었다. 부모로부터 청교도의 교육을 받았다. 1700년 에식스에 은퇴하였다가 그곳에서 1704년에 사망하였다.
5. 데이비드 흄(1711년 – 1776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로,계몽주의지이다. 또 경제학자이며 역사가이다.
흄은 존 로크와 조지 버클리 같은 경험주의자들, 당대의 영-불 지식인의 영향을 받았다.
흄은 에든버러 대학교에 12살의 나이로 조기 입학하였나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18세에 철학에 대한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하였다고 술회하나 "지평"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첫 철학 저서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을 집필, 26세 때 완성되었다. 그의 논리는 교회로부터 이단(무신론자)이라는 말을 듣는다.
1752년 에든버러 도서관장을 지냈으며, 1763년 주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서 루소와 사귀었다.
흄은 정치, 경제, 과학, 종교 등의 논저가 있다. 철학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인데, 제가 철학은 잘 몰라서 ---, 하여간에 계몽주의 사상가로 뉴턴의 영향이 많다고 하니, 그렇게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