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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객(風流客)들의 시흥(詩興)을 일으키게 하는 김천 봉황대(鳳凰臺) 2015. 9. 5
김산향교 탐방을 마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봉황대(鳳凰臺)를 찾았다. 눈앞에 전개된 연이 가득한 아담한 연화지(蓮花池)가 보인다. 연꽃 만개기는 지났지만 연꽃이 피었을 때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을 봉황대이다. 봉황대를 향하여 걸었다. 연화지 주변의 수목과 어울리는 경관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봉황대 위치도
드디어 봉황대의 출입문이 일각문에 조양문(朝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문을 통과하니, 일각문을 마주보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누각(樓閣)의 봉황대 건물이 나타난다. 막돌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마루방의 네 기둥은 4각 기둥을, 나머지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황대의 연화지(蓮花池) 일각문인 조양문(朝陽門) 봉황대(鳳凰臺) 전경 봉황대는 연화지(蓮花池) 북쪽 한 쪽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820-1이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김천 시내에서는 오직 하나 남은 옛 건물이다. 면적은 사방 4.5m, 약198㎡ 이다. 봉황대에 올라서 연화지 서쪽의 경관 이 건물은 선비들이 자연과 풍류를 즐기면서 학문을 닦기 위해 세운 정자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삼락동 마을 북쪽에 있던, 건립연대 미상의 낡은 정자였다. 당초에는 읍취헌(挹翠軒)이라고 불리었는데, 1706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金山)군수로 있던 윤택이 봉황의 꿈을 꾸고 이 정자의 이름을 봉황루(鳳凰樓)라고 바꾼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 이백(李白)의 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금릉 봉황대에 올라》에서 딴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봉황대에서 바라본 연화지 1792년에 군수 이성순(李性淳)이 중수하고, 1838년(헌종 4년)에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 북쪽 한 쪽으로 옮겼다. 1896년 윤헌섭(尹憲燮)이 김산군수로 있을 때 주민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중수하였고, 1979년에 김천시에서 보수하였다. 옛날에는 맑은 못물 위로 산과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못 둘레에는 숲이 우거져 풍류객들이 이 다락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면서 붓을 들면 절로 시흥(詩興)을 일으키게 한 곳이었다. 지금도 김천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봉황대에 걸려있는 시편액 1
봉황대에 걸려있는 시편액 2
봉황대에 걸려있는 시편액 3 아름다운 연화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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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과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네. 자세한 설명이 다시 공부하게 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