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백제와 일본 연표 391년~404년
* 391~404년까지의 연도는 광개토태왕 비문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일본서기(392)와 삼국사기(392)는 비문(391)과 일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일본서기
神功 65년(서기 385)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이 죽었다. 왕자인 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辰斯 (제16대, 재위 385 – 391)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
(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
삼국사기
진사왕8년(391)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일본서기
應神 3년(서기 391) 백잔 辰斯王(제 16대, 재위 384 – 391)이 백제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카시코키 쿠니(貴國)의 천황에게 禮를 잃었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兎宿禰)를 파견하여 그 외교자세를 따지자 백잔의 國人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阿花 (제 17대 아신왕, 재위 391 – 404)를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삼국사기
아신왕4년 (서기 394) 가을 8월 좌장 眞武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이었다.
삼국사기
아신왕6년 (서기396) 여름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일본서기
應神 16년 (404년) 百濟記에 나오는 기사이다. “ 아화왕 (阿花王, 第17代 阿辛王, 재위 391 – 404)이 카시코키 쿠니 (貴國, 여휘가 다스리는 나라)에 대하여 독립하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영토의 토무타레(枕弥多禮), 켄난(見南), 시시무(支侵), 코쿠나(谷那)라 하는 東韓의 땅을 잃었다. 그리하여 왕자의 토키(直支) (후의 제18대 腆支王) 을 백잔에 보내어 왕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아신왕 14년 (서기 404) 9월 왕이 죽었다. 일본서기 應神16년 (404년) 百濟의 阿花王(第17代 阿辛王, 在位 391 - 404)이 죽었다. 천황(여휘)은 인질로 와 있던 토키왕 (直支王, 第18代 腆支王, 在位 404年 - 420年) 을 귀국시켜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린 東韓의 탈환에 협력했다. 여기서 東韓이란 카무라노 사시(甘羅城), 카우난노 사시(高難城), 니리무노 사시(爾林城)를 말 한다.
삼국사기
전지왕 원년 (서기 404) “전지왕(腆支王) 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하였다.”
* 양서(梁書)에 영(映)이라고 나오는 인물은 백제의 여영이다. 백잔의 전지왕이 아니다.
아신왕이 재위 3년에(393) 태자로 삼았고, 6년 여름에(396)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攝政]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혈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왜인(倭人)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久尔辛)을 낳았다.
삼국사기
전지왕12년 (서기416) 동진(東晉)의 안제(安帝)가 사신을 보내 여영을 책명(冊命)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 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 이때 전지왕과 여영은 다른 인물이다. 전지왕은 백잔의 왕이고 여영은 삼한의 왕이다
서기 420년 남송의 高祖 劉裕가 황제가 되자 백제왕의 관직을 鎭東將軍에서 鎭東大將軍으로 올렸다.
일본서기
應神 25년 백제의 直支王(第18代 腆支王, 在位404 – 419) 이 죽었다. 그래서 구이신 (久爾辛, 第19代 久尓辛王, 在位420 - 427)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모쿠만치(木滿致) 가 국정을 행하였다. 그러나 王母 八須부인과 통정하는 등 횡포한 짓이 많았다. 천황이 이를 듣고 그를 소환하였다.
위의 기사에 이어서 일본서기는 “百濟記”를 인용한다. “모쿠만치(木滿致)는 모쿠라콘시(木羅斤資)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여성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 아비의 공적으로 미마나(任那)의 업무를 담당했다. 백제에 온 뒤 카시코키 쿠니(貴國)를 왕래했다. 야마토 조정으로 부터 직제를 받아, 백제의 중책을 맡았다. 권세가 한창일 때 야마토 조정이 그 횡포함을 알고 소환하였다.”
남송 少帝 景平二年 (서기 424) 映이 長史 張威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 이때 영은 또한 구이신이 아니다. 여영은 백제왕(삼한왕), 전지왕과 구이신은 백잔왕이다.
남송 태조 元嘉2년 (서기 425) 황제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에게 장문의 격려의 메세지를 보낸다.
毗有왕이 427년 구이신을 몰아내고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430년 元嘉7년 백제왕 餘毗가 공물을 보내니 餘映에게 주었던 직함을 여비에게 주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에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남하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공격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가 궤멸하였다. [왜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