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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미는 다른 범죄를 저지른 뒤 실종 자작극을 끝내고 닉에게 돌아온다 |
결혼 당시의 환상이 깨어진 상태에서 에이미는 닉을 살인범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려고 계획해왔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이 변사체로 발견될 수 있도록 자살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강도를 만나 계획이 어그러지자 어릴 적 자신에게 집착했던 고교동창 콜린스를 찾아 간다. 엄청난 거부인 콜린스의 도움으로 은둔생활을 하던 중 새로운 계획을 세워 완수하고 난 뒤 닉에게 극적으로 돌아온다.
닉의 혐의는 풀리고,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사랑을 되찾은 부부로 매체 앞에서 ‘연기’한다. 닉은 이 모든 것이 에이미의 음모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증거도 불충분할 뿐더러 죽음을 무릎쓰고 남편에게 돌아온 아내를 내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도 없고, 서로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지만 타자의 시선들 앞에서 포장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영화는 우리가 되었으면(Wanna Be) 하는 모습과 진짜 우리 모습 사이, 그리고 대중들에게 비친 자신들의 모습 이 세 개의 이미지 간극에서 오는 비극을 보여준다. 에이미는 실종 자작극을 꾸미고 숨어 다닐 때 자신의 자살 계획을 담은 메모에서 'kill myself'라고 쓰지 않고 'kill self'라고 쓴다. 에이미는 이런 이미지 간극이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자아’들의 공통된 문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아’라고 표현한 것이다. 마치 술집의 이름을 그 선술집이라고 지은 것 처럼. 즉 자신의 경우가 모든 인간의 경우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다. 실제로 에이미의 자아 이미지 간극은 모든 사람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어메이징 에이미
에이미는 유명 작가인 어머니의 작품 <어메이징 에이미 (Amazing Amy)>속의 에이미와 실제 에이미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라났다. 어머니의 동화 속 에이미는 완벽하고, 실제 에이미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독자들은 두 에이미를 동일시했다. 처음에는 동화 속 주인공에 못미치는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차츰 동화 속 에이미처럼 거짓으로 사는 데 익숙해 진다.
사소한 경험을 과도한 체험으로 극화시키는 작화증 환자처럼 에이미는 어느 모습이 자신의 모습인지 자신도 헷갈려 한다. 그리고 어느 파티장에서 결혼의 최적화된 상태로 닉을 만난 것이다. 닉과 에이미는 세상이 규범으로 정해 놓은 '좋은 결혼'을 위해 연기를 할 줄 알고 있었다.
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치매'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과는 미분화된 상태다.
특히 에이미는 자신마저 타자화시키면서 만들어진 자신을 연출해 나간다. 그러다가 남편을 통해 자신을 찾으려다가 실패하고 이제는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확인해 간다. 영화의 원제는 '가버린 소녀(Gone Girl)'인데, 끝까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소녀에 상태에 머물러 있는 에이미의 정신 상태를 암시한다. 반면 우리말 제목 '나를 찾아줘'는 훨씬 철학적이다. 에이미가 되었건 닉이 되었건 타자의 시선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를 찾으려다 실패한 사람들이다. 닉과 에이미는 라깡이 말한 유아적 상상계나 아버지에 의해 좌우되는 상징계를 심각하게 예속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부부 관계를 유지해 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부부에게 있어서 상징계의 대타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에이미는 자신을 가공해낸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닉은 여동생과 미분화된 관계를 통해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꿔 나갔다.
나를 찾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운가?
불교에서는 나를 비우라고 하지만 이런 개념은 본래 일본 선불교로부터 배운 얼치기 대중 선사들의 가르침이다. 본래 불교에서는 비우고 말고 할 것 없이 '나'라는 것이 없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는 불가해한 존재다. 사도 바울도 이 문제로 고민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로마서 7:18-20)
사도바울에게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이란 타자의 욕망이 나에게서 작동하는 경우다. 닉과 에이미의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원치 않는 악한 일'이 을 강요하다가 결혼이 파탄났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부부갈등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판 '사랑과 전쟁'이 아닌 이유는 우리 모두의 'SELF'가 이처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 혹은 '믿음'은 나의 주체적 결단인가? 아니면 나를 나 아닌 나로 만드는 객관화된 타자인가? 화려하고 상투화된 신앙 용어로 덕지덕지 덧붙여진 '내'가 아직도 진짜 '나'인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닉과 에이미 보다도 자기 성찰이 덜 된 사람들이 아닐까?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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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 ㅡ
재산이 많아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듯이
지식이 많아도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듯이
나는 다 가진 자라 하지않고, 나는 다 아는 자라 하지 않는
'화려하고 상투적인 신앙용어가 덕지덕지 붙은 글' 말고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어린아이같은 호기심이 잔뜩 묻은
멋부리지 않은 투박하고 담백한 믿음의 글이 그립네요.
-영화리뷰와 별개로 나를 찾아줘-
나는 네 가지 사명으로 인생을 산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줘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그 꿈을 이룸으로써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
그것을 피하지 말고 기꺼이 그 부담을 사명으로 여기고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프라 윈프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생각해볼만한 글이라 옮겨봅니다
@하늬 이런 명언은
게시글로 사진이랑 좀 꾸며서 짠~ 하고 올려봐요.
진짜 .... 와.... 진짜 명언이다 명언~~~!
진짜 인가, 가짜 인가...
입만 살아있는..... 신앙인은 아닌가.
반추해 봅니다.
아... 나두 나를 찾는 일이 어려워요....ㅠ
위 글중에 기가막힌 한마디가 있네요.
...
불교에서는 나를 비우라고 하지만 이런 개념은 본래 일본 선불교로부터 배운 얼치기 대중 선사들의 가르침이다. 본래 불교에서는 비우고 말고 할 것 없이 '나'라는 것이 없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는 불가해한 존재다.
...
저는 그런답니다.
비우려하지마라. 비우는 것은 그릇이 깨트려지거나 죽어야한다. 채워라. 좋은 물을 계속 공급받으면서 채우면.. 그렇게 채우다보면 꾸정물과 흙탕물은 점점 희석이 되고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ㅎㅎㅎ
요즘시대는
나를 찾는 것보다 남을 찾아주는것을 더 좋아하는 시대이려니 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9.25 15:0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9.25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