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가 2015년부터 7년간 부부/연인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살인미수 사건의 형사 1심 판결문 650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주거지에서 발생한 교제폭력 비율’이 75%에 달한다. 또 한국여성의전화가 매년 발표하고 있는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살해 분석’에서도, 2022년 전체 피해자 372명 중 55.1%(205명)가 피해자의 주거지에서 살해당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거지에서 폭력을 겪는 피해자의 주거권은?
집이란 어떤 공간인가? 집은 쉴 수 있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장소로 여겨지지만, 슬프게도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집이 폭력과 위험이 도사리는 장소, 나에 대한 침해가 반복적으로 일어나 견딜 수 없는 장소다. 그래서 그 공간을 떠나야 하는 상황을 직면한다. 이런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위협을 제거하고, 집의 안전을 찾을 순 없을까? 혹은 집을 떠났을 때 모든 걸 잃지 않고, 새로운 집을 제 때 꾸릴 순 없을까?
▲ 여성가족부가 제작한 여성긴급전화 1366 홍보 이미지. 가정폭력 피해자가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는 집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을 때, 사회가 주거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
가정폭력 피해자가 주거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국회에서 열렸다. 25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서 개최된 〈가정폭력피해자 주거권 보장 및 주거지원 정책 개선을 위한 토론회〉는 한국여성의전화가 주관하고, 더불어민주당 백혜련‧김한규‧이수진‧권향엽‧김남근‧김남희‧김윤‧모경종‧백승아‧서미화‧임미애‧전진숙‧차지호 국회의원, 조국혁신당 김선민 국회의원, 여성폭력통합지원상담소연대,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가 공동 주최했다.
‘피해자의 안전과 회복’이라는 중요한 역할에 비해, 열악한 ‘쉼터’
쉼터 부족하고, 체류기간도 짧고, 개인공간 미비, 동물 반려 불가…
최유연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피해자 보호시설 시설장은 “가정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폭력으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거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거나, 주거지를 공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피해자와 가해자 격리가 최우선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가정폭력은 제대로 신고되지 않거나, 신고되더라도 대부분 입건되지 않으며, 가해자 처벌은 상담명령 등 보호처분으로 대신하고 있어, 피해자와 가해자 격리가 요원한 상황”이라고 짚었다.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주거 공간을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
“가해자가 남고 피해자가 떠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쉼터는 피해자의 안전과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지원제도”로 작동하고 있다.
최유연 시설장은 “피해 여성들에게 있어서 안전한 주거로의 이동은 생명과 연결된 문제”라고 말하며, “2022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한 쉼터 이용 경험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쉼터 입소 이유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가 가장 높은 응답을 차지했다”고 밝혔다. 또한 “여성가족부의 가정폭력 피해자 조사에서, 배우자·파트너의 폭력 행동을 피한 장소에 대한 질문 중 ‘갈 곳이 없어 배회함’이라는 답변(복수응답)이 6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는 점도 덧붙였다. 쉼터는 이런 피해여성들에게 너무 중요하고, 필요한 제도인 것이다.
하지만, 쉼터는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최유연 시설장은 “전국 66개 가정폭력 쉼터의 대부분은 ‘단기 쉼터’이며, 1년 이상 거주할 수 있는 중장기 쉼터는 전국에 4개 뿐(장애인 시설 3곳 제외)”이라며 “연장하더라도 최대 1년까지만 거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가정폭력으로 이혼하는 경우 소송이 1년 이상 장기화되고, 쉼터 퇴소 이후 이동할 수 있는 주거 지원 제도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쉼터에 장기로 머무는 입소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2024년 11월 25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서 열린 〈가정폭력피해자 주거권 보장 및 주거지원 정책 개선을 위한 토론회〉 현장 모습 ©한국여성의전화 |
쉼터를 늘리고, 체류 기간도 늘려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주거환경 개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여성가족부 운영지침에 따르면, 쉼터의 설치 기준 면적은 입소정원 x 6.6㎡로, 국토교통부의 1인 최거 주거 기준 14㎡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 여기에 “시설 종사자의 사무 공간, 공용 공간 등을 포함하면 입소자 1인에게 할당되는 공간은 더욱 협소”하다. “여성가족부가 제출한 가정폭력 쉼터의 면적 현황을 분석하면 1인실~6인실의 1인당 면적은 2.8~5.3㎡에 불과”하다.
최유연 시설장은 “현재 쉼터는 공동체 생활이 기본으로, 개인만의 공간이 거의 없어 모든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입소자의) 사적인 영역에 대한 욕구는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이를 반영하지 못한 공간 구성으로 인해 쉼터 이용자 간 갈등과 긴장이 반복되고 있으며, 이는 폭력 피해를 치유하고 자립을 준비하는 과정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입소정원 1명당 면적 기준을 상향하고, 개별 공간 마련 등 기존 쉼터의 시설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반려동물과 함께 입소할 수 있는 쉼터가 없다”는 점도 지적하며, 이에 대한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쉼터 이후의 삶은?
국민임대주택 ‘입주자격’ 허들 높아…피해자들 ‘넘사벽’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쉼터가 장기 거주지, 혹은 최종 주거지가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쉼터 이후의 삶’에도 지원이 필요하다.
최유연 시설장은 “정부에서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국민임대주택 우선 입주 자격을 부여하는 등 주거지원 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지만, ‘쉼터에 6개월 이상, 주거지원 시설에 2년 이상 입소하고, 퇴소일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아야 한다’는 지원 요건 때문에 가정폭력 피해자라도 쉼터에 입소하지 않으면 임대주택은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2020년부터 2024년 9월까지 약 5년간 (국민임대주택에) 계약한 건수는 단 7건에 불과”한 이유이며, “이 제도는 현재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라고 최유연 시설장은 꼬집었다.
고은정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는 피해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공임대주택은 제도가 너무 복잡해서 상담원들도 안내하기 어렵고, 피해자들은 신청할 엄두도 나지 않는 ‘넘사벽’ 제도라고 이야기한다”며, “제한될 물량, 입주 자격 등을 보면 피해자의 상황이 충분히 고려하여 고안된 제도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쉼터에 입소하지 않기로 한 피해자들의 주거 확보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겨두어선 안 되며,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거주지를 지원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송경인 대구여성의전화 대표는 “LH 긴급 주거지원 신청 시, 가정폭력보호시설 입소자들은 1인가구로 분류되어 매입임대 1형(원룸)으로만 신청할 수 있다. 간혹 매물에 따라 투룸이나 쓰리룸이 나오기도 하지만 요행을 바라는 일만큼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2022년 어느 피해자는 LH에 선정되었지만 자녀 3명을 양육하기에는 평수가 매우 협소해 입주를 포기했다”고 전하며, “현실적인 주거 지원” 정책을 주문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우선입주 자격 부여’ 같은 정책보다, 조금 더 넓게 주거권 보장에 관한 논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현재 서울에 통합임대주택 공급이 0채다. 매입임대주택도 마찬가지다. 공공임대주택이 공급되어야 누구한테 나눠주든가 말든가 할텐데 지금 오히려 공공임대주택 예산이 삭감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우선’ 이런 게 큰 의미가 없다. 보편적인 주거 정책과 관련된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용기와 결단이 ‘빈곤’으로 이어지게 해선 안돼
임차료, 자립지원금 지원 제도의 실효성 갖춰라
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것이 ‘특별한’,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임차료 지원 제도가 필요하다.
최유연 시설장은 “서울시의 경우, 2023년부터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 또는 공동 생활가정 시설 퇴소자를 대상으로 월 30만원을 1년까지 지원하는 임차료 지원사업을 진행해오고 있고, 연 40여명 규모”라고 했다.
다만 이 또한 “쉼터 4개월 이상 입소 또는 공동생활가정 시설 2년 이상 입주 자격이 갖춰져야 하며, 대상 주택은 서울 지역으로 임차보증금 1억원 이하, 월세 60만원 이하 민간주택 월세만 가능한 상황”이다. 서울 지역 임차료를 생각해 볼 때, 이 정도의 집은 역세권과 멀거나 열악한 환경일 확률이 높다. 최유연 시설장은 “적절한 주거, 삶의 질을 담보하는 주거를 마련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립지원금에 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최유연 시설장은 “자립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경우 피해자들은 자녀의 양육을 포기하거나, 가해자(남편)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해 폭력 재발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자립의 문제는 가정폭력 예방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현재 가정폭력 피해자가 쉼터 퇴소 시 지원받는 자립지원금은 2018년부터 제도화되었고, 쉼터 입소 기간 4개월 이상인 피해자 본인의 경우 1인당 500만원, 2024년부터는 아동에게도 1인당 25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최유연 시설장은 “피해자들의 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다. 2024년 자립지원금 예산은 14억 8천만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2023년의 경우, 성인 1,191명과 동반 아동 503명이 퇴소했지만 자립지원금을 받은 경우는 179명이었다.”
자립지원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제도로 잘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피해여성 그리고 자녀들은 ‘빈곤’ 상황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서정화 열린여성센터 소장은 “여성 홈리스에 대해 조사해 봤을 때, 홈리스로 진입하게 되는 이유 중 30% 이상은 과거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등 폭력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피해자들이 집을 나가는 순간 사실 홈리스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경우 바로 홈리스가 되진 않지만 불안정한 주거를 반복하게 되고, 그러다 제도를 이용해 보고자 하지만 그 땐 이미 사건이 ‘과거의 일’이 되어 법의 보호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고은정 연구교수는 “살기 위한 용기와 결정이 빈곤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가해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평온하고 안전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시설 퇴소 이후, 혹은 시설에 입소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주거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정폭력이 피해자의 삶에 오랜 기간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거취약 요인’으로 고려하여, 일상을 회복하면서 안전하게 자신의 적은 소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저렴한 주거’ 공급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한편, 유화정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사는 해외 사례와 비교하며 “영국, 스웨덴, 캐나다 등에서도 개인 재산 수준이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금액이 다르긴 하지만, 영국은 원화로 월 20~100만원, 스웨덴은 월 40~90만원, 캐나다는 월 40~100만원을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정도 지원한다.”며 자립지원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출처: 폭력을 피해 ‘집’ 떠난 피해자들…주거권 보장해야 - 일다 - https://www.ildaro.com/10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