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년 전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영화 <시에라 마드레의 보석> 속 산적들이 이야기했던 ‘역겨운 계급장’이라는 표현을 패러디해, 마세라티 쿠뱅 콘셉트카를 가리켜 “우리는 역겨운 마세라티 SUV 따위 필요 없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SUV에 상당히 부정적인 나는 FCA의 적으로 낙인찍혀 콩코르소 델레간차 빌라 데스테의 심사위원에서 해고됐고, 공식적인 악당 취급을 받았다.
엄청난 이익을 내며 팔 수 있는, 무겁고 비효율적이며 매력 없는 차를 만드는 데 뛰어든 자동차업계 고위층의 욕망은 내 생각과 상충했다. 지금은 모든 자동차 브랜드가 배달용 트럭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한 듯하다. 쉐보레 서버밴은 물론이고 성역이나 다름없는 롤스로이스나 곧 뛰어들 페라리까지도. 이제는 내 마음에 가장 크게 와닿는 브랜드 중 하나인 애스턴마틴까지 마침내 군중심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나 싶다.
적어도 DBX는 트럭보다는 키 큰 패스트백에 더 가깝다. 내가 좋아하는 현역 디자이너 중 하나인 마렉 라이히만이 디자인해 멋있다는 건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독창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폐소공포증을 유발하고 타기 불편한 라피드보다는 좀 높고, DBX보다는 낮으며 비례가 멋진 4도어 세단이었다면 아마 이 둘보다 더 나았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면 좋겠다. 내가 ‘호화로운’ 감각이라고 추켜세우며 최상급이라 하지 않는 건 SUV 특유의 이도 저도 아닌 어색한 비례 때문이다. 그저 짜증스러울 뿐이다.
70년 넘는 세월에 걸쳐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대를 이어 발전시킨 애스턴마틴의 그릴 형태는 이 차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비록 저렴한 포드 모델 몇몇이 흉내 내긴 했어도 롤스로이스의 판테온 그릴이나 메르세데스 벤츠의 세 꼭지 별만큼이나 독특하다. 누가 그런 그릴을 만들었는지는 잘 알 것이다. 여러분도 나처럼 그 회사의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기를 바라겠지만 말이다.
DBX가 멋진 SUV가 아니라는 건 아니다. 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SUV 중 최고일 거다. 긍정적이라면 이 차는 아마도 모든 SUV 가운데 가장 공기역학적일 것이다. 비스듬한 지붕선과 뒷유리를 덮는 스포일러, 멋진 공기흡입구가 있는 비교적 깔끔한 옆모습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앞 문짝 길이의 4분의 1쯤 되는 반짝이는 크롬 장식은 DBX의 차분한 성격에 어울리는 매력적이며 절제된 표현이다. 가로바 설치를 위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빼면, 루프 레일은 옆 유리로 공기 흐름이 내려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울타리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정리해 본다. 나는 럭셔리 SUV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쁜 생각을 훌륭하게 구현한 이 차만큼은 참 좋다.
글_로버트 쿰버포드(Robert Cumberford)
옆모습
1. 바짝 날이 선 이 검은색 부분은 DBX가 벽을 향해 후진하면 가장 먼저 닿을 것처럼 보이지만… 뒷면을 가로지르는 이 평평한 부분이 뒤로 살짝 더 나와 있다. 훨씬 더 쉽게 부서질 것 같다. 2. 밝게 빛나는 장식을 옆 유리 위쪽에만 두르고 아래쪽에는 뺐다. 현명한 선택이다. 우아하다. 3. 옆에서 봤을 때 루프 레일처럼 보이지 않도록 꼼꼼하게 다듬었다. 매력적이다. 4. 펜더에 있는 측면 공기배출구에서 밝은 금속 장식이 뻗어 나온다. 형태적으로는 절제됐지만, 시각적으로 약간의 속도감을 더한다. 5. 펜더 공기배출구 뒤로 날을 바짝 세워 뻗은 면이 있다. 이 면이 안으로 움푹 들어간 커다란 음각 면에 비친다. 어떤지 보자. 6. 도색한 문짝 표면의 부푼 부분과 검은색 문턱 위쪽의 솟아오른 부분에 각각 뻗은 가로선들은 커다란 휠 때문에 짧아 보이는 높은 차를 낮아 보이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7. 시선을 이끄는 밝게 빛나는 면을 보자. 앞 펜더 공기배출구에서 이어지는 낮은 면이 부드럽게 휘어져 내려간다. 보다 미묘하게 선을 강조한다. 8. 뒷유리 위에 있는 이 스포일러는 지붕선을 늘려 공기저항을 줄이는 실용적인 역할을 한다. 9. 뒷유리 아래에는 뚜렷하게 파인 곡면이 있는데 차체 뒤쪽으로 뻗어나가면서 스포일러처럼 도드라지게 솟아오른다.
앞모습
1. 이 산뜻한 선은 그릴 바깥쪽 아래를 지탱하는 면에서 솟아올라 헤드램프 아래쪽에 움푹 들어간 면을 에두른다. 2. 이 또렷한 선은 마찬가지로 볼록한 보닛 표면과 앞 펜더 안쪽의 오목한 부분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면의 대비를 멋지게 표현한다. 3. 루프 레일은 밝은 금속 장식으로 미묘하게 빛난다. 4. 오목한 면으로 둘러진 양쪽의 보닛 속 홈에서 또 다른 날카로운 모서리가 솟아오른다. 5. 공기배출구 안에 있는 풍향판 끝부분을 장식한 밝은 금속이 은은한 빛을 낸다. 6. 면으로 기교를 부린 부분은 또 있다. 펜더 꼭대기의 안쪽은 위로 부풀었고, 바깥쪽은 테일램프까지 이어지는 강렬한 선 바로 아래를 파고들었다. 7. 그릴 테두리는 장식 하나 없이 비교적 단순하게 파냈다. 8. 브레이크 냉각용 공기흡입구는 도드라지지 않는 루프 레일을 제외하면 차에서 가장 대담하게 장식한 부분이다. 9. 그릴이 파여 있는 면과 돌출된 모서리를 지지하는 부분 윗면 사이에는 날카로운 경계가 있다. 10. 차체 색상의 모서리 아래 공기흡입구처럼 보이는 이 부분은 차체 전체 너비만큼 벌어져 있다. 11. 아주 얇은 여섯 개의 그릴 바는 기교 있는 단정함에 상당한 설득력까지 갖췄다. 다소 두터운 형태에 약간의 시각적인 가벼움을 더한다.
뒷모습
1. 후방 반사판은 차체 색상의 뒷면 바로 아래 있는 디퓨저 영역의 모서리 위쪽에 조심스레 자리했다. 2. 사이드미러가 큼지막한 건 뒷유리가 작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후방 시야가 넓지 않기 때문이다. 3. 뒷유리 너머 차체 표면에 만들어진 이 작은 파인 부분은 날카로운 선으로 이어져 스포일러 끝부분이 된다. 4. 차체 뒤쪽을 가로지르는 조명 띠의 가운데 부분인 이곳은 법적으로 요구하는 보조 제동등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5. 회사 이름 서체는 절제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섬세한 우아함에 감탄할 만하고… 6. 테일게이트 끝부분에 자리한 커다랗고 과장된 디자인의 번쩍이는 모델명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7. 배기구는 검은 부분의 아령 모양으로 파인 곳에서 돌출돼 뚜렷하게 보인다. 8. 차체의 부드러운 곡면이 만들어낸 선과 테일게이트가 빚어낸 강렬한 선이 수평을 이뤄 뒷부분을 가로지르는 또렷한 띠를 이룬다. 높아 보이는 차체를 보다 낮아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9. 검은색 영역의 움푹 파인 부분의 테두리는 아령 모양과 비슷하다.
앞 측
1. 차체 옆에 커다랗게 파인 부분은 높이가 시각적으로 낮아 보이도록 하는 데 영향을 준다. 2. 그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늘씬한 스포츠 쿠페처럼 보이도록 차체 아래쪽을 어둡게 칠해 구분되도록 한 것이다. 다만 유리 부분이 차체 상단의 높은 쪽에 자리하고 있다. 3. 차체 앞쪽 끝부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넣은 것은 DBX의 실제 비례를 감추기 위해서다. 4. 유선형으로 다듬은 덮개를 한 헤드램프는 1960년대 이탈리아의 무수한 경주차와 GT카들을 연상시킨다. 5. 은근히 튀어나온 이 부분 역시 왜건보다는 스포츠카를 더 연상시킨다. 6. 사이드미러는 큼지막해서 뛰어난 시야를 도울 것이다. 7. 룸미러를 지지하는 부분의 이 커다란 센서 장착 부분도 교묘하게 처리했다. 후방 시야는 조금 작은 뒷유리 때문에 제한적일 듯하다.
실내
1. DBX의 실내는 우아하게 호화롭다고 표현하는 게 전형적인 영국 차에 걸맞은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2. 좌석을 덮은 가죽의 무늬와 표면처리는 멋진 절제미로 아주 세심한 디테일을 보여준다. 3. 안쪽 도어 패널을 단순하고 평범하게 만든 건 이전 시대의 우아함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정말 매혹적이다. 4. 운전대에 대조되는 두 가지 색을 함께 쓴 다른 차는 기억나지 않지만, 매력적이면서 지적이다.5 날카로운 이 두 개의 돌출부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섬세한 장인정신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가죽이 우글쭈글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6. 매끈하게 파놓은 부분에 선글라스를 올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수긍할 만하다. 7. 의무 사항인 ‘에어백’ 표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심하게 처리했다. 좋다. 사실상 불필요한 것 아닌가? 8.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디스플레이는 커 보이지 않지만 10.25인치나 된다. 쓰기에도 보기에도 충분히 크다. 9. 인포테인먼트 조절장치는 커다랗지만, 왠지 다루기 좋은 느낌일 것 같다. 10. 도어 손잡이 주변 장식은 메르세데스 벤츠가 30년 전에 했던 것과 무척 닮았다.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11. 보조 버튼들을 길게 늘어놓는 것은 요즘 차들의 필수 요소처럼 느껴진다.
뒤 측
1. 앞 펜더 단면은 확실히 스포츠카를 연상시키며,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2. 펜더에 있는 열기 배출구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매우 크다. 3. 문짝 절개선 때문에 문 위쪽 부분이 얼마나 통처럼 보이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4. 멋지게 기운 D 필러는 차체 윤곽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든다. 5. 가는 테일램프는 차체를 넓어 보이게 한다. 6. 색으로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뚜렷한 비례를 강조했지만, 갑작스럽고 날카롭게 구분되는 이 지점은 전혀 우아해 보이지 않는다. 7. 이 부분 위를 깊이 파놓은 덕분에 이 면에 하늘이 길게 반사된다. 8. 측면 공기배출구 맨 아래에 앞을 향해 튀어나온 작은 삼각형을 주목해 보자. 하늘빛을 반사하면서 차체 색을 칠한 부분의 튀어나온 부분이 더 길어 보이게 만든다.
인터뷰 마렉 라이히만
베테랑 영국인 디자이너인 마렉 라이히만은 29년 동안 자동차업계에 몸담았고, 15년간 애스턴마틴에서 일했으며,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고 있다. 그에게는 직함에 어울리는 돋보이는 이력이 있다. BMW 시절 롤스로이스와 랜드로버 브랜드의 디자인을 모두 책임졌다. 또한, 유명하지만 곧잘 어려움을 겪어온 애스턴마틴의 매우 인상적인 그랜드투어링 쿠페와 세단들을 만들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라이히만은 DBX를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는 ‘농구 팀 전원을 태우고 달릴 수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스타팅 멤버 다섯 명을 말하는 것이지만, DBX는 그만큼 넉넉한 실내를 가졌다. 키가 무척 큰 라이히만도 운전석 뒷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 계약에 앞서 먼저 차를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VIP 고객들 역시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크다는 반응이 많다. 멀리서 봐도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는다. 가깝게 다가서야만 실제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전체적인 비례는 정말 좋다. 비정상적으로 긴 휠베이스 덕분이다. DBX의 플랫폼과 관련된 다른 개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비례다. 그렇지 않았다면 디자인 팀에게는 아마 지나치게 큰 제약이 됐을 거다.
라이히만은 “비례와 관련해 감안해야 할 것도, 크기에 대한 제약도 없었다”며 “앞뒤 오버행이 짧은 건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쪽으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엔진을 앞바퀴 뒤에 놓아 무게 배분에 유리하다”며 “애스턴마틴인 만큼 역동적인 주행 특성은 탁월하다”고 발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다.
공기역학에 관한 질문에 라이히만은 안정성을 고려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DBX는 어쨌든 꽤나 빠른 차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성능 SUV로서의 능력을 확인하는 데 깊이 있는 시험을 하도록 자극받았다. 여기에는 컴퓨터 유체역학을 활용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미 정해진 형태에 수많은 짧은 줄을 붙여 시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차체가 커다란데도 무게는 일부 경쟁모델보다 훨씬 가볍다. 최대한 가벼운 소재를 선택하고자 한 노력의 결실이다. 구조는 알루미늄을 주요 소재로 만들었다. 단, 차체 뒤쪽에 커다랗게 뚫린 프레임 전체는 복합 소재로 만들었다. 트렁크 문이 열리고 닫히며 받는 높은 스트레스와 무게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여러 가지 제한 조건이 서로 영향을 준 탓에 팀은 무거운 요소인 뒤 와이퍼를 제거했다. 대신 뒷유리 꼭대기에서 길게 뻗어나온 스포일러 앞쪽에 틈새를 만들어 뒤 유리 위로 깨끗한 공기가 흐르도록 유도했다.
이 작은 틈새 덕분에 유리는 물론 차체 아래 공기흐름도 깔끔하게 유지된다. 물론, 그건 이 차가 애스턴마틴이기 때문이다.
GM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할리 얼의 눈에 띄어 GM 디자인실에 입사했다. 하지만 1세대 콜벳 스타일링 등에 관여했던 그는 이내 GM을 떠났고 1960년대부터는 프리랜서 디자인 컨설턴트로 활약했다. 그의 디자인 영역은 레이싱카와 투어링카, 다수의 소형 항공기, 보트, 심지어 생태건축까지 아울렀다.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그의 강직하고 수준 높은 비평은 전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1985년 <모터트렌드> 자매지인 <오토모빌>의 자동차 디자인 담당 편집자로 초빙됐고 지금까지도 매달 <오토모빌> 지면을 통해 날카로운 카 디자인 비평을 쏟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