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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전 직원이자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소송지원회) 회원인 무라마츠 히사토(村松壽人) 선생님이 얼마 전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무라마츠 선생님은 1944년 국민학교 졸업 직후 미쓰비시중공업에 입사해 4개월 나고야 항공기 청년학교 실습과정을 거쳐 그해 8월 1일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배치 받았습니다.
무라마츠 선생님이 근무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그 공장에는 앞서 6월 초 ‘조선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남,충남에서 약 300여명의 10대 소녀들이 이 공장으로 동원됐는데, 무라마츠 선생님은 이후 조선에서 건너 온 어린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강제 노역하던 과정을 가깝게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에서 끌려온 소녀들이 같은 나이의 또래였기 때문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양금덕할머니와는 생년월일까지 같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고 합니다.
“한창 클 나이인데 제대로 먹지도 못해 항상 배고파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하도 배가 고팠던지 남이 먹다 버린 것을 주워다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일본 관리인이 그걸 목격했습니다. 남들 앞에서 심하게 매를 때리고, 지저분한 애라고 손가락질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당시 피해자들이 1999년 3월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자, ‘나고야소송지원회’ 회원으로 가입해, 피해자들 목소리에 힘을 보했습니다.
특히, 1944년 12월 7일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 당시 광주전남에서 동원된 6명의 소녀들이 공장 건물 붕괴로 인한 압사 사망 사고와 관련해, 두 가지 점에서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측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무라마츠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①원래 그 공장은 방직공장이었는데, 미쓰비시가 항공기 제작 공장으로 바꿔 쓰기 위해, 벽돌 구조인 공장 건물을 지탱하고 있었던 격벽(칸막이 벽)을 없애버린 탓에 지진 당시 건물이 쉽게 붕괴됐고, 결국 탈출 할수 없었다는 점
②전황이 악화되면서 미쓰비시가 공습에 대비해 공장 동쪽 벽돌 바깥 쪽 바로 밑에 많은 방공호를 나란히 파 놓았는데, 지진을 공습으로 알고 정신없이 방공호에 뛰어 들어갔던 것이 오히려 방공호가 무너지면서 생매장, 압사된 사람이 많았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무라마츠 선생님은 이후에도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의 책임을 묻기 위해 열정을 다해 활동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나서 과거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나고야에서의 활동은 물론 도쿄에서 진행되고 있는 ‘금요행동’에도 여러 차례 참가해 왈동해 왔습니다.
"일본정부가 근본적 해결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 일본 국민이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애쓰지 않으면 안단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무마마츠 선생님은 자신의 명함에 '강제연행 직장 미쓰비시중공업'이라는 문구를 넣어 만들어 사용했는데, 자신이 몸담았던 기업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며 사죄를 촉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무라마츠 히사토 선생님은 2013년 4월 5일 미쓰비시중공업 사장한테 장문의 편지를 직접 보내, 자신이 이 공장에 근무했던 경위, 그 과정에서 조선 소녀들이 강제로 끌려와 목숨까지 잃었던 상황을 술회하면서,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회사의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읽어 봐도 잔잔하지만 어느 말보다 매서운 충고, 그리고 큰 울림이 되는 글입니다.
[연합뉴스.2013년] "근로정신대 해결…떳떳한 미쓰비시인이고 싶어“
https://www.yna.co.kr/view/AKR20130503096700054?input=1179m
한편, 양금덕 할머니 등 원고 5명이 2012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2013.11.11. 광주지방법원에서 승소한 1주일 뒤 나고야에서 ‘광주지방법원 1심 승소 보고 대회’가 있었는데, 이때 무라마츠 히사토 선생님은 광주지법 승소를 기념한 뱃지를 직접 제작해 일본을 방문한 참가자들에게 직접 선물로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무라마츠 히사토 선생님은 연로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오는 사람들을 매번 반갑게 맞았습니다. 매년 고등학생들이 ‘한일청소년평화교류’ 프로그램으로 나고야를 방문할 때마다, 노구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나와 학생들에게 당시 본인이 직접 그 공장에서 겪었던 일,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소녀들에 대한 안타까움 등을 고백하셨습니다.
[KBS.2013년] 일본 시민단체의 끈질긴 역사 교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707345
한일 간 관계가 악화되고, 이후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학생들이 나고야를 방문하는 일도 어렵게 되었는데, 2018년 한일청소년평화교류 행사 때 학생들 앞에서 증언하신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무라마츠 선생님은 매년 12월 7일일 즈음해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 인근에 위치한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당시 도난카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추도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셨는데, 2019년 추도회 행사 참석을 끝으로 그동안 외부 활동은 없었다고 합니다.
다카하시 대표님도 장례가 이미 끝난 뒤 최근에서야 지인을 통해 부음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쓰비시중공업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에서 동원된 근로정신대 소녀들의 비참한 현실과 죽음, 강제노역 피해를 고발해 왔던 마지막 증인은 이제 한 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양심 앞에 시종일관하시면서 할머니들 곁을 함께 해 오신 무라마츠 히사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자료] 1944년 전쟁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토쿠(道德) 공장 근로자의 편지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대표 취제역 사장 미야나가 슝이치(宮永俊一)님
안녕하십니까, 귀사의 번영을 경축하면서 더욱더 발전 하기를 기념하여 정성 담아 편지를 드리는 바입니다.
1944년 봄, 전쟁이 격화되는 속에서 당시 국민학교를 수료한 나는 '산업전사'로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었고, 귀 회사에 채용되었습니다. 동시에 사립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청년학교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전황이 긴박한 속에서 4개월 실습 기간을 거쳐, 같은 해 8월1일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토쿠(道德) 공장의 새 사령부 정찰기 제작 현장에 배속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저 무서웠던 같은 해 12월7일 발생한 커다란 동남해(東南海)지진(도난카이 지진)을 만나게 되어, 직장의 선배, 동료, 징용공, 동원 학도,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녀 등 60명 정도 사람들이, 공장 도괴(붕괴)에 의한 압사라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원래는 방직공장이었던 것을 항공기 제작 공장으로 바꿔 쓰기하기 위해, 벽돌 구조인 공장 건물을 받히고 있었던 격벽(칸막이 벽)을 걷어 치워 안전 구조상 취약한 공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도괴(붕괴) 피해를 크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긴박한 전황 아래, 공습에 대비하여 공장 동쪽 벽돌 바깥 쪽 바로 밑에 많은 방공호를 나란히 굴착해 놓았습니다. 매그니튜드 7.9의 거대 지진에 의해 공장은 이 동쪽 외벽부터 무너졌습니다. 나는 도망칠 수 있었던 공장 동쪽의 벼 수확을 마친 논밭에서 이 붕괴 광경을 직접 보고 무서워서 몸을 떨렸습니다.
긴박한 전황 때문에 지진의 진동을 공습이라고 착각하여, 방공호에 뛰어들어가 외벽 붕괴로 생매장, 압사된 분도 다수 있었습니다. 전시 강제 동원이 비극을 크게 확대한 것입니다.
이 공장에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었던 한반도로부터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온 조선인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에 가면 여학교에 다니고 공부할 수 있다는 꾀임에 속아 끌려온 소녀들이었습니다. 직장 선배들이 그녀들이 이 공장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자기 여동생들은 공습을 피해 농촌에 대피시키고 있던 상황에서, 같은 또래의 조선의 아이들은 군수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공장이 붕괴한 후, 도토쿠 공장의 종업원들은 도야마현(富山縣)에 있는 구레하(吳羽) 방직을 육군과 군수성이 접수한 뒤 그 공장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나는 후쿠노(福野) 공장, 다이몽(大門) 공장과 전근을 거듭한 끝에 1945년 8월 종전을 맞이해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즈음 전시 체제라고 해도, 귀사 우수한 선배 사원들의 인격이나 마음에 접하면서 사회인 첫걸음으로 배울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후 격동의 혼란기를 똑바로 꿋꿋히 살아 내는 힘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인 첫걸음을 귀 회사에서 신세를 진 내가, 전후 인생 속에서 사회가 각양 각색인 현상을 접하고 배우면서도 마음에 걸린 일이 있습니다.
저 도토쿠 공장 붕괴의 대지진 때의 일은 생애 선명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숨진 희생자들 속에는 당시 12∼14세 몸으로, 당시의 국책(국가시책)이라는 미명하에 사실상 강제력을 동반하여 끌려 온 조선인(현 한국 국적)소녀 6명이 있습니다. 그 유족들이나, 당시 식민지 민족으로서 멸시나 차별 때문에 괴롭고, 슬픔 속에서, 노동을 강요 당한 지금은 할머니가 되신 분들이 사죄와 보상을 귀 회사에 요구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인 양금덕씨는 나와 생년월일을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몸으로 귀사에 성의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녀들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미 재판은 끝났습니다. 전후 일한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재판소는 원고의 청구를 법적으로 피고에게 강제할 수 없으나, 원고들에게 심각한 피해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여 도의적으로 자발적 해결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있어 귀사도 소송 원고를 대표하는 지원단과 해결을 목표로 하는 '협의(협상) 자리'를 마련했으나, 1년 반 장기간에 걸친 협상에도 불구하고 귀사가 구체적인 해결에 도달하는 성의를 제시하지 않아 '협의 자리'는 결렬에 이르렀습니다.
해결을 목표로 하는 협상 시작과 결렬의 사실 언론에도 보도 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전쟁 중의 미츠비시 동료 이외에도 친구들이 많지만 '미츠비시에 같이 근무했다'는 인연 때문에 친족들이나 동네 등에도 여러 동호나 사회 봉사활동하는 동료들 사이에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사회 상식도 풍부한 분들입니다. 그 분들의 생각을 물어보면 "미츠비시는 무엇에 집착해서 전후 보상 문제에 결말을 짓지 않는가? 시대에 앞장서야 할 거대 기업인데 한심한 이야기다"는 소리가 대부분입니다.
도야마의 다이몽 공장에서 전쟁 종결을 접하고, 포츠담 선언의 내용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속에 '조선 민족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한다'라는 1항이 있었습니다.
아직 청년 초기었던 나는, 선배들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조선인 출신 국민학교 옛 친구의 학교나 가정 상태, 공장 직장에서의 조선인 정신대나 징용자의 상태에 비추어 여러가지 생각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전쟁 후 미쓰비시중공업 사장들 중에는 "저 전쟁은 국가를 위해서 온갖 힘을 다한 것이니 회사로서는 아무 부끄러움이 없다"고 공언한 분도 있습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을 하고, 전쟁 범죄를 추궁하는 연합국에 의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결과도 받아들였습니다.
전쟁 전 대일본 제국 아래에서 국가 권력은 군벌과 재벌에 지배되고 관리되어, 그 결과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침략이 전쟁과 식민지 정책으로 진척시켰던 사실이 국제적으로 합의된 역사 상식으로 되었습니다. 전쟁 후 한때 그 책임을 추궁하는 연합국에 의해 일본의 재벌 해체 지시가 발령되어 귀사도 한 때 3개의 중공업 회사로 분할된 시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전의 제국 의회는 중의원과 귀족원으로 구성되고 있었습니다. 상원의 역할을 맡은 귀족원은 국민들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당시의 화족, 다액 납세자들의 대표, 정부 추천의 학식 경험자 등으로 구성되고 있었습니다. 재벌·재계 대표에게 의석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국가를 위한 전쟁'이라 했어도, 그것은 군벌, 재벌이 중추 역할을 맡아 추진시킨 일이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명확히 밝혀진 일이며, 그 책임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전쟁 전의 일본에 의한 종군위안부 문제나 노동자들의 강제연행 문제에 대하여, 아직도 성의있는 해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 책임을 촉구하는 국민적 운동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시는 바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와 관련해 일본 대기업들에 대해 (새롭게) '전범기업'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국제적으로도 확인된 사항에 대하여 냉정히 똑바로 마주 향하면서, 도리에 걸맞는 해결책을 찾아 가는 것이야말로 현대 국제 사회에서의 거대 기업의 긍지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미츠비시에서 보살펴 주던 많은 선배, 동료들은 말합니다. "우주를 날개짓 하고 있는 미츠비시는 자만하지 않고 작은 발밑의 불량도 결코 잊지 않은, 도리에 걸맞는 해결을 해 나가야 한다"라고. 인생의 한 때를 미츠비시 회사원으로서 일했던 것에 자랑을 가지고 싶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고야의 할머니라고 불리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에 관한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귀사가 현안인 이 문제를 인권 존중의 보편적인 원리, 그리고 현대의 국제 사회의 진보를 겹치는 상식에 비추어 뒤떨어지지 않게, 미야나가 사장님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해결 방향을 찾아낼 것을 마음으로부터 바라며 굳이 이렇게 편지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러한 전쟁 시에 관한 문제를 예의 해결을 도모하여 피해를 준 이웃 여러 나라들과의 신뢰와 우호 관계를 회복한 독일 기업의 교훈도 배우면서, 소송 원고 여러분의 연령을 감안하면 한 순간의 짧은 시간도 유예될 수 없다는 것을 크게 인식해서 미쓰비시중공업으로서 진정 미래에 부끄럽지 않는 명예 있는 결단을 원하며, 전쟁 시·전쟁 후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땀을 흘린 적 있는 한 근로 국민으로서 한 말씀 드립니다.
2013년 4월 5일 무라마쓰 히사토(村松壽人)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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