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망있는 문화예술인들이 떠난 자리는 청년들로 채워졌다.
히피, 통기타 등이 한국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75년
대마초 파동을 시작으로 명동의 음악다방과 비어홀은 된서리를 맞아 활기를
잃어버렸다.
쎄시봉, 금수강산, 오비스캐빈 등이 문을 열면서 통기타 음악과 공연이
새로운 젊은층들을 명동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윤형주, 송창식, 조영남,
양희은, 서유석, 김세환....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의 반전시위 등 유럽을 뒤흔든 6.8 혁명은
모든 기성 권위와 통제에 도전장을 내밀던 시대였다. 새로운 청년문화는 우리나라에선 주로 그 외형만 수용되어 장발, 청바지가 대세를 이뤘다.
그후 디스코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통기타 가수들의 설자리는 없어져 갔다.
국립극장의 남산 이전과 함께 문화예술인들이 떠나갔지만 동인제 중심의
극단과 소극장들이 명동에 생겨났다. 카페와 극장이 결합한 까페떼아뜨르,
삼일로 창고극장, 엘칸토 소극장 등에서 자유롭고 실험적인 연극들이
탄생하였다.
군사정권하에서, 공연 신고서와 영업정지 명령서....
'80년대 후반부터 연극인들은 대거 대학로로 이동해 가고, 통기타와
음악다방들은 무교동으로 이전하면서, 잠시 활활거리던 명동의 젊은 불꽃들은
꺼져가기 시작했다.
이봉구 별세 기사. 개인소장. 1983
반 군사독재 항거시대
명동성당 앞마당에서는 대형 걸개 그림이 건물 아래로 드리워지고, 거리연극과
그 뒤를 잇는 민중가요 합창, 판화전, 민중미술전도 80년대의 저항문화로 기록될
것이다.
1950-60년대 명동을 기억하는 다양한 회고담들.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삼일로 창고극장도 어느 기업의 후원으로
2011년 재개관 하였다.
서울 최대의 유동인구, 최고의 지가인 명동에 2005년까지 증권 투자신탁회사로
활용되던 옛 국립극장이 명동예술극장으로 컴백하면서, 다시 이곳에 문화의
싹이 피어나고 있다. 작년 TV에서 통기타시대 가수들을 재조명하고부터, 통기타
음악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연도 다시 붐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명동성당 앞 로얄호텔에는 항시 일본인 관광객으로 만원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로 넘쳐나던 이곳에 이제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일본어로 적힌 식당과 양품점 일본어 호객꾼들....
2011 봄, 주말의 명동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