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의 개도 안먹는 돈이 뭐라고…….”
돈으로 어지간히도 속을 태우셨던 아빠 덕분에 어린 시절 엄마 입에서 떠나지 않던 말이었다. 그 놈의 돈이 말이다. 늘 버는 돈보다 빚보증으로 날리는 돈이 많았던 아버지는 돈 때문에 무너지는 순간 자신을 놓으셨다. 사람이 돈 때문에 망가지는 것은 순간이다. 돈도 없는 분이 술 마실 돈은 어디서 생기시는지 하루 세끼 밥 먹듯 술을 드셨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그 돈이란 것이 요물은 요물이다. 길고 긴 방황의 시간을 지낸 아버지가 강남의 큰 아파트단지 경비원으로 취직하시면서 월급이란 걸 받기 시작하셨다.
월급봉투가 한 달 두 달 쌓여가자 사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 세끼 마시던 술이 먼저 줄었다. 검붉었던 얼굴의 혈색이 불그스름하게 바뀌셨다. 집으로 들어설 때면 비닐봉지에 손주 줄 과자 서너 개가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마냥 대롱대롱 매달리곤 했다.
돈은 생존이다
개도 안 먹을 돈이 아버지에겐 살아가는 힘이기도 했고 아버지의 허세가 되기도 했다가 아버지를 죽이는 비수가 되기도 했다. 그 당시야 지지리 복도 없게 그런 아버지를 둔 것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그 시절의 아버지 나이에 내가 서있어 보니 돈이란 요물에 맥없이 당하고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또 그 시절 그런 사연 하나쯤 없으면 나이 들어 이바구할 거리가 없어 섭섭하겠다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다들 그 놈의 돈은 잘 벌고 사는지 궁금했다. 내 아버지 나이에 선 중년의 남자들은 도대체 돈들은 잘 벌고 있는건지, 먹고 살만은 한 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돈이요? 돈은 생존이죠. 저한텐 그래요.”
“돈? 많을수록 좋은 거. 회사에서도 돈돈, 집에서도 돈돈 하니까.”
“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
“돈은 좋은 거.”
“돈은 사람을 평가하는 또 다른 잣대.”
돈이 무엇일까를 물었다. 대답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누가 살면서 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산다고. 돈을 왜 버는지 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을텐데. 그 생각할 시간에 돈을 벌면 모를까.
사회의 정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들은 대단했다
돈이 뭔지, 돈을 왜 버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어도 언제까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질문에는 쉽게 답들을 내놓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65세까지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65세까지는 일을 해야할 것 같아. 나 때문이 아니라 애들 때문에. 나중에 컴퓨터 A/S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 일하고 싶어요. 프리랜서라 은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 삶을 위해서라도요.”
“원래 계획은 65세까지 일하고 그 후는 삶을 즐기며 사는 거였어요. 근데 작년에 늦둥이가 태어나서 더 일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고민 하죠. 어쨌거나 80세까지 산다고 치면 65세까지 열심히 벌고 그 후 15년은 못한 거 하면서 살고 싶어요.
어떤 근거로 65세라는 평균치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사회의 정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들은 대단했다.
돈 관리는 누가 할까? 예전에는 결혼하면 경제 주도권을 여자가 가져야 한다, 신혼 초에 잡아야 한다는 등의 속설 아닌 속설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돈 관리하는 것을 귀찮아한다고 생각했다. 돈 관리는 여자가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실제 여자가 더 잘해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선입견이었던 모양이다.
“돈 관리는 각자 해요. 생활비를 정해놓고 주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죠. 아내가 얼마 버는지도 몰라요. 개인일을 해서 비용 들어가는 곳이 많으니까 버는 걸 다 주지는 못하죠. 대신 생활비에 대한 간섭은 전혀 안 해요. 전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고 그래요.”
“돈관리는 아내가 해요. 제가 하기 싫구요. 내가 쓸 것만 있으면 되니까요. 필요할 때 통장에서 빼쓰는데 쓰는 데가 뻔해요. 밥값이랑 담뱃값이 다니까.”
“돈 관리는 제가 해요. 생활비를 주고 나머지 공과금이나 적금 그런거 제가 처리해요. 아내가 하기 싫어해요. 제가 하는 게 오히려 더 좋대요.”
돈 관리를 직접 하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다보니 수입에 대해서도 민감한 편이다. 반면에 여자들이 쓰는 돈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않는 바람직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또 그만큼의 신뢰가 없다면 살기 불편할테니 믿어볼 수밖에.
세상에서 남주머니에 있는 돈 벌기가 가장 힘들다
“매번 치사하게 돈 벌죠.”
“매번 내가 이런 모멸감을 느껴가며 돈벌어야 하나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예전 직장 다닐 때인데 어느 정도 연수가 되면 현장으로 순환보직을 가게 되요. 그때 본부장님이나 사장님이 오실 때가 있어요. 그럼 제가 발령을 빨리 받아야 하니까 그 분들 눈에 들어야 하잖아요. 그때가 눈도 오고 진짜 추웠거든요? 근데 아침부터 그 분들 오실만한 동선에 맞춰서 눈 쓸고 열심히 일하는 거죠. 그 분들 오시면 더 열심히 하는 거에요. 어쨌거나 눈에 띄어야 하니까요.”
“자영업을 하니까 돈을 떼이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처음 고향으로 내려와서 간판일을 시작했을 땐데요. 그때만 해도 간판하는데 외상도 많았어요. 처음 PC방을 개업하는 분이셨는데 간판을 7백만 원에 계약했어요. 시공 다하고 잔금받기로 했는데 돈이 좀 부족하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250만원을 주시더라구요. 일주일 뒤에 주겠다 하셔서 기다렸는데 또 담에 준다고. 그렇게 한달이 지나서 PC방을 가봤죠. 근데 주인이 바뀌어 있더라구요. 그 당시엔 PC방이 잘 되서 6개월쯤 하다가 권리금 받고 팔던 시절이라 알고는 있었는데 한달만에 그럴 줄은 몰랐죠. 그래서 돈만 떼였어요. 그 뒤론 사람 잘 안 믿어요. 무조건 계약금 받고 일하죠.”
세상에서 남주머니에 있는 돈 벌기가 가장 힘들다. 대한민국에서 돈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는 사십 대 가장의 이야기처럼 돈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결코 가난해보지 않은 사람의 속 모르는 이야기인건 어쩔 수 없다. 돈이 없다는 것은 남자를 한없이 위축시킨다.
학창시절엔 싸움 잘하는 놈이 최고고
커선 돈있는 사람이 최고다
“돈이 사람관계를 규정하는 경우가 많죠. 돈 을 잘 벌고 그렇지 못하고는 사람 만나는데 자신감부터 달라지게 해요. 여차하면 돈을 쓸 준비가 돼있는 사람과 어떻게든 돈을 안 쓰려는 사람과 같겠어요? 아무래도 돈을 쓰는 쪽이 모임의 주도권을 잡죠. 돈이 없으면 찌그러져 있어야죠. 학창시절엔 싸움 잘하는 놈이 최고고 커선 돈있는 사람이 최고죠. 돈 없으면 많이 초라해요. 사람들 만나고 싶지도 않고.”
“친구들 사이에도 말은 하지 않지만 수입의 차이에서 오는 서로간의 조심스러움 있어요. 같이 술을 먹어도 신경쓰이죠. 경제적인 부분때문에 친구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 있어요.”
“남자에게 돈을 잘번다는 건 중요하죠. 사업하다보면 끼리끼리 모이는 경우를 많이 봐요. 돈 잘버는 사람끼리 모임을 갖게 되니까요. 동창들만 봐도 돈을 잘 버는 친구들이 모임을 주도하거나 직책을 맡게 되니까 돈을 못 벌면 의기소침해져요. 돈이 인성보다 우선시되는 경우 많이 보죠.”
얼마까지 벌어야 많이 버는 것인지야 사람마다 다르고 그 기준을 세우기도 어렵다. 어찌되었거나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고 적게 있는 것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돈, 과연 돈을 많이 벌면 남자들은 뭘하고 싶을까? 아니 우리는 돈이 많다면 뭘하고 싶을까? 돈을 많이 벌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돈 많이 벌면 외곽에 집을 짓고 싶어. 주위에 텃밭도 있고 서재도 있고 나만의 음악실도 갖고 싶지. 지금은 그럴 공간도 없지만 음악의 작은 소리까지 듣고 싶어서 좀 크게 들으면 아내가 시끄럽다고 그래. 뭐 꿈이지.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돈 많이 벌면 가장 하고 싶은 건 봉사에요. 진짜 돈 많이 벌어서 아버님 이름으로 고향에 장학재단 만들고 싶었는데 글쎄요. 현실적으로 힘들죠.”
“돈 많이 벌면 여행가고 싶어요. 잠시 다녀오는 여행말고 한 달 두 달 가서 맘껏 구경하고 생활하며 지내다 오는 그런 여행이요.”
“돈 많이 벌면 건물사고 싶어요. 안정적인 임대수입이 나오는. 거기에 작은 사무실 내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싶죠.”
평생을 돈과 싸웠던 아버지의 모습을 중년의 그들에게서도 느낀다
“요즘 많이 힘들어요. 요즘은 수입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무슨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죠. 다른 동종업계분들 만나면 다들 힘들다고 해요. 저도 애들 거 빼고 보험, 연금 해약했죠.”
“노후준비는 전혀 못해. 예전엔 보험도 들고 적금도 들고 했는데 지금은 다 해약했지. 집하고 병들 때 병원가는 것만 해결된다면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험, 적금 이런 거 못들죠. 저한텐 돈은 생존의 문제에요. 만약 복지가 스웨덴 수준으로 확대된다면 그래서 나와 가족들의 생존문제가 해결된다면 버는 돈의 절반을 세금 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어요.”
“7, 8년 전 만해도 만나는 사람들 80% 정도는 살만하다고 했어요. 근데 저도 그렇지만 지금은 만나는 사람 80%가 너무 힘들다고 그래요. 지금은 너무 안 좋아요. 힘들어요.”
돈을 잘 버는 것도 능력인건 분명하고 돈을 잘 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인 것도 분명하다. 돈이 많으면 사는 게 편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고 돈으로 안 되는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전통적 가장이라는 역할규정은 남자들에게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무감을 준다.
사회 속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남자들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평생 돈을 벌어야 한다는 굴레가 녹록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 평생을 돈과 싸웠던 아버지의 모습을 중년의 그들에게서도 느낀다.
“그래도 남자니까 일하고 돈 벌어야죠”라고 한결같이 말하는 그들이 삶이 너무 힘들지 않기를. 그리고 그들의 소원처럼 65세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도 되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숙정 객원기자
첫댓글 남자의 힘은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다가 정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