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야국 安邪國
古代史(고대사)地名(지명) 三韓(삼한)時代(시대) 弁韓(변한)의 小國(소국).弁韓(변한) 12小國(소국) 中(중)의 하나이다.
定義(정의)
三韓(삼한)時代(시대) 弁韓(변한)의 小國(소국).弁韓(변한) 12小國(소국) 中(중)의 하나이다.
內容(내용)
지금의 慶尙南道(경상남도) 咸安(함안)地方(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批正(비정)된다.
《三國史記(삼국사기)》·《三國遺事(삼국유사)》·「광개토왕비 廣開土王碑」에는 아시라(阿尸良)·아나(阿那)·아라(阿羅)·안라(安羅) 등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支石(지석) 墓群(묘군)이 分布(분포)되어 있는 咸安郡(함안군)內(내)의 咸安面(함안면)·군북면·가야면 등지에는 靑銅器時代(청동기시대) 이래 獨自的(독자적)인 政治集團(정치집단)들이 多數(다수) 形成(형성)되어 있었으나 이들이 안야국으로 統合(통합), 發展(발전)되는 時期(시기)나 文化(문화)背景(배경)에 대해서는 具體的(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안야국은 弁韓(변한) 小國(소국)들 中(중)에서도 신지(臣智)가 ‘안야척지(安耶踧支)’라는 우호(優號)를 稱(칭)할 정도로 有力(유력)한 勢力(세력)을 가진 小國(소국)이었으며, 隣近(인근) 弁韓(변한) 小國(소국)을 統合(통합)하여 3, 4世紀(세기) 以後(이후) 6世紀(세기) 前半(전반) 新羅(신라)에 倂合(병합)되기까지 洛東江(낙동강) 支流(지류)인 南江(남강) 中(중)下流(하류) 一帶(일대)를 支配(지배)하는 아라가야국(阿羅加耶國)으로 成長(성장), 發展(발전)하였다.가야면에는 伽倻國(가야국)時代(시대)의 巨大(거대)한 古墳(고분)遺跡(유적)들이 集中(집중) 分布(분포)되어 있어 當時(당시)의 强力(강력)한 勢力(세력)規模(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參考文獻(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이현혜,일조각,1984)『가라사상(加羅史上)의 제문제』(이병도(李丙燾),韓國(한국)古代史(고대사)硏究(연구),박영사,1976)「삼한문제(三韓問題)의 硏究(연구)」(이병도(李丙燾),『韓國(한국)古代史(고대사)硏究(연구)』,박영사,1976)「伽倻(가야)地域(지역) 先史(선사)文化(문화)의 變遷(변천)」(안춘배,『韓國(한국)考古學譜(고고학보)』 12,1982)『大正六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대정6년도조선고적조사보고)』(今西龍(금서룡),1917)
伽倻(가야)의 歷史(역사)와 文化(문화)
① 전기 가야 연맹
가야의 성립과 발전.
가야에 관한 문헌으로는 고려 문종 때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이를 발췌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전해 오고 있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가야, 가라, 가량, 가락, 구야, 임나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야는《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 12국에서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악노국(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 함안), 고령가야(高寧伽耶 : 함창, 진주), 대가야(大伽耶 : 고령), 성산가야(星山伽耶 : 성주), 소가야(小伽耶 : 고성), 금관가야(金官伽耶 : 김해), 비화가야(非火伽耶 : 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는데 이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의 변한 지역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는 초기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금관가야가 위치하고 있는 김해지역은 일찍이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 세력들이 여기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중국의 군현 및 왜 등과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중국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내륙지역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낙랑군, 대방군의 소멸과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가야연맹도 커다란 변동을 겪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왜, 가야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보기(步騎)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 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다음 임나가야의 종발성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을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의 여러 가야국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쇠잔했으며, 일부 세력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전기 가야연맹도 와해되고 말았다.
② 후기 가야 연맹
전기 가야 연맹체가 해체된 후 가야세력은 5세기 후반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다. 고령지역은 내륙에 위치하였기에 고구려 군 침입 때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세력의 성장을 알려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대가야는 점차 경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가야국가들을 포함하면서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가야연맹이 결성하였는데, 이것을 금관가야가 주도한 가야연맹을 구분하여 후기 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동국여지승람》<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대가야의 시조설화가 전하는데 이것은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설화에 따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신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한다. 고령의 대가야왕의 시조인 이진아시의 '아시'는 알지(閼智), 하지(荷知)와 같이 대수장(大首長)이란 뜻이고,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한 것은 전기가야연맹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가야가 부상하고 있을 때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두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전략상 가야의 협조가 필요로 하였다. 481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지역에 침입하여 호명(호명) 등 7성을 취하고 미질부(彌秩夫 : 현 포항시 홍해읍)로 진격할 때, 가야군은 백제군과 함께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군을 격파한 적이 있다. 이 무렵 대가야는 소백산맥을 넘어 전북 임실, 남원을 일시 점령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6세기 초반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대가야의 성장은 방해를 받게 되었다. 510년 백제는 대가야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경남 하동, 거창 등을 위협하였고, 대가야는 522년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신라의 법흥왕은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가야왕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부체제를 굳건하게 정비한 다음, 서쪽 가야지역으로 무력진출을 적극 꾀하고 있었다. 결혼동맹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결국 532년 지속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어 대가야를 위협하였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백제와 왜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554년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 · 가야 · 왜 연합군이 관산성(管山城 : 옥천)에서 신라군에 대패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은 555년 창녕지역에 비사벌정(比斯伐停)을 설치 하여 중앙군단을 주둔시키고 가야정벌을 본격화하였다. 그리하여 562년 이사부(異斯夫)가 신라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대가야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③ 가야의 멸망원인
700년 가까이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라와 대등하게 발전하던 가야가 어째서 쉽사리 멸망하였을까? 가야의 멸망 원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야 지역의 소국들은 농업 및 해운 집지조건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 있어서 소국간에 비교적 고른 문화 축적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 중의 어떤 하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탁월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 4세기의 국제정세 변동을 거치면서 4세기 말에 한반도 북부의 강국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가 낙동강 유역까지 쳐내려왔는데, 이는 가야가 발전하는 맥을 한동안 끊어놓았다.
셋째, 가야는 주변의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기존의 맹주국이 주변 소국들을 일원적으로 영도해 나가는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늦었다. 그래서 대외관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넷째,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의 우월성에 있었으나 5세기 말 이후에는 왜가 철광산 개발에 성공하고 6세기 이후 백제가 왜와 직접 통교하기 시작하면서 왜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이 약해졌다.
위에 말한 네가지 요인이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가야가 멸망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고분을 통해 보는 가야.
가야 유적과 유물들은 대개 고분 및 그 내부의 부장품 형태로 남아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하여 문헌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아는 데에 가야 고분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 고분군은 대체로 주거지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는 나지막한 뒷산의 정상부나 구릉 사면에 조성되어 있다.
가야의 옛 고분들이 모두 왕족이나 귀족층의 것만 있는것은 아니나 많이 남은 것은 역시 유력자들의 무덤이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무덤 안에 생전에 쓰던 물건들을 함께 넣은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야 고분은 가야 문화및 역사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준다.
가야의 고분에 관해서는 1970년대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김해 양동리·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등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유적에서 확인된 내부 묘제는 목관, 목곽, 석곽, 석실 등이 있다. 이들 묘제는 널무덤, 넛널무덤, 움식 돌덧널무덤, 굴식 돌방무덤의 순으로 변천되었다. 그 중에서 널무덤과 덧널무덤은 주로 4세기 이전 전기 가야시대의 주요 묘제였고, 움식 돌덧널무덤과 굴식 돌방무덤은 주로 5세기 이후 후기 가야시대의 묘제였다.
이들 고분 중 김해 대성동 2호분과 함안 도항리 4호분, 고령 지산동 44호분등을 통해 가야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겠다.
① 김해 대성동 2호분 (덧널무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3~4세기의 고분군으로서 전기 가야 전성기의 문화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대성동 2호분을 살펴보면 봉토는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땅 속에 길이 8.4m, 너비 4.3m, 깊이 1.5m의
묘광에 대형 목곽으로 주실이 설치되었고, 그에 세로로 접하여 길이 3.3m, 너비 4.2m, 깊이 0.8m의 부곽이 설치되었다. 그 안의 부장품에 꽉 들어차 화로형 기대와 양이부 단경호등의 토기류, 철제 갑옷및 투구, 마구, 철제무기, 철 제련 관련 유물, 구슬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대성동 2호분은 김해 지방을 통틀어 가장 대형의 것이고 출토 유물의 수준도 매우 높아서 4세기 후반 당시 김해 지방 최고 지배자, 즉 가락국 왕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성동 고분들에서 출도된 바람개비형 청동기와 방추차형 석제품 등은 일본제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김해 지방과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해시에는 가야 문화 중심 박물관인 국립 김해박물관이 있으나 그와 별도로 대성동 고분박물관을 지어 그 유물을을 전시하고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유물
② 함안 도항리 4호분 (움식 돌넛널무덤)
함안 도항리 4호분은 함안군 내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서, 봉토의 높이는 10m, 직경이 40m에 달하며 그 내부에 반지하식으로 길이 9.6m, 폭 1.7m, 높이 1.6m의 긴 장방형 석곽이 있다. 유물로는 철제 갑옷, 무기, 마구 등과 함께 고배를 위주로 한 토기류가 있다.
도항리 4호분은 묘제 및 토기 형식으로 보아 5세기 중엽 또는 후반에 해당되는데 토기 중에서도 화염형투창 고배는 함안 지방에 전형적인 것이며 이단직렬 세장방형투창 유개고배도 대각부가 좁고 길며 장방형투창도 길어서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 고분은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출토된 철기나 장신구 등이 빈약한 느낌을 준다. 이는 함안 지방에 철 생산이 풍부하지 않았떤 결과가 아닌가 하며, 함안 안라국(아라가야)의 최대 약점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함안군에서는 군내에 아담한 함안박물관을 만들어 함안 각지의 가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함안 도항리 고분군 출토유물
③고령 지산동 44호분 (움식 돌넛널무덤)
대가야는 5세기 말엽에 이르러 상당히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고령 지산동 44호분은 그 시기 대가야의 문화 능력을 보여준다. 지산동 44호분은 봉토 직경 25m, 높이 6m에 달하는 원형 봉토분이다. 봉토 안에는 석곽 길이가 9.4m 내지 5.1m에 이르는 대형의 세장형 수혈식 석곽 3개가 중앙에 놓여 있고, 그 주위에 길이 2m 정도의 소형 수혈식 석곽들이 빙 둘러 부장되어 있다. 이미 두 차례 이상 도굴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서 철제 큰칼과 금귀걸이, 검릉형 말띠드리개, 미늘갑옷 등의 금속제 유물과 사발형 그릇받침, 이단직렬 장방형투창, 뚫린 뚜껑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특히 32기의 소형 석곽에서는 순장 인골이 출토되어, 당시 가야 왕권의 강력함과 아울러 그 통치권의 성격을 짐작케 하고 있다. 즉 18기의 순장곽에서 22개체의 순장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구성은 7~8세 부터 50세에 이르는 남녀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모시던 왕의 사후 생활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듯하다. 또한 봉토 바닥의 한쪽에 말의 치아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말도 순장했다고 추정된다.
장신구나 부장품은 도굴의 영향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금, 은으로 장식한 마구와 무기, 온갖 종류의 장신구와 갑옷과 투구, 금동제의 금속 용기 등을 갖추고 있으며, 오키나와 산 야광패 국자와 간이 외래의 위세품도 갖추었다. 이로 보아 고령 지산동 44호분의 피장자는 부와 권위를 모두 갖춘 5세기 말엽 대가야의 왕이었다고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고령 지산동 44호분은 그 고분군 앞에 건설된 대가야 왕릉 전시관에서 그 내부 구조를 거의 그대로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출토유물
첫댓글 이승철 ~ 일 2021-01-03 오후 5:57 ~ 새로운 자료 잘 봤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