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를 만드세요
영어사전에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검색하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고 나온다. 버킷은 얼마 전까지 바께쓰라고 부르던 양동이나 들통을 말하는 것이고, 리스트는 명단이나 목록을 뜻한다. 그런데 두 단어의 조합에서 왜 이 같은 풀이가 나오는 걸까? 해서 좀 더 찾아보니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가 원래 ‘죽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속어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어 놓고 발밑에 놓인 양동이를 걷어찬 데서 나온 것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수용소장 아민 괴트를 교수형에 처할 때 발밑의 나무로 된 받침대를 걷어차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필자의 두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처럼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를 많은 사람이 챙기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도 누구나 양동이를 걷어차기 전에, 즉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제목이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나온 영화 <버킷 리스트>는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두 사나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가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아온 카터 챔버스(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우연히 중환자실에서 만난다. 카터의 어릴 적 꿈은 역사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감과 흑인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TV쇼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 반면 에드워드는 자수성가해 전용 비행기까지 갖게 됐지만 세 번의 결혼 실패로 딸에게조차 잊힌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른바 성공한 만큼 외로움의 빈자리도 큰 사람이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스카이다이빙하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카레이서 되기 등 소원을 이루어나가
는 주인공들.
이 두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면서 의기투합한다. 급기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적은 버킷 리스트를 들고 병원을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스카이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키스하기,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나날을 보낸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 혹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미리 하지 않은 사실에 후회하고 그것들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라는 데 또 한 번 절망한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살면서 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명인사들이 갑자기 현직에서 사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3월 애플의 재무최고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는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1996년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430억원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즉 버킷 리스트와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구글의 CFO 패트릭 피체트 역시 52세때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럼 이렇게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까? 아니다. 평범한 사람 누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2014년 6월 EBS의 <장수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가르칠 정도가 됐고 동네 향교(鄕校)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祭官)으로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은퇴를 걱정하느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오늘을 놓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자. 영화 속 이야기이기는 해도 6개월 시한부 인생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은퇴 후 가족과 세계여행하는 패트릭 피체트(전 구글 CFO)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부인과 촬영한 사진.
<사진출처 www.pichette.org>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하나인 요기 베라는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니까!(It ain’t over till it’s over)” 그의 말처럼 설사 은퇴했다고 하더라도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은퇴(retire)’란 말 그대로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는 것(re-tire)일 뿐이다. 9회 말을 지나 잠시 배트를 놓고 글러브를 벗었지만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정식 리그가 아니라 동네 야구일 수도 있지만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골프에서의 성패 역시 18홀을 끝내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버킷 리스트는 살아 있고 거기다 뭔가를 적어 넣을 여백과 그 리스트를 실행할 용기 또한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떠올려보자. 선생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큰 슬픔을 당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누구보다도 불행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뒤에 숨지 않았다. 불행에 이은 고독과 병마를 <토지>와 같은 불후(不朽)의 작품들로 바꾸어 우리에게 남겼다. 말년에는 원주로 내려가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얼마 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선생의 버킷 리스트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버리고 갈 것만 남은 홀가분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글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태그: 라이프 , 버킷리스트 , 부부 , 은퇴
연관키워드: 가족, 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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