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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계 제도 안에 성직자·수도자들은 평신도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 있고, 평신도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교회나 수도회, 수녀회는 거룩한 곳이고,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이나 세상은 속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혁신한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은 1중대, 사제나 수도자들은 2중대, 평신도들은 3중대가 아님을 공의회는 명확하게 강조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교회의 위계 제도, 다시 말해서 주교직, 사제직이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신도들 역시 성화의 길로 불림받았음을 명백히 강조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저는 늘 확신합니다. 신분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흙탕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한 송이 청초한 연꽃처럼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끝도 없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거룩함을 갈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들은 이미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께서도 간절히 열망한다면, 거룩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신다면, 세상 안에서 충분히 봉헌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수행하고 계시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못지 않은 성직을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께서 매일 행하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을 향한 봉사의 현장에서, 짜증내면서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봉사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미 성화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 한 명 한 명이 다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다.’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어떤 위대한 주교님이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보다도 훨씬 고귀한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참 진리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오면 절간이 술집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평신도들께서도 술집에 들어가시면 그 술집을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발길 닿은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켜나가시길 바랍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성직자들의 선생은 언제나 평신도들이었다>
복음: 마르코 12,38-44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렙톤 두 닢을 바치는 과부의 믿음과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비교하시며 예수님은 사도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평신도를 통해 당신 미래의 사제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운명은 사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며 성직자들부터 죽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에제 9,4-6)
여기서 성전부터 시작하라고 한 것은 사제들부터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성전’은 거룩한 성소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성소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사제들에 의해 거룩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제가 잘 살면 질투가 나지 본받기 어렵습니다. 여러 이유로 그런 사제처럼 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평신도가 자신보다 잘하면 ‘평신도도 이만큼 하는데, 나는 뭐지?’라며 뉘우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돈과 명예로 타락해가는 교회를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하느님 음성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저 시골의 작은 경당을 재건하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무너지는 라떼라노 대성당을 어깨로 받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부제를 받아야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평신도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제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성직자라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성직자가 되어서도 살 수 없는 가난과 겸손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압록강까지 도망하여 자신의 고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뉘우치고 돌아와 순교합니다.
이탈리아 로피아노라는 동네에 사제들의 수련소(Scuola di formazione)가 있습니다. 사제로 일정 기간 살다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 이들이 와서 스스로 권위와 명예와 재물을 다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수련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만든 이는 키아라 루빅(Chiara Lubich)(1920–2008)이라는 평신도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1939년 로레토의 마리아 성지를 방문하는 동안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사명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을 느끼며 심오한 영적 소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 그룹을 만들어 사랑과 일치에 초점을 맞춰 복음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포콜라레 운동의 시작입니다.
저도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꾸르실료 운동’의 수원교구 지도신부를 6년간 하며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도 이 교육을 많이 받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제가 본받을 평신도가 줄어들면 교회는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사제는 그 위치상 쉽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만큼 많은 대우를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평신도들이 눈에 보이게 큰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처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성체의 기적을 온라인에 기록하여 시복을 받은 이탈리아 청년인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가 있습니다. 그는 16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전에 3년의 공을 들여 세계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들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이는 인터넷은 잘 모른다며 말로만 강론하며 성체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제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아이도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과부처럼 조용히 섬깁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그 모범으로 성직자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오늘 전례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두 과부이다. 두 과부는 하느님 앞에 믿는 이들의 상징적 표상이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는 많든지 적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부(富)이다. 즉, 자비로움이 부이며,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항상 불행이요 가난이다. 우리는 사렙타 과부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 즉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물을 끊어버리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그 예언자를 믿는 마음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애덕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으로 몇 배의 보상을 받는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 중의 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 식량 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 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두 번째로 과부의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기에 아무런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심 없는 봉헌이었다. 가난하였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헌금 궤 앞에 계신 예수께서는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행위는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자세였다. 반면에 과부는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인 렙톤 두 개를 바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성을 요구하신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의 부스러기를 바쳤을 따름이다.
히브리서에서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새로움에 대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매년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지만(히브 9,25),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어 죄를 이기신 후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셨다(히브 9,26).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의 두 과부와 같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어 죄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이 될 것이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 그리고 말없이 완전히 봉헌하신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274).
오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벤저민 프랭클린을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고, 미국 화폐 100달러에 새겨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리 그램 기술 등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발명품에 전혀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통해 큰 혜택을 누리고 있듯이 자신의 발명품으로 타인을 도울 기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이러한 봉사를 거리낌 없고 아낌없이 행해야 한다.”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은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정당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철학은 ‘선(善)은 나누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큰 어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100달러에 새겨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직자로 사는 저도 금전적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본당 부채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늘 ‘돈’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주님께서 칭찬한 사람은 여유 있는 가운데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던 과부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세와 십일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 금고가 마련되어 있고, 이 금고에는 열세 개의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진해서 내는 헌금함으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밖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돈을 많이 넣고 그 대가를 얻습니다. 즉, 많이 헌금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기보다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로, 성인 노동자 하루 일당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올해 최저임금이 9,860원이고, 하루 8시간 일한다고 하면 78,880원입니다. 이의 64분의 1이면 1,233원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들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생활비 모두를 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선(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이유보다 나눌 수 있는 이유를 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주님께서 나머지를 채워주십니다.
오늘의 명언: 전쟁은 때때로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악이며 선이 아니다. 우리는 남의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지미 카터).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참으로 가련한 사람은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 아니라
그의 재산에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 때
그 선행은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남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헌금은
액수의 많고 적음보다
그 헌금에 담긴 마음이 중요합니다.
진짜 부자는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눌 것이 많아도
욕심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메마른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의 전부를 바친
과부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소식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듯
필요한 만큼만 적게 가지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롭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7,10-16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또는>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