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의 동백꽃
金宇鐘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에 가면 온 산이 동백이다. 동백꽃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어도 아름답다. 죽은 꽃이지만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도 몇 차레 동백곷을 그렸다. 흙 위에 떨어져도 선홍(鮮紅)빛이 여전한 동백은 다른 꽃과 다르다. 죽어서도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감동적이다.
내가 동백꽃을 몇 차례 그린 다른 동기는 윤동주가 1941년 말경에 연희 전문 후배인 정병욱(훗날 서울대 국문과 교수)에게 주고 간 자필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때문이다. 그것을 받은 정병욱교수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윤동주의 뒤를 따라서 일본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의 고향인 전남 광양에 가서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 시집을 맡겼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정 교수의 누이동생 정덕희 씨가 옛날을 회상하며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을 몇 십년 후에 되새기며 옮긴 말이어서 표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머니는 정말 이것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해방을 맞았다. 만일 일본 관헌이 이를 알았었다면 오늘의 윤동주는 우리 문학사에 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계시던 광양의 정교수 고향집이 바닷가에 있는 양조장이었다. 바닷가에는 해당화도 붉게 피지만 그쪽 지방이 대개 그렇듯이 동백곷도 많이 피어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며 시집을 숨겼던 양조장 독과 동백꽃을 그렸다. 죽어서도 붉게 피어 있는 동백꽃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더욱 선명한 핏빛으로 우리 문학사에 남은 윤동주 시인을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광양의 바닷가 양조장 집과 독과 시집을 그리면 한 편으로 서정주의 산문에 나타나는 동백도 연상하게 된다. 작품명을 잊었지만 그의 산문에 그려진 동백도 참 아름답다.
산문의 내용은 이렇다. 예전에는 서시인이 바닥에서 구르는 동백꽃을 주워서 뒤 따르던 여인에게 주면 그 여인은 하얀 치마를 벌리고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송이 그렇게 받았는데 지금은 꽃을 주려 해도 그런 여인이 없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지금도 그를 따르는 많은 여인들이 있을 것이며 이 산문은 실제사실이 아닌 허구의 상징적 서사문학 형태다. 동백과 이를 주는 자와 받는 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시와 독자와의 거리관계를 한탄조로 서술한 것이다. 즉 예전에는 화자의 문학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 떠나버렸다는 한탄이며 그는 여기서 자기 문학을 붉은 동백과 흰 치마의 아름다운 회화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붉은 동백은 소복단장한 여인의 치마 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뒤따르던 여인이 모두 떠나버렸다는 것은 그가 평소에 말하던 바 정서가 메말라서 자신의 시를 잘 받아주지 않는 삭막한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대로라면 그렇게 정서가 메마른 세상을 만든 사람 중에는 나도 포함된다. 그리고 정면 충돌 사고가 나고야 말았다.
1980년대 초 어느날 나는 KBS 본관의 넓은 스튜디오에서 둘이 마주 앉은 일이 있다.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말하는 자리였다.
서시인이 먼저 말하자 내가 받았다.
“요즘은 세상이 메말라서 우리 독자들이 시를 안 읽어요”
“ 아닌데요. 요즘은 전보다 시중에서 시가 더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서생님의 시만 안 읽습니다. 선생님의 시에는 우리들의 아픔이 없습니다.”
정확히 녹음된 바를 옮긴 것은 아니니 한 두 단어의 조사나 어미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 기억은 명확하다. 그리고 이 한 마디의 짧은 대화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누구나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서정주는 그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카메라 몇 대에 매달린 이원 외에도 2층에서 내려다 보고 있던 담당국장등 스탭들이 심각한 사건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거의 반시간쯤 뒤에 PD가 서시인을 모시고 다시 나타났다.
“문학이 그렇게 사회문제만 말하면 다 망친단 말이오!”
격노한 말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기 시만 안 읽는다는데 화가 나지 않을 시인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나는 꼭 밝혀야 할 진실을 밝힌 것 뿐이다. 그 무렵에는 내 경희대 제자인 한수산이 <욕망의 거리>를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군부에 체포되어 고문받고 나와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같은 제자 박정만 시인도 고문받고 나와서 독주만 퍼마시다가 곧 죽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이며 평론가였던 정규웅도 당했다. 소설가인 그의 누나 정연희의 말대로라면 정강이 살이 다 벗겨져 뼈가 들어나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김병걸도 맞고 나와서 허리를 잘 못 쓰고 있었다. 그는 다음 정권 때 죽었다. 아직 5.18의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을 때인데 서시인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모시자고 TV에서 극찬하는 시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럴 때 여전히 그를 사랑하며 그가 주는 동백꽃을 받고 좋아할 여인이 있었다면 그녀는 화냥년이다.
이 때 우리들의 사회현실을 보며 아픔을 절실하게 전하던 시인이 정호승이었다. 처음에는 농촌에서 상경하여 도시의 가혹한 현실에서 고통받고 죽어가는 평화시장의 미싱공등의 눈물을 그리더니 항상 옆에 있던 내가 체포되고 간첩으로 조작되자 삼엄한 검찰청까지 찾아오고 시의 세게는 이쪽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서정시인이면서도 사회 현실을 찍시하며 그 속에서 나도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후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최고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었다.
내가 말한 것은 이 사실을 전한 것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60년대 초부터 전개된 순수 참여논쟁의 반복이다. 그 때 나는 문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며 순수문학의 모순을 주장하고 동아일보에 <파산의 순수문학>을 발표하고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때 서시인은 이를 막는 입장에서<사회참여와 순수개념>을 발표했고 김동리 조연현 이형기 선우휘 이어령 등이 이쪽에 가담했다. 이 분들은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서시인이 살아 있던 1990년에 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를 국정국어교과서에서 삭제시켰다. 다시 복원시키라는 신문 칼럼이 있었지만 내게 직접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없다.
김우종- ( 충남대 경희대 덕성여대 교수, 서울대 연세대 강사. 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보관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현재 문예지 창작산맥 발행인)
첫댓글
김우종 님과 서정주 시인과의 사연... 에휴 PD는 무슨 죄인가요... ㅎ
고문님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
참여냐 순수냐 이분법적인 시대상황은 많은 문인들을 함정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역사적으로 큰 비극이며, 우리 문학의 다양성과 깊이를 한정 시킨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