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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목적인 사랑과 바탕인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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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목적인 사랑과 바탕인 믿음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르 미싸빕’은 사면초가 상태인 사람, 외톨이, 요즘 말로 왕따란 뜻입니다.
전에도 이에 대해 묵상하면서 저의 비겁함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저의 비겁함의 고백보다는 ‘마고르 미싸빕’의 대단함을,
그래서 우리도 ‘마고르 미싸빕’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원하지도 않는 외톨이, 왕따가 있고,
우리가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마고르 미싸빕’은
의로운 외톨이요 더 나아가 거룩한 왕따이기에 본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혼자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일 수도 있지만
너무 큰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고통 그 자체가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죽고 나면 모두와 헤어지고
자기만 영원히 혼자 되는 걸까 봐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것도 버림받아 혼자 될 때 더 두렵고 불안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 혼자 되는 것도 두렵지만
사랑하는 이가 나를 버려버려서 혼자 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지요.
그러니 이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가 없으면 혼자 되려는 사람이 없고,
또 혼자 되는 것을 자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운 외톨이를 왜 되려 할까요?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옳은 소리를 하면 외톨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무릅쓰고
얘기하는 것인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소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경우 하느님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사랑하시고 공동체에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기에 싫고 두렵지만 그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목적이라면 믿음은 바탕입니다.
하느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 까닭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바탕에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옆에 계실 거라는 믿음,
복수가 필요하다면 그 복수를 하느님 친히 해주실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이 중심추처럼 밑에 묵직이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지,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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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자매님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신부님, 저는 사는 게 재미없어요.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에요. 지루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중년의 나이를 넘기면서 이런 말씀 하시는 분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루함과 무기력함이 과연 나이 탓일까요? 오히려 삶의 태도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어떤 회합에서 “그거 내가 다 해봤는데 소용없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삶을 과거의 방식대로만 살려고 하기에 지루할 뿐입니다.
어떻게 삶을 대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지루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으십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에는 책 읽는 것을 지루하게 여겼고 또 재미없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습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과거의 한 체험을 계속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너무 재미있고 신날 것이라며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 먹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만, 삶의 태도를 바꿔서 멋지게 사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엄하게도 주님께 돌을 던지려는 유다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그 일들은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죄인으로만 만들고 있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죄인으로 만드는 어리석음 안에 머뭅니다.
크고 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작고 부족한 나의 머릿속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 때, 일상 안에서 멋지고 신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거부하는 몸짓이었고, 죽이려는 적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으로 주님을 잡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재미없는 삶이 아닌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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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살다 보면 우리의 삶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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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 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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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기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찰합니다. 그야말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으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해야 합니다.
분명,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요, 신입니다’(요한10,35).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하시되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고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증언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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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론은 제2의 신이다.(Mass Media is the second God.)'이란 말이 있습니다.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언론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언론이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크고 중요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견을 형성하고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언론은 권력과 통제의 수단으로도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언론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력에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합니다. 언론이 편향적이거나 왜곡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거나 잘못된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언론이 권력에 의해 조작되거나 통제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 영향력이 악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언론은 제2의 신이다"는 표현은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그 영향력과 책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편식과 과식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언론에 의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에 따라서 맹목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편향된 언론은 아닌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그렇게 보입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권력에 의해서 사유화되는 언론이 가지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권력과 야합한 언론에 의해서 단죄되었고,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매카시 광풍’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증거도 없이 매카시는 ‘우리 사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언론은 그것을 공개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사람들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언론도 권력과 야합했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폭도들이 소요를 일으켰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과 균형 잡힌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편식과 과식을 피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하였지만 권력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이 단죄를 받고, 악인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세상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권력에 야합한 언론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언론의 선동에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깨어 있는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언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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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돌을 던지는 행위는 누가 봐도 명확한 죄를 저질렀을 때 집행되는 처벌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신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왜 나에게 돌을 던지려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주님의 죄는 하느님을 자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자처하신 적이 없습니다. 늘 하느님 아버지께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이 베푸신 모든 것에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동이 선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들 사이 사이에 악이 숨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악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주님의 빛이 비춰지는 것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의 빛이신 주님을 사라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악은 실패하고 맙니다. 선동된 사람들이 돌을 집어 들기는 하였지만 주님의 말씀과 행동 앞에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비추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 중 우리를 아프게 하거나 죄로 물들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빛은 우리를 늘 살필 뿐입니다.
빛을 따라나섭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을 믿고 그분을 따라나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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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질 한다는 것은...
손가락질 한다는 것은
한 손가락은 상대에게
세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게 됨을 기억하세요.
다른 사람을 보는 능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나를 보는 능력을 키워야합니다.
존중 받지 못했다는 분노를 간직하기 전에
나는 존중했는지를 먼저 자문해야합니다.
내 아픔을 토로하기 전에
먼저 아픔을 주었는지를 따져봐야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탓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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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내적 힘의 원천인 말씀과 믿음-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2-3ㄱ)
브라질 교회의 6차 사회주간(3,20-22)에 교황님 보내 메시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 얼굴을 보도록 하자”라는 말씀과 한 이민자를 품에 안으며 하신 솔직한 위로의 말씀이 감동이었습니다.
“나 역시 더 좋은 미래를 찾아 떠난 이민자들의 아이였다."
(I too am a child of migrants who set out in search of a better future.)
바로 이런 솔직함이 교황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하느님 떠난 인간 영혼은, 정신은, 마음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생명이자 빛이신,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을 때, 잃을 때 급속히 어둠 속에 무너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제 방문했던 분과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리대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듭니다.”
“힘들 것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날로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진리가 되어가고 자유로워집니다. 더불어 튼튼해지는 영혼이요 정신이요 마음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할 때 희망과 기쁨, 감사가 뒤따를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 말씀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와 요한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두분 다 무지의 악한 세력에 포위되어 악전고투의 절망적 상황입니다만,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은 참으로 견고합니다. 내적 힘의 원천은 바로 말씀과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에 속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독서 앞부분은 생략됩니다만 아까워 인용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내적 힘의 원천임을 봅니다. 말씀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마고로 비싸빕”은 예레미야의 별명입니다.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인데 이 말을 외쳤기에 이런 별명이 붙은 듯 합니다. 참으로 가까운 친구들 마져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만 바라는 악전고투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돌파해 나갈 수 있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주님 고백과 하느님 찬양이 우리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와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립니다.”
하느님 고백에 곧장 이어지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주님께 노래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가난한 영혼들을 참으로 강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 찬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찬양과 더불어 날로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시편성무일도를 통해 주님 향한 믿음과 희망을, 사랑을 고백합니다. 고백과 함께 가는 믿음이요 내적 힘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사면초가의 상황은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재현됩니다. 흡사 무지의 악과 싸우는 모습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려 합니다. 무지에 닫힌 마음의 눈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무지의 편견에 눈먼 유다인들을 다시 일깨우십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새삼 강조되는 믿음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업적을 통해 주님을 깨달아 알 수 있기에 믿음이 우선입니다. 믿으면 압니다. 믿으면 보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자작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늘 힘께 계시기에!”-2023.1.21.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이 좋은날이라는 고백 역시 낙관적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런 믿음 또한 은총이요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깨달아 알아 가면서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날로 자유로워지는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적대자들을 피신하지만 눈밝은 이들은 곳곳에서 주님을 찾아와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시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백하며 믿습니다.
결국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도 한번 힘차게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말씀을 실천할 때 더불어 굳건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은총입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모범입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용에 나오는 맹자의 말씀 중 덕은 믿음으로 바꿔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다산
“큰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얻는다.”-중용
믿음의 큰 덕을 쌓아가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은총과 함께 가는 노력입니다. 믿음의 은총과 더불어 평소 믿음의 훈련이, 노력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온맘을 다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선택과 훈련의 습관화와 더불어 날로 성장, 성숙해가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생활에서 은총은 전제로하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좋은 덕목의 자발적 선택과 더불어 훈련과 습관이 영성생활에 참으로 긴요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곤경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시편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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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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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아리우스파와 유대인이 같은 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사람”이라고 하고, 당신들[아리우스파]은 그분께 ‘당신은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은똑같이 그분께 ‘당신은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고 외치며 똑같은 신성모독의 무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며, 그분께서 참된 탄생을 통한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그분의 말씀이 두 분의 본성이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라는 진술임을 부인합니다. 당신들은 그 대신 우리에게 새롭고 기이하고 낯선 신을 제시합니다. … 요컨대, 당신들은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탄생으로 인한 아들이 아니고, 실상 신이 아니며,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피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
요한이 기록한 거룩한 복음서에서, 우리는 주께서 제자들에제 말씀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본받으셨고,, 우리도 본받아야 할 세 겹 사랑을 봅니다. 첫 번째 사랑은 자연적인 사랑이고, 두 번째 사랑은 은혜로운 사랑이고, 세 번째 사랑은 신적인 사랑입니다. 물론 하느님 안에는 하느님과 같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이 세 겹인 것은 우리의 지각 작용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것 - 자연적인 사랑 –에서 더 좋은 것 – 은혜로운 사랑 - 으로, 더 좋은 것에서 훨씬 더 완전한 것 - 신적인 사랑 - 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더 작은 사랑도 더 큰 사랑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단순하시고, 순수하시고, 본질적인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141)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새로 세례받은 사람들의 모범인 바오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가 얼마나 크게 변화했는지 보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큰 변화가 그에게서 일어났는지 보십니까? 그가 하늘나라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이후 얼마나 큰 열성과 믿음, 용기, 인내, 관용,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가득차서 살았는지 보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늘로부터 큰 은총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나는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1코린 15,10).
저는 여러분이 이 모범을 따르기를 요청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부터 즉시 그리스도와 그분께 대한 믿음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더 풍부한 하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고,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어진 옷은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할 것이며, 주님께서 자유롭게 건네주시는 은사에 대해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행을 행하기는커녕 아직 큰 죄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것을 다 사해주시고 나아가 여러분을 치유하여 낫게 하시고 큰 은총까지 주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 은총을 잘 지켜 나가고 그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 나가면 얼마나 더 큰 은총을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고 사랑하시겠습니까?(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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