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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에 관하여 글이 아주 깁니다.
24일에 일일이 검토하지 않고, 아주 짧게 말씀드리고, 그냥 넘어갈 예정입니다.
한 번 읽고 오십시오,
프랑스
<살롱> 문화
<살롱(Salon)>
어느 시대나 문화의 흐름을 선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즐기고, 음악회를 가지거나 그림을 감상하고 새로 유입된 신문화를 먼저 접하며 앞선 문화를 향유했다.(그래서 폼도 잡고) 프랑스의 살롱이나 우리나라의 사랑방과 규방은 이러한 문화공간의 대표적이 예이다.
살롱(Salon)은 유럽의 고급문화가 탄생하고 교류하는 공간을 제공한 핵심적인 문화 커뮤니티였다.
기원전 4 ~ 5세기 그리스 아테네의 젊은 귀족들은 스포츠클럽을 만들어 몸과 마음의 정신력을 일깨웠다. 그리고 동시에 지적인 문화 모임을 가졌다. 플라톤도 포도주를 즐기면 담론과 토론을 했다.
그리스 때에 아스파지아는 해박한 지식과 재치있는 언변을 가졌던 아름다운 여성인데, 그녀의 모임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토론의 장을 펼쳤다.
이 전통은 로마시대는 플라자와 포름으로, 르네상스 시대는 무젠호프로, 그리고 프랑스에서 살롱이 되었다.
앙리 4세가 종교분쟁으로 귀족들의 거칠어진 품성을 순화하기 위해서 궁정에 귀족부인과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러한 궁중 문화가 귀족사회로 확산하였다.
귀족 부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자기 집 객실을 문화계 명사들에게 개방, 식사를 제공하면서,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 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던 풍습. 즉, 살롱은 중세 유럽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싹튼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본격적인 살롱은 역시 개성의 자유와 여성 지위의 향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르네상스기(期)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에서 17세기 초에 꽃피었다.
피비린내나는 종교전쟁을 거쳐 거칠어진 귀족들의 기질을 우아한 여성들과의 사교로 누그러뜨리면서, 예절과 말씨를 세련시키고자 프랑스왕 앙리 4세가 궁정 안에 살롱을 개최한 것이 그 시초이다.
*랑부이에 후작 부인
그 후 살롱은 궁정으로부터 귀족들의 저택으로 옮아갔으며, 이탈리아 출신인 랑부이에 후작부인(Madame de Rambouillet)이 열었던 프랑스 최초의 개인 살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재상 리슐리외를 비롯한 정치가들과 말레르브나 코르네유 등의 시인이 그 단골 손님이었다
남다른 지성과 예술적 재능을 겸비했던 그녀는 1608년 18개의 큰 의자와 커다란 병풍을 비치해 놓고 손님들을 초대했다. 당시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의 살롱에 모여 만찬을 들며 무용, 음악, 철학, 역사 등 주제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생각들을 내놓으며 열띤 토론의 장을 만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획기적으로 발전되고 있던 과학도 살롱의 주제가 되었다. 천문, 물리, 화학, 자연학, 의학 등이 살롱에서 다루어지면서 이러한 학문의 발전에도 살롱이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로 많은 살롱이 프랑스에서 생겼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흄 등 당대 가장 뛰어난 사상가, 문학가들을 포함한 유럽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롱에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발표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살롱의 주재자는 저술가나 출판업자들과 연결하여 희귀본 책자들을 구하여 살롱에 온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지적 수준을 높이고 계몽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랑부이에 후작부인(Madame de Rambouillet)이 열었던 프랑스 최초의 개인 살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재상 리슐리외를 비롯한 정치가들과 말레르브나 코르네유 등의 시인이 그 단골 손님이었다.
살롱은, 모랄리스트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어 잠언 ·인물묘사(포르트레) 같은 독특한 문학 장르를 낳음으로써 명석함과 절도가 특징인 고전주의 문학의 형성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라로슈푸코의 《잠언》, 라퐁텐의 《우화시》는 그 직접적인 소산들이고, 레스의 《회상록》, 세비네 부인의 《서간집》, 라파예트 부인의 《콜레브공(公) 부인》 등도 살롱이 낳은 특이한 작품들이다.
또한 살롱에서는 각종 연극과 음악회, 전시회 등이 개최되었다. 살롱은 지식인들과 훌륭한 연주가와 작곡가 그리고 미술가들을 연결시키는 문화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문예진흥에도 큰 역할을 담담했다.
이렇듯 살롱은 유럽의 정신을 상징하고 구체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생산적인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고 예술을 향유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현대 문화사와 지성사에 큰 역할을 한 문화 커뮤니티였다.
한편 살롱의 세련된 취미는 그 도를 넘어서게 되어 이른바 프레시오지테(선멋)로 흘러 몰리에르의 《선멋 부리는 여자들》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18세기에는 랑베르 부인, 탕생 부인, 조프랭 부인, 에피네 부인 등의 살롱이 유명했으나, 신흥계급인 부르주아층 부인들도 차차 살롱을 열기 시작했고 또 남성이 주최하는 살롱도 나타나게 되었다.
19세기부터 살롱은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살롱문화가 수그러들고 계몽주의 시대가 지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후, 카페(Café)는 살롱의 뒤를 이은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유럽의 문화를 이끌어 갔다. 카페는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탁자 앞에 두고 수많은 시인, 화가, 철학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담론을 나누고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파리의 한 카페에서 20세기에 길이 남을 명저를 집필했으며,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현대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이런과 쇼펜하우어는 이탈리아의 한 카페에서 처음으로 만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고, 상드와 쇼팽, 리스트 등도 테라스에 않은 다른 작가, 화가들과 함께 담론 나누기를 즐겼다.
니체, 모네, 푸르스트, 괴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카페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고 작은 모임을 가졌으니 카페가 유럽문화에 미친 영향력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 카페 프로코피오
1682년에 역사적인 카페 ‘프로코프(Procope)’가 문을 열었다. 프로코프라는 이름은 이 카페를 처음 연 이탈리아 출신 주인의 이름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에서 따온 것이다. 프랑스의 희극 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가 프로코프 근처로 옮겨오면서 ‘카페 프로코프(Café de Procope)’는 예술인과 문학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된다.
디드로, 라신, 루소, 보마르셰, 볼테르, 로베스피에르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극작가나 계몽사상가들이 이곳의 단골손님이었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미국헌법을 고안하고 가다듬은 곳도 ‘프로코프 카페(Café de Procope)’였다고 전해진다.
카페는 개개인이 문화를 향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온갖 소식과 정보가 모이고 고급담론의 중심지가 되다 보니, 이탈리아의 카페 ‘플로리아’에서는 이탈리아 최초의 신문 <가제타베네타>가 창립되기도 했다. 피카소와 아폴리네트 등 여러 화가와 시인들이 손을 잡고 카페 ‘폴로르’에서 문예지 <파리의 저녁>을 창간했으며, 앙드레 지드가 중심이 되어 출간한 <신프랑스 평론>도 이곳에서 창간했다.
이렇듯 ‘살롱(Salon)’과 ‘카페(Café)’는 훌륭한 인문학자들과 예술가, 과학자 등 영향력 있는 명사들이 함께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며 문화 커뮤니티로써 유럽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술계에서 사용되는 ‘살롱(Salon)’의 의미
미술계에서 흔히 말하는 ‘살롱(Salon)’의 의미란 처음에는 문인들과 함께 미술가들도 모여 그 작품을 공개, 감상 비평하던 것이, 나중에는 많은 작가들이 출품하는 정기적 미술전람회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대표적인 살롱으로는 ‘살롱데쟁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 ‘살롱데튈르리(Salon des Tuileries)’ ‘살롱드메(Salon de mai)’ ‘살롱도톤(Salon d’automne)’ ‘살롱데레알리테누벨(Salon des réalités nouvelles)’ 등이다.
‘살롱데쟁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은 관선 단체인 ‘프랑스 미술가협회’에서 해마다 5∼6월에 열리는 살롱의 아카데미즘에 불만을 품은 진보적 미술가들이 1884년에 ‘독립미술가협회’를 조직, 무감사제의 전람회로서 출발한 것으로 해마다 봄에 열린다.(낙선자전)
1923년에 창설된 ‘살롱데튈르리(Salon des Tuileries)’는 매년 가을에 열리며, 루오 ·블라맹크 ·뷔페 등이 그 출품작가이다.
매년 5월에 열리는 ‘살롱드메(Salon de mai)’는 항독(抗獨) 운동에서 싹터 1945년에 제1회전을 가졌으며,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비롯한 전위작가들이 모이는 초대전으로 마티스 ·로트 ·비용 같은 대가들도 출품해왔다.
가을에 열리는 ‘살롱도톤(Salon d’automne)’은 1903년에 비롯되어 야수파 ·입체파의 온상이 되었으며, 그림 외에도 조각 ·건축 ·판화 ·무대장식 등의 부문도 들어 있다. 브라크 ·피카소 ·마르샹 등이 출품했던 곳이기도 하다.
‘살롱데레알리테누벨(Salon des réalités nouvelles)’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추상파 미술가들의 전람회로 외국 작가들도 참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1667년에 콜베르가 기획해 팔레롸얄의 안마당에서 생존 작가들의 그림을 일정 기간 동안 전시한 것이 최초의 살롱이다. 아카데미 주최의 이 전람회는 1697년에 루브르궁의 그랑 갈르리로 옮겨졌으며 루이 14세 치하에 10회 가량 열렸으나 출품이 부진해 명맥만 이어오다가, 루이 15세 치하인 1725년에 이르러 루브르궁의 살롱 카레에서 본격적인 관전(官展)으로 부활했다, 1737년 이후 본궤도에 오르면서 대규모 살롱(Le Salon)으로 발전하여 1773년까지 전후 25회를 거듭함으로써 미술발표기관으로서의 살롱의 기능을 확립해 놓았다.
살롱 데 자르티스트 프랑세(Salon des Artistes Français)는 프랑스 미술가 전(展)이라는 의미의 관선 미전(美展)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살롱이다. 보통 ‘르 살롱(Le Salon)’이라고 한다.
1664년 루이 14세에 의해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Acad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창설되고 이 아카데미 산하에는 미술학교와 전시회가 공식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것이 훗날의 ‘에콜데보자르(Ecole des Beaux- Arts, 미술학교)’와 ‘르 살롱(Le Salon, 미술 전시회)’의 전신이다.
1789년의 대혁명을 계기로, 살롱은 그 민주화가 선언되는 등 기구나 장소의 변천은 있었으나, 미술가들과 시민을 맺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서 19세기 중엽 이후까지 존속되어 근대적인 미술비평의 온상 구실을 함으로써 그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 하겠다.
그러나 엄격한 심사제를 견지한 살롱의 관료적인 아카데미즘은 진보적인 미술운동을 외면함으로써 미술 발전의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비난도 사게 되어, 마침내 1883년에는 출품자 중에서 뽑힌 90명이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개편, ‘프랑스 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Franais)’의 살롱으로 변신되어 매년 봄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만족하지 못한 진보파들은 다시 1884년에 ‘독립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를 조직하고 무감사제인 ‘살롱데쟁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살롱문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마담(Madame)’이 있었다. 그 중 이름난 살롱을 주관했던 귀부인들은 '그랑 담(Grand Dame)'이라고 불렀다. 보통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귀족부인들이 살롱을 주관했는데, 살롱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철학이나 문학, 예술을 논하는 토론의 장소였고 젊은 학자들이 지배층과 사교를 통해 인맥을 형성하거나 사회적 계급이동을 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역할도 했다.
많은 아카데미 프랑세스(프랑스 한림원) 회원을 배출했던 ‘랑베르 부인(Marquise de Lambert, 1647-1753)의 살롱’이나 계몽운동시기 자연철학자나 수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백과전서파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어 ‘백과전서파의 실험실’이라고 불렸던 ‘레삐나스 부인(Julie de Lespinasse,1733-1776)의 살롱’ 등은 특히 유명했던 살롱이다.
(*랑베르, *레뻬나스)
*** 랑베르 부인(Madame de Lambert)의 살롱
후에 랑베르 부인이 된 테레제 드 쿠르셀(Thérèse de Courcelle, 1647-1733)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스스로 시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를 당시 유행하던 프레시외한 언어와 우아한 사교모임으로 이끌어주었던 것은 그녀의 아버지로, 그녀가 살롱을 연 것은 1710년, 남편 랑베르 백작이 죽은 이후였다.
그녀는 랑부이에 살롱의 전통을 이어받아 궁정 밖에서 지성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그녀는 이전의 살롱이 보여주었던 가식적인 언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두었고, 화요일마다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이 그녀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랑베르 부인(Madame de Lambert, 1647-1753).
결혼 전 이름은 ‘Anne-Thérèse de Courcelle’였으며 1607년 루브르 궁전과 가까운 곳인
랑베르 백작부인 집에서 시작된 랑베르 살롱(Hôtel de Rambouillet)은 최초의 문학살롱 이었다.
그녀의 살롱이 17세기의 살롱들과 구별되는 점은 이전에는 없었던 건축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배우들 같은 예술가들의 참여였다. 사회에서 아직은 천한 신분이었고, 작가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던 예술가들을 위해 그녀는 화요일 오후를 할애하였고, 함께 학문과 예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귀족이나 왕족들을 맞아들여 그날 일어난 일이나 정치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최초의 문학살롱으로 꼽히는 랑베르 살롱에는 ‘문화살롱(bureau d'esprit)’이라는 명칭이 붙여졌고, 멜쵸아 그림, 마리보, 몽테스키외 등이 그녀의 살롱을 출입하였다. 그곳에서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새로운 것과 고전에 대한 논쟁이 풍부하게 이루어졌고, 이로써 그녀는 고전주의와 계몽주의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랑베르 살롱이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caise, 프랑스 한림원)에 미친 영향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랑베르 부인이 아카데미 회원의 선정에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그녀의 살롱은 ‘아카데미의 대기실(antichambre de l'Académie)’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랑베르 부인의 살롱에 드나드는 손님들 중에는 아카데미 회원들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얻은 정보로 랑베르 부인은 회원선발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살롱이 17세기의 살롱들과 구별되는 점은 이전에는 없었던 건축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배우들 같은 예술가들의 참여였다. 사회에서 아직은 천한 신분이었고, 작가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던 예술가들을 위해 그녀는 화요일 오후를 할애하였고, 함께 학문과 예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귀족이나 왕족들을 맞아들여 그날 일어난 일이나 정치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최초의 문학살롱으로 꼽히는 랑베르 살롱에는 ‘문화살롱(bureau d'esprit)’이라는 명칭이 붙여졌고, 멜쵸아 그림, 마리보, 몽테스키외 등이 그녀의 살롱을 출입하였다. 그곳에서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새로운 것과 고전에 대한 논쟁이 풍부하게 이루어졌고, 이로써 그녀는 고전주의와 계몽주의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랑베르 살롱이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caise, 프랑스 한림원)에 미친 영향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랑베르 부인이 아카데미 회원의 선정에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그녀의 살롱은 ‘아카데미의 대기실 (antichambre de l'Académie)’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랑베르 부인의 살롱에 드나드는 손님들 중에는 아카데미 회원들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얻은 정보로 랑베르 부인은 회원선발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 탕생 부인(Madame de Tencin)의 살롱
탕생부인(Caludine - Alexandrine Guérin de Tencin, 1682-1742)은 어린 시절 수녀원으로 보내졌고, 이미 그곳에서도 그녀의 성찰력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은 후 수녀원에서 나온 그녀는 언니 페리올 부인(Madame de Ferrio) 댁에서 궁정과 프랑스의 사교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알게 되었다.
장교와의 짧은 관계로 얻은 아이가 그 유명한 백과전서파의 창설자인 쟝 밥티스트 르 롱드(Jean-Baptiste Le Rond), 일명 ‘달랑베르(d’Alembert)’였다. 그러나 그녀는 갓난아이였던 달랑베르를 버렸고, 달랑베르는 평생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달랑베르(D'Alembert)는 계몽사조기(啓蒙思潮期)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과학아카데미 회원인 동시에 종신서기(終身書記)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공(公) 시대에 사교계의 꽃으로 저명한 살롱을 운영했던 탕생 후작부인(Madame de Tencin)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생후 곧 노트르담 성당 옆의 작은 교회 계단에 버려졌는데 근처에서 살던 유리 직공 달랑베르의 아내가 주워다 길렀다. 그의 이름은 그가 20세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달랑베르는 평생 어머니인 탕생 부인(Madame de Tencin)을 용서하지 않았고 한다.
그의 친아버지인 데투시 장군은 그를 경제적으로 돌보았고,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남겼으며, 또 장군의 유력한 친지가 그를 비호하며 23세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12세 때 콜레즈 드 카틀 나시옹에 입학하여 신학, 법률,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 철학, 수학, 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특히 역학(力學)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서 <역학론, Traite de Dynamique>은 26세 때 공간(公刊)한 것인데, 이 저서에서 그는 당시에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주의를 배척하고, 물체와 그에서 독립된 공간을 생각하는 뉴턴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달랑베르의 원리’를 발표하여 해석역학으로의 전개를 마련함으로써 역학발전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는 사상가로서도 계몽사상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디드로(Diderot)와 공동으로 편집 간행한 <백과전서>는 유명하다.
(**백과전서파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 Encyclopedistes)’는 프랑스에서 ‘백과전서’의 집필과 간행에 참여한 계몽사상가의 집단을 칭한다. 이성을 주장하고 신학,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보였기 때문에 발행금지 등 당국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일류 계몽사상가들의 집필로 1751년에 제1권이 출판되고, 이어 1772년까지 11권의 대사전이 완성되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계몽사상가 및 학자들인 ‘백과사전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A.투르고,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케네 등이 있다.)
그녀의 살롱에서는 새로운 작품들이 소개되었고, 작품이 낭독을 통해 발표되면 방문객들은 문학작품의 생산에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마르몽텔(Marmontel)의 비극 아리스토멘느(Aristomène)로, 그는 발표하기 전에 모임에서 먼저 이 작품을 상연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문학에 대한 호기심은 충족되었고, 동시에 살롱은 문학 생산체계의 기구로 인정을 받고 그 조정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었다
탕생부인의 살롱에는 프랑스의 다양한 층의 지성인, 성직자, 귀족들 이외에도 외국인들 중에는 영국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체스터필드 경(Lord Chesterfield), 볼링브로크 경(Lord Bolingbroke), 그리고 작가이면서 외교관이었던 매튜 프라이어(Mathew Prior) 등이 친구들에게 탕생부인을 소개했고, 이로써 그녀의 살롱은 최초로 전 유럽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죠프랭 부인(Madame de Geofrin)의 살롱
탕생(Tencin)부인의 살롱을 물려받으려고 준비한 사람은 여러 해 그녀의 살롱을 드나든 죠프랭 부인(Madame de Geofrin) 이었다. 이를 통해 탕생 살롱이 계속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연속선상에서 한 가지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죠프랭부인(1699-1777)은 유명했던 살롱 여주인들 중에 유일하게 교육을 받지 못한 시민계급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더 이상 계급을 내세운 사교생활이 아닌, 문학살롱을 꾸려나가는 주최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탕생부인의 살롱이 문을 닫은 후 1750년에 생트 오노레가에 살롱을 열었다. 물론 이 뒤에는 공장주였던 남편의 경제력이 바탕이 되었다. 그녀의 살롱은 가장 잘 조직화된, 가장 잘 꾸려진 살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매주 2회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을 모이게 하였다. 월요일에는 반 루(van Loo), 부셰(Boucher), 라 투르(La Tour), 위베르 로베르9Hubert Robert) 같은 화가나 조각가인 보샤르동(Bochardon), 건축가인 수플로(Soufflot), 코솅(Cochin), 팔코네(Falconet), 그리고 고고학자들이 살롱에 모였다.
수요일 모임과는 달리 이 모임에는 살롱 여주인과 레스피나스양(Lespinasse)을 제외하고는 여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수요일에는 마리보, 그림, 마르몽텔과 백과전서파에 속하는 철학자들, 즉 달랑베르, 헬베티우스, 홀바흐와 문필가들이 모였다.
그녀는 화가들의 그림들을 비싸게 사들이기도 했는데, 살롱은 그녀에게는 자유로운 사고를 장려하는 곳인 동시에 개인적인 교양을 쌓는 교육장소이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그녀의 살롱이 가진 예술 지향적인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어제 헤밀튼의 토속적인 항아리와 라 샤프의 프랑스화 된 시베리아인, 바케리어의 꽃과 피갈레의 여인 두상을 전시했다. 그런 전시회는 정신의 자양분과 자극이 되며, 미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키고 바로잡게 한다. 전문가는 그런 모임의 평가를 통해 훈련을 하고, 찬사는 예술가들을 고무시키기도 한다. 처음 온 사람은 이곳에서 시간의 낭비나 외국인 안내자 없이, 사교의 기쁨을 즐기면서 수업을 받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살롱에서 사교의 형태를 미학적으로 만들고 확장시키기 위해 봉건적인 권력의 중심을 상징하는 남자들이 뒤로 물러나 있었듯이, 죠프랭의 살롱에서도 가장의 존재는 무시되었고 무의미했다. 항상 침묵하고 있었던 그 손님이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돌아가신 남편이라고 대답했다는 죠프랭부인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는 이미 탕생부인의 살롱을 드나들면서 귀족적인 사교문화를 익혔기 때문에, 자신의 문학 살롱에서도 이를 실행하려고 했다. 특정한 대화의 주제, 특히 정치적인 주제는 제외되었고, 이런 주제로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죠프랭 부인은 대화의 흐름을 끊기도 했다. 이런 권위적인 살롱 운영이나, 규칙들, 주제선정 등은 방문객들, 특히 백과전서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멜쵸아 그림의 보고에서도 알 수 있다.
백과전서파들이 그녀에게 복종하기로 약속한 것은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강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만의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르몽텔과 모렐레(Morellet), 달랑베르, 뒤클로(Duclos)와 그 친구들은 죠프랭부인 댁에서 식사를 한 후, 규칙적으로 튈러리엥궁의 정원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죠프랭부인에게서 받은 상처를 삭였다고 한다.
죠프랭(Geofrin)부인의 살롱은 문학철학 살롱으로 발전해 나갔고, 전 유럽에 알려진 사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폴란드의 스타니슬라우스 국왕, 스웨덴의 구스타브 3세가 그녀를 방문했고,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영국인들도 살롱을 드나들었다. 특히 폴란드 국왕과 가까웠던 그녀는 바르샤바 궁으로 초대받기도 하였고, 비인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과 후에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 앙트와네트의 영접을 받기도 했다.
그녀가 유럽에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외교관들과의 교류 덕분이었다. 궁정에서는 예법에 얽매임으로써, 사교에 제약을 받았으므로, 살롱은 외국의 사신들에게 큰 매력을 발휘했고, 궁의 부족함을 메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살롱 주인의 교양과 대화기술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살롱의 역사는 프랑스의 외교사와도 맞물리게 된 것이다.
외교관들의 참석에 큰 비중을 둔 죠프랭 부인의 살롱의 손님에는 덴마크의 대표인 글라이헤 백작(Graf von Gleichen), 크로이츠 백작(der Graf von Creutz), 스웨덴의 장관인 카라치올리 백작(Graf Caraccioli), 나폴리의 사신비서관이었던 아베 갈리아니(Abbé Galiani)도 있었다.
이 살롱의 범유럽적인 성격은 그곳에 영국의 철학자 흄과 작가인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이 함께 독일에서 파리로 여행을 오거나, 파리에 주재하는 이들도 출입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바이마르의 황태자인 칼 아우구스트에게는 베르사이유궁의 영접과 화가들과의 만남, 오페라와 연극 구경과 함께 살롱을 방문하는 것이 파리 여행의 프로그램에 속했고, 멜초아 그림은 안내를 맡았다.
외교관들의 출입으로 살롱은 결과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장소로 발전하게 되었고, 계몽주의의 프로그램인 공론(Öffentlichkeit)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죠프랭(Geofrin)의 살롱이 신문과 여러 잡지들, 그리고 다양한 대중을 겨냥하며 그들과 접촉했다는 것에서도 설명되어 진다.
그러나 살롱에 모인 사람들로 대중을 국한시키는 것은 점차 계몽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문학의 오락적인 기능은 궁정에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었고, 이것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 치부되었다. 문학에도 이제는 단순한 여흥이 아닌 사회적인 기능이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실천한 것이 바로 백과사전의 발행이다. 죠프랭(Geofrin)부인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백과사전의 간행이 위기에 처하자 이를 도와 순조롭게 출판되도록 했다.
*** 데팡 부인(Madame de Deffand)의 살롱
죠프랭(Geofrin)부인의 살롱과 함께 어깨를 견준 것은 데팡(Deffamd)부인의 살롱이다. 하나는 시민적인 독립성, 소박함과 따뜻함으로, 다른 하나는 날카로운 지성과 반어로 양극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35년간 서로 양립하여 공존했다. 하나는 시민계층의 사회적, 지적인 신분상승을, 다른 하나는 교육을 잘 받은 귀족출신의 여인의 고상한 생활공간을 대변하였다.
데팡(Deffamd)부인은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18세기 중엽에 전성기를 맞았던 살롱들을 이끈 여주인들 중에서 탁월한 인물의 하나로 꼽힌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22세에 먼 사촌 데팡 백작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곧 그와 헤어졌고, 파리 궁의 상류층 문화와 생활에 젖어들었다.
당시 상류사회를 지배하던 삶의 권태를 불평하던 그녀는 파리의 성 요셉 수도원(Couvent de Saint Joseph)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것은 죠프랭 부인이 탕생살롱의 손님들을 받아들이기 2년 전이었다. 데팡(Deffamd)부인의 살롱은 이후 죠프랭 살롱에 비견되는, 파리의 살롱 중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1791년 문을 닫기까지 이 살롱은 매일 다음 날 저녁 모임을 위해 밤 2시에 파했고, 이곳에서의 인생의 본질은 대화였다. 이 모임에서 수동적인 사람을 없었고, 모두들 대화의 예술에 참가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달랑베르였고, 그는 살롱 여주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 외에도 퐁트넬, 라 아르프(La Harpe), 몽테스키외, 마리보, 볼테르, 콩도르셰, 마르몽텔 등이 살롱의 규칙적인 방문객이었다.
이 살롱의 성격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Wahrheitsfindung)’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어떠한 규정 없이 자유롭게 말을 함으로써, 손님들은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지나친 반어법과 기만, 폭로가 거듭되는 유희는 이 살롱의 특징이었다.
데팡(Deffamd)부인이 시력을 잃으면서 조형예술은 더 이상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자연히 문학이 대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1764년에 살롱에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백과전서파, 그 중에서도 특히 달랑베르(d’Alembert) 였다. 볼테르는 부인과 계속 서신교환을 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루소는 초기의 가까웠던 관계를 끊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참회록을 저술했다.
데팡(Deffamd)부인의 문학살롱은 귀족적인 살롱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그 종말을 맞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직업으로서의 작가의 길을 걷던 이들의 문학시장에 적응해나가기 위한 직업윤리는 문학의 오락적인 기능을 요구하는 그녀의 스타일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의 살롱에서 독점권을 요구하면서 이것이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의 공론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은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영국인 흄과 호레이스 월폴은 그녀와의 왕래를 지속했는데, 특히 볼테르와의 서신교환은 20여 년 간 지속되었다. 그녀와 볼테르의 편지가 문학적인 성격을 띠었다면 월폴과의 편지는 감성적인 면을 드러낸다. 57세에 실명한 데팡부인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그녀의 생활 또한 변하지 않았다. 데팡부인은 평소처럼 토론이 오가는 저녁 모임에서 1790년 숨을 거두었다.
*** 레스피나스 양(Mlle. de Lespinasse)
데팡(Deffamd)부인은 1751년 눈병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면서 조카인 레스피나스양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파리로 데리고 간다. 레스피나스양의 활기와 명석함은 곧 살롱의 친구들과 달랑베르의 환호를 받게 되는데, 계몽주의자들은 이미 1750년대에 데팡부인 몰래 그녀의 살롱으로 가기 전에 그녀의 대화친구였던 레스피나스양의 방에 모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레스피나스양과 데팡부인과의 사이에 금이 가게 되었고, 데팡부인의 집에서 나온 그녀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 오노레 가의 작은 집에 자리를 잡게 된다. 따라서 그녀의 살롱에서는 이전 살롱들이 지녔던 과시적인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인간관계의 친밀감이 강조되었다.
그녀의 살롱은 죠프랭 살롱만큼 유럽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죠프랭 부인처럼 위압적이지 않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끄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백과전서파의 정신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살롱은 새로운 문화적인 형태를 보여주는데, 이는 즉 감상주의(Empfindsamkeit)로의 과도기적인 성격이다.
이러한 감성적인 성격은 레스피나스양의 불운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녀의 사랑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고, 손님들은 이에 동감을 나타냈다.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궁정의 예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는, 감정이 사적인 영역이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했다.
달랑베르의 편지 속에서 당시 계몽주의를 대표하던 이들이 감성적인 문화를 선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살롱은 ‘백과전서파의 실험실(Labortorium der Enzyklopädisten)’로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그만큼 격식이나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백과전서파들의 새로운 지식들 이외에도 문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적인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죠프랭 부인이 시민계급의 조심스러운 독자성 때문에 대담한 주제를 다루지 못했고, 데팡 부인이 날카로운 지성과 회의적인 성향으로 주제들을 웃음거리로 만든 데 비해 젊은 레스피나스의 살롱에서는 이런 주제들이 확실하게 토론되었다.
그녀는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소박한 사교형태가 그녀의 ‘기지의 산실(Boutique d‘esprit)’을 특징지었다. 그녀의 음악에 대한 정열, 특히 글룩에 대한 열광으로 인해 그녀의 살롱은 음악살롱의 전신이 되었다. 그 살롱의 문화사적인 의의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특히 낭만주의로의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달랑베르가 중심이 되어 모든 백과전서파들이 모여들었고, 18시와 22시 사이에 파리의 지성인들은 이곳에 모였다. 모임이 끝난 후에는 데팡 부인 집에서 늦은 저녁이 있었다. 여기에는 철학자 콩도르세(Condorcet)와 콩디약(Condillac), 영국 철학자인 흄과 같은 외국인들도 있었다. 흄이 루소를 알게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고 한다.
그녀의 살롱은 감정과 성찰, 정열과 이성의 일치를 끝까지 유지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양자를 조화시키기 위한 ‘기분좋은 철학(douce philosophie)’가 생겨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철학자들의 각 입장을 수용하도록 어떤 양식, 즉 전달 가능한 학문이 생겨났다. 마르몽텔은 이 사교모임을 살롱 여주인을 중심으로 하여 손님들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의 생산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 넥커 부인(Madame de Necker)의 살롱
계몽주의자들의 중심이 되었던 또 하나의 살롱으로 스위스의 은행가이면서 프랑스의 장관이었던 넥커(Necker)의 집에서 열린 살롱을 들 수 있다. 넥커부인은 금요일마다 문학 살롱을 열었다. 그러나 이 살롱은 시간이 흐르면서 “문학과 철학적인 교양의 사회적인 정점(der sozliale Gipfel der literarischphilo-sophischen Bildung)”이 될 수도 없었고, 되려고 하지 않았다.
넥커(Necker) 부인의 살롱은 처음부터 넥커의 출세를 위한 것이었고, 계몽주의자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즉, 반은 공적이면서 반은 사적인 살롱이라는 공간에서 문학과 철학의 주제가 다루어지면서 살롱은 차츰 정치적인 공간으로 변모해간 것이다.
주로 정치적인 흐름과 경제적인 문제들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으므로 살롱 여주인의 남편도 간혹 이 대화에 끼어 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역할은 주변적인 것이었다. 그나마 그의 역할이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살롱의 문학적인 성격은 유지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살롱이 정치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에서 그녀에 대한 격한 비판이 일었고, 이것은 생활영역이 점차 정치화되어 가면서 계층을 초월하여 미학과 철학을 추구하는 살롱의 형태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사회적인 모순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혁명전기에 이미 문학살롱에 경쟁적인 새로운 사교형태로서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집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으로부터 사교적인 공간이 분리되고, 사교공간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카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카페는 원칙적으로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따라서 카페에서는 살롱보다 더 심한 비판이나 논쟁, 의견대립이 가능했다.
1654년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에 최초의 카페가 생긴 이래 18세기 후반에는 900개 이상의 카페가 생겨났으며 점차 초기의 토론문화를 벗어나 사교의 장으로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했다. 특히 생 제르망(지금의 생 제르망 데 프레) 지역의 카페는 파리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역사적으로 세계 최초의 카페는 1550년경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카페>
살롱을 카페로 개조하는 것이 유행이 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문학살롱의 의미가 상실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로써 대화의 단일성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이미 넥커부인의 살롱에서도 나타났듯이, 살롱 여주인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이 약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활이 정치화되면서 문학에 대한 이해는 최소화되었고, 여성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18세기 후반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그 배경이 되는 사상은 국적과 상관없이 유럽의 모든 엘리트들을 살롱으로 집결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혁명은 지난 세기에 문학에 대한 지상권을 행사해온 살롱을 폐쇄시킴으로써 문학에서의 과거와 고리를 끊었다. 귀족들은 투옥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했고, 문학살롱은 더 이상 존립이 어려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