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은 서울 남산 기슭의 장충동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원조''원조1호' 등을 내세운 족발집이 즐비해 '족발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6.25전쟁으로 실향민이 된 평안도 출신의 한 여성이 1960년에 처음 문을 열고,
이듬해에 또 다른 북한 피란민 출신 여성이 두 번째 족발집을 개업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그 두 집을 비롯해 수십년의 역사를 이어온 족발집이 수두룩하다.
그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 '장충동 족발'을 상호로 삼은 음식점만 해도 4000개가 넘는다.
그러기까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8000명 수용 규모의 장충체육관이다.
1979년 잠실체육관 건립 전에는 국내 최대의 실내체육관이어서 대형 수포츠.문화.
정치 행사가 자주 열렸고,
그 참석자들이 인근 족발집을 찾았다가 맛에 매료돼 입소문을 낸 것이다.
1955년 육군체육관으로 건립. 운영해오던 국방부로부터 인수한 서울시가 한국
최초의 돔(DOME)식 건물로 개조하고 현재의 이름으로 바꿔 개관했던
1963년 당시만 해도 빼어난 외관과 첨단 시설의 전천후 공간이었다.
미국의 세계적인 가수 몇 분이 1966년에 가진 첫 한국 공연 등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은
장충체육관 행사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1966년 김기수 선수는 이곳에서 이탈리아의 영웅이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한국 프로권투 최초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프로레슬링의 김일 선수는 '박치기왕'' 진면목을 보여 전국의 남녀노소를 열광케 했다.
1972년 '10월 유신'에 따라 제8대부터 제10대 대통령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단독 후보를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률로 선출한 '체육관 선거'도 치뤄졌다.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와 88서울올림픽의 유도와 태권도 경기 등도 열렸다.
박칼린 뮤지컬 감독이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4학년이던 1989년 박영미라는 이름으로 출전해
자작곡 '사막의 비'를 열창했던 제13회 대학가요제 무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낡았던 장충체육관이 50년 만의 리모델링 공사를 2년 8개월에 걸쳐 마치고,
관중석 4500여 개를 갖춘 복합 문화체육 공간으로 오는 17일 재개관 한다.
장충동을 오래 추억하게 하는 차원을 넘어 국제적 명소로서의 위상을 더 높여가길 바란다.
김종호 논설위원
한국 현대사와 호흡한 장충체육관
1963년 2월 1일 개관
1966년 6월 25일 김기수 한국 첫 프로복싱 세계 챔피온
1972년 12월 23일 제8대 박정희 대통령 선출
2000년 3월25일 프로 레슬러 김일 은퇴식 (당시71세)
2004년 2월 14~15일 일본 '스모' 한국 공연
장충체육관 어떻게 변했나 자료 : 서울시
4층 (지하1층, 지상 3층)-------5층(지하2층, 지상3층)
연면적 8385m2 -- 1만1429m2
관람석 4658석 ----- 4500석
경기장 바닥 길이 38m --- 46m
리모델링비 326억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