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처음 열린 트럼프 전대통령-바이든 대통령 간의 TV 토론에서 트럼프 후보가 이긴 것(CNN 여론조사 결과, 트럼프 후보 67% 우세)으로 드러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해법이 한층 복잡해졌다. 자칫하면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막다른 길로 몰릴 수도 있다. 트럼프 후보의 대선 승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줄여야 한다는 그의 과거 발언으로 볼때, 우크라이나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8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이번 (미국의) TV 토론이 우크라이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Что эти дебаты означают для Украины?) 라는 코너에서 "트럼프 후보의 대선 승리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며 "키예프(키이우)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및 재정 지원을 거듭 반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현실에 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는 올해 말까지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 의제를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예상을 뛰어넘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기도 했다.
TV 토론뒤 부인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서 내려오는 바이든 대통령/영상 캡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전 세계 대다수가 지지할 전쟁 종식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며 "전쟁을 끝내기 위한 방안이 올해 준비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이 해체된) 1991년 국경의 바깥으로 러시아군이 철수하는 것을 '전쟁 종식'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워온 그가 이제는 현실에 입각한 새로운 평화안을 마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가 내세운 '평화 공식'을 대세론으로 만들기 위해 스위스 정부와 기획한 스위스 평화 정상회의가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개발도상국)의 반발에 직면한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전쟁 후원국인 미국에서마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기대할 곳이 없다. 기존의 평화안보다는 트럼프 후보가 내세운 '현재의 전선에서 전쟁을 끝내자'는, 소위 한국전쟁 휴전안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그의 고민은 '그동안 말도 안된다'고 내친 이 평화안을 뒤늦게 내놓았을 때 직면할 국민의 따가운 질책이다. 당장 '진작에 그렇게 했으면, 무고한 희생과 재산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 아니냐'는 국민 여론을 피해갈 수가 없다.
◇우크라 내부의 군사 사회적 혼란
전쟁이 2년을 훌쩍 넘기면서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군사·사회적 혼란은 더 큰 두통거리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4일 러시아군의 공세로 수세에 처한 동부 지역 지휘관인 유리 소돌 연합군 사령관(중장)을 안드리 흐나토프 준장으로 교체했다. 소돌 중장은 발레리 잘루즈니 총참모장(합참 의장격)을 경질한 지난 2월 일련의 군 개편 과정에서 연합군 사령관으로 기용된 인물이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군 인맥을 처내는 과정에서 발탁된 것인데, 4개월만에 현직에서 물러났으니, 그 조짐이 위태위태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소돌 장군의 경질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국내 언론은 동부 전선의 방어 실패에 따른 문책이라고 분석했으나, 현지 언론에서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경질 이후 우크라이나군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하나로 본다. 구소련군 출신 지휘관과 신세대 지휘관 간의 세대 갈등에 진영및 이념 투쟁, 정계 일부 인사의 군부 편가르기까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군 지휘체제 장악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현지 매체가 전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지난해 6월 러시아군 치휘체제를 뒤흔들었던 군사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의 군사반란 직전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밉보인 군사령관을 '멍청한 작전'으로 부하들을 죽음으로 몬 '무능한 지휘관'으로 규정하고, 해임을 요구한 용병 부대원들의 언론 플레이와 이에 동조하는 군사 블로거, 일부 정치인 등 겉모습은 '러시아의 그때'와 판박이다.
경질된 소돌 장군은 개전 초기의 격전지 도네츠크주(州) '마리우폴' 저항 부대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우크라이나의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 2월 합동군 사령관에 보임됐다.
우크라이나 군은 총참모장 아래 △지상군(예하 부대로는 기계화및 전차군, 로켓및 포병, 방공군, 육군항공부대 등 4개)와 △공군 △해군 △공수부대 △특수 작전 부대 △영토 방위군 △무인 시스템(드론) 부대 △합동군사령부 △병참사령부 △지원군사령부 △통신 및 사이버보안군 사령부 △의무사령부로 구성된다.
이중 2019년 12월에 창설된 합동군사령부는 다양한 군사 작전(나토군과의 종합 군사훈련이나 해외 평화유지 임무 수행 등/편집자)을 수행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로, 현재 도네츠크 동부 전선의 일부 지역 방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소돌 장군을 직격하 크로테비치 아조프 연대 참모장/사진출처:vikna.tv
경질된 유리 소돌 장군/사진출처:스트라나.ua
그러나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분쟁에 참전한 민족주의 성향의 의용군에 뿌리를 둔 '아조프(아조우) 연대'의 핵심 지휘관인 보그단 크로테비치 참모장이 최근 소돌 장군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2022년 '마리우폴' 방어전 당시 소돌 장군이 수많은 '전쟁 범죄'을 저절렀다며 국가 수사국(SBI)에 진정서를 내고 언론을 통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러시아군 정규 지휘관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던 모습을 연상케한다.
비판 이유도 거의 비슷하다. 결사항전을 벌이는 아조프연대에 무기와 탄약 지원은 추가로 지원하지 않으면서 공격 명령을 내려 수많은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마리우폴에는 한 시간도 머무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친 젤렌스키 여성 의원은 러시아군이 도네츠크 토레츠크 방어망을 돌파할 때 현지 최고 사령관인 소돌 장군이 오데사에서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아조프 연대와 소돌 장군간의 충돌에는 소련군 출신의 지휘관과 2014년 이후 등장한 지휘관들 간의 세대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고르 루첸코 전 의원은 "우크라이나군에서는 현재 소련군 문화에 익숙한 고위 지휘관과 신세대 사령관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다"며 "소련군 문화는 강압과 폭정, 무능"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에 따른 군지휘 체계의 붕괴 조짐이다. 아조프 연대가 소돌 장군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은, 향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과 반발을 초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군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내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우크라이나군 지휘체제가 한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불안감도 엿보인다. '바그너 그룹'의 6.24 군사반란이 우크라이나군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튀르키예(터키)의 배려로 2023년 7월 석방된 아조프 연대 지휘관들과 귀국 환영 기자회견을 갖는 젤렌스키 대통령/영상 캡처
◇ 복지부동 우크라 관리들
러시아군의 공세가 치열한 최전선 지역 지도부의 무능과 근무 태만 행태도 젤렌스키 대통령을 고민스럽게 만든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6일 도네츠크 최전선을 방문해 안드레이 그나토프 신임 합동군 사령관을 직접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본인의 업무에는 태만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일부 관리및 지휘관들을 강하게 질책했다. 그는 "책임을 진 인사들이 6개월 이상 이곳에 오지 않았다니 놀랍다"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조했다.
빈니차 지방의 군사정부 수장인 세르게이 보르초프는 술에 취해 징병 업무를 맡은 군사위원회(우리식으로는 병무청)의 직무를 방해한 혐의로 25일 해고됐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키예프 근처에서 음주 사고를 낸 한 자치단체장을 직접 해임하기도 했다.
정부 관리들이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소홀히하는 사이, 법체계가 무너지는 사회현상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법원으로부터 60일간 가택연금 선고를 받은 모 의원이 버젓이 키예프의 한 레스토랑에 나온 게 대표적이다. 니콜라이 타시첸코 의원은 전쟁 중에 피싱 등 각종 인터넷 사기로 돈을 갈취하고 용병을 키우는 소위 '콜센터'( колл-центро)의 문제점을 폭로하기 위해, 무법 천지를 연상케할 만큼 무리수를 뒀다가 결국 가택연금 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25일 저녁 키예프의 한 레스토랑에서 가택연금을 축하하는 술판을 벌였고, 밤 10시 30분께 전자 발치를 다시 차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가택연금형을 받았음에도 버젓이 키예프 레스토랑에 나타난 티셴코 의원/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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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길을 찾아 떠나는 우크라 남성들
군동원 대상 연령의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징집을 피해 계속 해외 도피에 나서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남부오데사 지역에서는 100명의 남성이 불법으로 해외로 탈출하려다 적발됐다. 그들은 '걸어서 국경을 넘게 해주겠다'는 인터넷 제안을 보고 응한 사람들로, 1인당 5천~1만8천 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버스나 트럭을 타고 국경 부근까지 온 뒤 걸어서 국경을 무사히 넘으면 버스와 트럭으로 해외로 이주할 계획이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국경수비대에 의해 체포됐다. 수십명 단위의 불법 해외 탈출 기사는 거의 매일 현지 언론에 오르내린다.
또 러시아의 뒤를 따라 수감자들을 최전선으로 데려가기 시작한 우크라이나군은 '무장 탈영'이라는 현신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수감자들이 훈련중 감시의 눈을 피해 탈영했다는 것인데, 사실 확인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키예프 인근 데스나 훈련소에 입소한 수감자 중 6명이 무장 탈영했다는 소문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은 이를 부인했다. 그만큼 군부대 주변이 흉흉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