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들, 일제 식민 관리 처단. 혹한 견디며 전투 벌이기 위해 군수품 조달 투쟁 벌여
이 작전은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공격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즉 선생과 전해산․강판열 의병장이 이끄는 연합의병부대는 11월 23일 우다[宇田] 특무조장이 거느린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맞서 연합의병부대는 대치산에서 3시간의 사격전을 벌여 적을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재차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연합 의병부대의 광주 탈환 작전은 보류되었던 것이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전해산․강판열 의병장은 연합의병부대를 분산하여 적의 반격에 대처하는 방안을 세웠다. 이러한 작전 방식은 후기 의병전쟁에서 우세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부대들이 흔히 구사한 이합집산의 유격 전술이었다. 선생을 비롯한 전해산ㆍ강판열 의병장도 바로 이때 그러한 작전을 편 것이다. 따라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연합 의진을 나와 전남북의 경계인 담양군 추월산으로 이동하여 갔다.
그런데 이때 예상대로 11월 25일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토벌대가 선생의 의병부대를 공격해온 것이다. 이에 선생의 의병부대는 추월산 고지에서 포까지 쏘며 적들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적들을 공격하였고, 적지 않은 전과도 올렸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도 우수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반격으로 15명의 인력을 상실하고, 포와 화승총을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가 주로 전투역량을 재충전하기 위한 군자금 조달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을 벌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식민관리에 대한 처단 투쟁을 벌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14일 광주 오치동에서 일본인 우체부 에토오[江藤喜次郞]를 처단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에는 광주 대치산에서 추월산으로 이동하는 중에 만난 일본인 세무서원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가 일본인 우체부와 세무서원을 처단한 것은 이들이 경제침탈의 앞잡이로 민중의 원성을 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세무서원뿐만 아니라 우체부도 조세 징수와 운반 임무를 맡고 있었던 탓에 의병부대의 표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 식민관리의 처단 활동은 감정적 차원의 보복이 아니라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한 민족적이며 민중적인 응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주요활동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초기부터 꾸준히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의병부대의 유지와 전투력 강화를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초기부터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이 있었겠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1908년 7월 5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날부터 선생은 양동골․김성국․김동수 등 의병부대원을 거느리고 광주․담양군 일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에 나선 것이다. 8월 23일과 24일에도 선생은 의병대원을 인솔하여 군자금 징수 활동을 하였다. 즉 23일에는 광주군 갑마보면 복룡촌, 24일에는 광주군 하대곡면 주부동에서 군자금을 징수했다.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광주군 갑마보면 면장 집에서 짚신과 백목(白木; 면포) 등을 거두었는데, 이는 군수품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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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09년에도 선생 의병부대의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짚신과 백목은 필수품이었는데, 의병부대는 적을 피해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고, 또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데는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9년 1월 12일과 18일 광주군 갑마보면 복룡리 이장 집에서, 2월 하순에는 광주군 오치면 방축내동 동장 집에서 백목 등을 군수품으로 수합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같은 해 3․4월까지 지속되었다. 3월 15일에 광주군 오치면 삼취동 동장 집에서 백목을 거두었고, 3월 23ㆍ30일에 광주군 석지면 연지촌과 상촌동 동장 집에서 군자금을 거출하기도 하였다. 다음달 4월 1일과 2일에는 전남 창평군 지곡면의 동장 집에서, 4월 7일에는 전남 광주 석지면 낙촌동 동장 집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을 수합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4월 10일과 11일에도 광주군 갈전면 수곡동과 장동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런데 선생의 의병부대가 벌인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은 주로 지방 유지인 동장과 면장을 상대로 하였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이 지방 유지로서 봉건 지배층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선생 의병부대의 그러한 활동은 평민 의병들의 반봉건 의식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평민 의병부대 활동에서 드러난 특징이다. 생명을 담보로 평민 의병부대가 실천한 이러한 반일․반봉건 투쟁이야말로 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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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