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_인간적인_너무나_인간적인
#제1장_26절 p33~36
'사상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 (내가 붙인 제목)
****** 워드 필사한 이 글의 특이점 : 책 본문에 있는 콜론( : ), 세미콜론( ; ), 대시(━)는 모두 제외하고 옮겼다. 콜론은 앞 문장과 계속 연결된다는 의미이며 부연설명이기도 하고, 세미콜론은 콜론을 지지하는 세부 설명이거나 예시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콜론과 세미콜론을 제외하여도 문장에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서 제외하였다.
'대시'로 연결된 문장들은 하이픈이 지시하는 대로 연결하여 읽어야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내용이 길어서 책 내용이 다소 헛갈릴 수도 있다. 해서 대시 역시 제외하고 옮겼다. 대신 대시로 연결된 부분을 바로 연결하였다. 문장을 재배치했다는 의미다.
*** 1권 해설에 하이픈으로 쓰여 있어서 하이픈이라고 썼지만, 책에 표시된 문장 기호는 하이픈( - ) 보다 더 길다. 그러므로 (━) '대시'라고 써야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하이픈은 주로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용도로 쓰고, 대시는 어구와 문장, 또는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여 강조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 같으니까 말이다.
______제1장 26절______
사상가의 가장 내적인 체험으로부터 ━ 인간에게 사물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이는 사물 속에서 그 사물만을 보고 인격을 보지 않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실로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을 창조하는 충동의 시계 장치를 한순간만이라도 풀어놓는 일이 도대체 인간에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제게할 수 있다.
사상과 관련된 경우조차도 그리고 그것이 추상적인 사상일지라도, 인간은 마치 그 사상이 자신들이 그것과 싸우고 관여하고 보호하고 돌봐주며 키워야만 하는 개인들이기나 한 것처럼 행동한다.
새로운 명제를 듣거나 발견하게 되는 바로 그때에 우리 자신에게 몰래 들어가 조용히 귀 기울여보라. 그 명제는 매우 완고하고 거만한 태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마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 명제에 대한 적수로 어떤 반대 명제를 내세울 수 있을지 혹은 ‘아마’ , ‘때로는’이라는 말을 그 명제에 덧붙일 수 있을지의 여부에 대하여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면 ‘아마’라는 간단한 말조차도 우리에게 위안을 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가진 사적이고 부담스러운 폭력을 깨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그 새로운 명제가 좀 더 부드러운 형태로, 즉 반박하는 자의 품속에 참을성 있고 겸손하게 몸을 맡기는 형태로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독재적인 마음을 다른 시험을 통해 모색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는 이 약한 존재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애무하고 양육하며 그것에 힘과 충만함, 게다가 진리와 절대성까지 부여할 수는 없을까? 그것에 대하여 마치 부모처럼 혹은 기사처럼 혹은 동정심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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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정신의 역사에서 지칠 줄 모르고 ‘왕을 만드는 자’들인 우리는 그를 왕좌에서 밀쳐내고, 그의 적대자들을 옹립한다. 이 점을 고려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해보라. 그러면 분명 아무도 ‘인식 본능 그 자체’에 대하여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이픈으로 연결된 부분 옮김. 35쪽 1~4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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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어서 상대방을 서로 바라보는 일도, 서로 다가서는 일도 없는 판단을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때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판단을 이쯤에서 결합시키고 결말지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꿈틀거리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은 이 결말에서 하나의 결과가 발생할 경우, 결혼으로 맺어진 이 두 판단들뿐만 아니라 그 중매자 역시 영예를 얻게 될 것이라고 예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사상에 대해 저항과 악의의 방법으로도 혹은 호의의 방법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경우에는(즉 그 사상이 참이라고 간주될 경우에는), 굴복을 하고 그 사상을 지도자와 왕후로 숭배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영광의 자리를 내어주며, 과시하고 자만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광 속에서 그들은 함께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상 자체가 언젠가 우리에게 위험한 것이 된다 하더라도(이 사상의 이러한 영광을 어둡게 하려는 자에게 화가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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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상적인 인격과의 이러한 은밀한 투쟁 속에서 그리고 대부분 숨겨져 있는 이러한 사상들을 중매하고 사상의 나라를 세우며 사상을 양육하고 구제하며 간호하는 행위에서 참되지 않은 것보다도 ‘참된 것’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현실의 인물들과 교제할 경우에 정의를 행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에는 습관, 유전, 교육으로 인해 그렇게 행하게 되기 때문이며 근원적으로는 참된 것이(공정한 것과 정당한 것도 마찬가지로) 참되지 않은 것보다 더 유용하고 더 명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유의 세계에서는 오류나 거짓 위에 세워진 힘과 명성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워진 것은 언젠가 붕괴할 수 있다는 예감은 그 건축가의 자의식에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는 부서지기 쉬운 건축 자재를 쓰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어떤 세계보다 더 영속적이지 않은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진리를 바랄 때에 그는 인격적인 불멸성을 믿는 신앙을 포옹한다. 즉 그는 “나 자신이 구원되는 한, 세계는 멸망해도 좋다!”라는 말의 배후 사상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존재하는 모든 사상 중에서 가장 교만하고 반항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그에게 있어 바로 그 자신의 자아가 되어버렸고 자신을 불변하는 자, 모든 것에 반항하는 자로 변모시켜간다.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는 가장 훌륭하고 견고한 돌만을, 즉 진리 혹은 그가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만을 사용하려고 하는 점은 그의 무한한 긍지이다. 타당하게도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자의 악덕’으로 교만함을 지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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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속에 ‘지적 양심’이라고 불렀던 기이한 현상의 뿌리가 들어 있다. 이렇게 여기에도 역시 검은 뿌리에서 나온 최고 부류의 도덕적인 그 무엇이 자라나 있는 것이다. <하이픈으로 연결된 부분 옮김. 36쪽 12~14줄>
그러나 만약 이러한 ‘역동적 힘’을 가진 악덕이 없었더라면 진리와 세상에서의 진리의 효력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사상, 개념, 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신을 존경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들이 우리에게 보상해주고 경멸하며 칭찬하고 비난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치 자유롭고 정신적인 인격체와 독립적인 힘을 가진 자들과 교제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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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사정으로 낭독을 한 주 쉬었더니(나만), 어느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을 오늘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를 읽기 시작했다.
다른 단락에 비해 제법 긴 편인 이 글에 눈길이 간 이유는, '사상'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결국 참된 것이 참되지 않은 것보다 더 유용하고 명예롭기 때문이라고.
"인간이 현실의 인물들과 교제할 경우에 정의를 행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에는 습관, 유전, 교육으로 인해 그렇게 행하게 되기 때문이며 근원적으로는 참된 것이(공정한 것과 정당한 것도 마찬가지로) 참되지 않은 것보다 더 유용하고 더 명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힘'을 사용하는 '지자'의 교만함에 대하여 니체는 그 힘이 없이는 어떤 사상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상가의 가장 내적인 체험으로부터 ━ 바로 그 속에 ‘지적 양심’이라고 불렀던 기이한 현상의 뿌리가 들어 있다. 이렇게 여기에도 역시 검은 뿌리에서 나온 최고 부류의 도덕적인 그 무엇이 자라나 있는 것이다."<하이픈으로 연결된 부분 옮김. 36쪽 12~14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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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 첫 줄에 사용된 '대시(━)'는 어구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마지막 대시가 있는 문장과 연결해서 읽어도 되는 듯하다.
시작과 마무리를 연결하여 해석하여도 될듯하다. 글의 시작과 마무리에 대시로 연결되어 문장이 배치되어 있으니까. 시작과 마지막 그 '사이'에 있는 글은 모두 이것에 대한 부연 설명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렇게 되는 과정을 '사이'에 배치한 것. 서론/본론/결론 구조인데, 단지 대시로 더 강조한 것.
그냥 26절 이 글에 눈길이 가서 워드 필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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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서문은 공감가는 부분이 많다. 읽어 본다면 그렇게 같이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방랑의 책이 때때로 그런 모습을 보였듯이 계속해서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
특히 어떤 한 '과거'에 사로잡혀 있고 과거의 정신을 고뇌할 수 있는 정신을 아직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귀에 이 책들을 권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힘겨운 길을 가는 너희에게, 귀한 사람들이자 가장 위험한 곳에 있는 사람들인 동시에 현대의 영혼의 양심이어야 하며 그러한 영혼으로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가장 정신적이고 가장 용감한 사람들인 너희에게. 그리고 오늘날 질병, 독, 위험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한데 모이는 너희에게 이 책을 권해도 되지 않을까?
너희의 운명은 너희가 어떤 개인보다도 더 심하게 아프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가 '단지 한 개인'인 것만은 아니므로......너희의 위안은 하나의 새로운 건강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 그리고 내일과 모래의 건강의 길로 나아간다. <서문 6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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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니체의 염세주의는 바로 낭만주의적 염세주의에 반대해서이며, 이를 니체는 '관점주의적 염세주의'로 대체하고 있다.
"비극적인 것과 염세주의의 의지가 있는데 그것은 강한 지성(취미, 감정, 양심)이 지닌 엄격함의 징후이다. 이 의지를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모든 삶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공포스러운 것, 의심스러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추구한다. 그러한 의지의 배후에는 거대한 적을 원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서문 7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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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주의적 염세주의는 '바이킹'과 닮아 있다는 생각 든다. '전사'의 이미지다. 어찌되었든 틈틈이 '바이킹' 드라마 다 봤다. 질질 끌었지만 결국 다 봤다!
#니체 #관점주의 #니힐리즘 #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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