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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목요일. - 하느님을 보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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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을 보면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브라함을 모두 얘기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얘기이고,
복음은 그 아브라함이 보리라고 희망하며 즐거워했던
그분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서와 복음에는 ‘보는 것’과 관련된 표현도 나옵니다.
“나를 보아라.”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의 날을 보리라 즐거워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의 “나를 보아라.”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봤더니
먼 훗날 당신의 오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이렇게 추켜세우시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하느님을 보는 것을 묵상했는데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보면 땅만 보지 않고 하늘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자기만 보지 않고 꽃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우리나라만 보지 않고 다른 나라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그리스도교만 보지 않고 타 종교도 봅니다.
그러니까 여기만 보지 않고 저기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지금만 보지 않고 미래도 내다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절망만 보지 않고 희망도 바라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죄만 보지 않고 은총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죽음만 보지 않고 부활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하느님 말씀대로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기에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장소적 경계뿐 아니라
시간적인 경계도 넘을 수 있었고 미래 메시아 시대도 내다볼 수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런 경지를 얘기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마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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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리 올스만’이라는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강의할 때, 수업 첫날 수강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출하는 사진의 질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촬영한 사진의 양으로만 성적을 매긴다고 말했습니다. 즉, 100장 낸 학생은 A학점, 90장은 B학점, 80점은 C학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질’에 초점을 맞추라고 했습니다. 촬영한 사진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성적을 줄 것이기에, 단 한 장의 사진만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A 학점을 받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최고의 작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양에 치중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모두 나왔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실수를 반복했고 이 실수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재능을 익혀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분이 많습니다. 참 신앙인이 되고 싶은데 생각뿐이지 행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기도도 제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최고의 신앙만을, 그리고 완벽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별하고 놀라운 기적 체험을 통해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많이 하고, 하느님과의 만남 시간을 늘리는 사람만이 참 신앙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우리는 처음부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을 계속 실천하면서 최고의 사랑, 완벽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하나의 작품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 갇혀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힘주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 역시 자기만의 최고 가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양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만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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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말이 아니라 행동이 나를 대변할 것이다(존 플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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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함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4,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니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에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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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마음 둘 곳은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창조 이전에, 더더욱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따랐다기보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굳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 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시고 “자손을 많이 낳을 축복”을 허락하시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맺어주신 일방적 계약입니다. 하느님 측에서 본다면 손해를 보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둘 곳은 분명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 주님 말씀을 듣고 충실히 지켜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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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로 와서 몇 가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보일러에 가스가 새어나와서 새 보일러로 교체했습니다. 음식물 분쇄기가 고장 나서 새 분쇄기로 교체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누수가 있었고, 싱크대 바닥도 새것으로 교체했습니다. 37년 전에 크라운을 했던 안쪽 어금니도 통증이 있어서 치과에 갔더니 발치를 해야 한다고 해서 발치했습니다. 다행히 맨 안쪽이라서 새로 해 넣지는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형제님들과 대화하는 중에 사제관이 나의 군기를 잡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 중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제관이 신부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모양입니다. 덕분에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사제관이 저를 환영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습니다. 맞습니다. 세상 일, 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늘 걱정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의 짚신이 안 팔릴까 걱정이었습니다. 해가 나면 우산 장수 아들의 우산이 안 팔릴까 걱정이었습니다. 따뜻한 이웃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 장수 아들의 우산이 잘 팔리니까 좋지요? 해가 나면 짚신 장수의 짚신이 잘 팔리니까 좋고요.” 맞습니다. 생각하나 바꾸면 몸도 마음도 한결 편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들을 주었습니다. 느닷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어야 하나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저 따랐을 뿐입니다. 조카 롯과 함께 사는데 살림이 늘어나니 조카의 사람들과 자주 분쟁이 생겼습니다. 양들은 늘어나는데 땅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조카 롯은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척박하고, 모래가 많은 광야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조카 롯이 선택한 땅은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비록 기름지고 비옥했지만, 그곳에는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손님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생길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이 노래졌을지도 모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금쪽같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하였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군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을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특별히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분은 결혼하고 몇 년 후에 남편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우연히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남편은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남편은 몸은 깨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깨어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짜증을 내는 그런 남편을 23년간 수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남편만으로도 힘에 벅찬데 시어머니께서도 쓰러지셔서 한집에 2명의 중환자를 돌봐야 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도 10년 이상 돌봐드려야 했던 그 분은, 왜 하느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원망을 참 많이 했다고 합니다. 병중에 시어머니도 세례를 받아서 함께 묵주기도를 했지만, 원망과 고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품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남편도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조금 숨을 돌리나 했는데 이제는 본인이 암에 걸려서 큰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남편 복도 없었고, 시어머니 복도 없었는데 자신까지 암에 걸렸으니 정말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컸다고 합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와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십자가를 주셨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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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바람이 살랑거리며 부는데 벚꽃이 소리쳤습니다. ‘나는 벚나무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꽃이 없는 벚나무는 완전한 벚나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꽃으로서 벚나무는 벚나무라는 자신의 이름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벚꽃은 어디서 날아와 나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나무 안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러니 나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계심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이 계심으로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이 한마디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또한 영원한 하느님 안에 함께 계셨던 주님이기에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을 맞는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했더니 사람들은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그런데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찾아와서, 나는 세종대왕을 보았소, 이순신 장군도 보았고, 유관순도 보았소. 라고 한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모습을 지금까지 많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았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믿음에 큰 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 말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믿음의 길이 조금 더 견고해지길 빌어봅니다.
오늘 하루 나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봅시다. 보이는 곳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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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난다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자극할 수 없다.
-헤르만 헤세-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혹시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내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를 들어….
참여하고 있는 모임에서 누군가가 중심이 되려 하는 모습에 짜증 난다면 내가 중심이 되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자극하는 감정들은 많은 부분 우리 욕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내 감정을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내 욕구도 잘 살펴주세요. 그것이 내가 나와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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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480-547) 별세 축일-
떠남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수십년전 어느 목사님의 “신부님의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대한 즉각적인 답에 내심 만족했고 지금 또한 그러합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잘 떠남의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선물같은 삶에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이 청춘이면 몸도 청춘이 된다. 꿈과 열정이 사라지면 죽음이다.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소극적인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노령에도 뇌세포는 증식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 확실히 늙음은 나이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사는 동안 하루하루 진실히, 성실히, 절실히 살아야 하겠지만, 늘 떠남을 염두에 두고 늘 준비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잘 떠나는 뒷 모습은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추억으로 길이 남습니다. 이런 잘 떠남의 선물보다 이웃에게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 “꽃마다 반갑고 아름다운 것”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꽃마다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폈다지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인생이
그리도 반갑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살다 떠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는 인생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아, 꽃지므로 꽃 좋은 줄 알겠다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인 줄 알겠다.
짧은 인생
날마다 꽃처럼 반갑고 아름답게 살다 떠날 일이다.
내 영원한 고향
주님의 집을 향해”-2006.4
또 하나 “떠남의 여정”을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한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폭으로 또 넓은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떠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을 지냅니다. 성인의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고 우리들 또한 보고 배웁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평생 삶은 “떠남의 여정”으로 요약할 수 있고, 마지막 죽음의 떠남은 아름다운 떠남의 절정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거룩한 죽음이 아니라, 평소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제37장은 전부 성인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한 단락만 인용합니다.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병세가 날로 심해지자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았기에 주님의 전사다운 아름다운 선종입니다. 어디로 떠날지 모른다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선종이 가능하겠는지요. 어느 분이 아름다운 수의를 입은, 믿지 않았던 죽은 친구를 떠나 보내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문득 생각납니다.
“옷은 잘 입었는데 갈데가 없구나. 어디로 가나?”
오늘 성인의 별세 축일 미사전례중 말씀 배치도 떠남의 여정에 잘 맞춰져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인도하에 하느님의 복이 되어 떠나는 아브람의 모습이 정말 멋집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둔 아브람의 떠남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복이 될 것이다...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의 복이 되어 길을 떠나 떠남의 여정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니 제 나이와 같네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아브람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고별기도는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오늘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세상을 떠나기전 아버지께 바치는 유언과도 같은 느낌의 장엄한 고별기도가 소개됩니다. 1.자신을 위한 기도, 2.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3.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오늘 복음의 고별기도를 요약하면 믿는 이들 모두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떠나 보내시며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인 이 미사를 우리 인류에게 남겨 주심으로 아드님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성체를 영할 때 마다 속으로 불러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 177장 2절입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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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과 죽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삶은 하얗다
하얀 삶
이어서
하얀 죽음
죽어도 삶이다
죽음은 검다
검은 죽음
앞서서
검은 삶
살아도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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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신성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신성엔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만 있기에, 그분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도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탈출 3,1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심으로써 가까이 오시고 당신 생명을 완성하심으로써 떠나실 수 있었던 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셨습나니. 진리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시간 속에서 진리 이전에 생길 수 있는 것도 없고 시간 이후에 끝나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존재와 하느님을 경험하고 하느님 안에 있는 존재를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가 일치된 생명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딘가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둘로 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분법은 우리의 눈을 가려, 꽃 한 송이마저 마음껏 뽐내는 존재의 신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모든 이분법이나 대립은 지혜의 빛에 굴복하게 마련이다. 통합된 의식의 상태에서 모든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엑카르트가 분열된 사랑에서 통합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설교를 끝맺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유한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관을 가지고 순교자들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분열된 사랑에서 통합된 사랑으로 옮겨 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통일은 삶과 죽음의 통일, 현세와 내세의 통일,하느님과 우리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의 통일, 존재의 전체성,존재의 성스러움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그분 말씀의 합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지만, 존재는 끝이 없다. 존재는 영원한 하느님과 너무나 가깝다. 그것은 하느님만큼 거룩하고, 하느님과 너무나 닮아 았다. 우리가 존재와의 사랑에에 빠지기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 무엇도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 놓지 못한다.(140)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과격당원의 폭력사건
구당국도 군당국도 이 ‘진보사상’을 지지하는 것을 명예라 생각하고 만약 이 파티마의 종교 운동이 중지되지 않을 경우에는 엄한 억압 술책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선언하였다.
알쥬스트렐의 불쌍한 농민들은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제 정신을 잃고 그들의 평화를 휘저어 어지럽게 한 아이들에게 그 책임을 지우려 했다.
그 중에서도 루치아가 마을을 지나갈 때면 중오를 품은 조롱의 말을 여기 저기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야아, 우리의 벨라렛다님이다..."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는 심술궂은 폭언을 들으면서 점점,,더 열심히 고행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 애를 쓰고 힘을 다했지만 그들에게는 하늘에 계시는 사랑하는 친구님의 기대를 채워 드리지 못한다는 고통이 사람들이 던지는 욕지거리보다도 더 심한 고통으로 그들의 마음을 죄었다.
여기서 발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사명에서 생기는 온갖 희생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자기네들이 상상하는 성인, 또는 전에 성인들의 생활에서 찾아낸 고행을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끔 스스로 실행하는것이었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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