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68
11월8일[연중 제3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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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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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lPD5DJ0Sng
[작은형제회 김재인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부산교구 봉래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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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은 꽤 의아하고 당혹스럽습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초대는 참으로 난감한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으시는 예비 신자나 초심자들이 접했을 때,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너무나도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주님의 자리를 좀 더 앞쪽으로 이동시키라는 초대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에 푹 빠져 살아가는 우리, 인간 관계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살아가는 나머지 잊고 살았던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고, 그분께 우선권을 드리라는 초대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첫 번째로 선택해야 할 대상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우리를 선택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선택은 최우선적인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그후 이어지는 선택은 너무나도 당연히 배우자와 자녀, 부모와 형제와 자매, 친지와 친구 등등 동심원처럼 퍼져나가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선택이 뒤죽박죽된다면, 그것처럼 웃기는 일이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주님, 우리의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시는 주님은 뒷전인채, 별것도 아닌 무가치한 대상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에 되겠습니까?
배우자나 자녀,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저 뒷전이고, 엉뚱한 사람, 엉뚱한 대상이 앞쪽을 차지할 때,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형제자매가 한 가족이 될 것이니, 지상에서부터 그런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에 앞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께 우선권을 드리며, 그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언젠가 도래할 새로운 질서의 세상에 미리 맛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모든 가치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혈연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열두 사도가 새로운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 것처럼, 오늘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분의 가족으로 수용됩니다.
새로운 혈연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의 영적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통해 그분의 형제가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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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내가 가난해지기만을 기다리신다>
베를린 뒷거리 한 모퉁이에서 거지 소녀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앞에는 골목의 꼬마들만 몇 명 모여서 구경할 뿐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녀는 기운이 빠져 힘없이 팔을 내려뜨렸습니다.
그때 어떤 젊은 신사가 소녀에게 다가가더니 바이올린을 받아 들고는 익숙한 솜씨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황홀한 멜로디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아낌없이 갈채를 보내며 돈을 던졌습니다. 젊은 신사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미소로 답례하고 돈과 바이올린을 소녀에게 건네주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젊은 신사는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미하엘 슈마허가 비행기 탑승시간이 늦었을 때 택시를 대신 운전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택시기사 정도면 그래도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지만 F1(세계 제1의 자동차 경주)의 황제에게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핸들대를 꼭 잡고 있다면 아무리 슈마허라도 대신 운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녀가 자기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겠다고 끝까지 우겼다면 아인슈타인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먼저 힘을 빼기를 원합니다. 힘주고 버티고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예수님 만나면 다 망한다고 하면 크게 놀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부자에게 가진 것을 다 팔고 따르라고 하셨고 자캐오도 괜히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당신을 따르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 만나 누구 하나 잘 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칫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에서 더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나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예수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 다가오심을 명확히 알아야 신앙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소유욕을 끊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애정도 소유욕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소유욕을 끊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소유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봉헌하는 제단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탑을 세우기 전에 그 탑을 세울 경비가 충분한지 먼저 계산해 보는 것처럼, 혹은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싸울 것인지 화평을 청할 것인지 계산해 보는 것처럼, 그렇게 먼저 계산해 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계산해야 할 것은 내가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입니다. 그 십자가는 결국 자기의 소유를 다 버릴 수 있는지, 없는지로 판결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엄청난 우환이 들이닥쳤다고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잘 되게 만들어주는 분으로 착각하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서 당신이 대신 핸들을 잡아주시기 위함입니다. 대신 연주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세상에서 망하고 가난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힘이 빠졌을 때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분은 나의 소유를 모두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버릴 수 있는 만큼 그분은 나를 차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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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외국에서 지내던 사제들은 한국에 들르면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저도 지난번 휴가 때,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러 교구청엘 갔습니다. 교구청 마당엘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저는 교구청에 8년을 살았습니다. 마당의 나무, 성당의 감실, 복도에 있는 그림도 반가웠습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사목국에서 근무했습니다. 20년 전이니 젊은 날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는 ‘교육담당’이었습니다.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했습니다. 남성, 여성 총구역장을 위한 피정을 준비했습니다. 사목국에는 사제들이 10명 있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띤 토론을 했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2004년 의정부교구가 분할되면서 몇몇 신부님들은 의정부교구를 선택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는 성소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제’라는 제목으로 3부작 다큐를 제작하였습니다. 본당 성소후원회 방문을 하였습니다.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영성, 신심 분과’를 맡아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8년을 지냈던 곳이라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어달리기’처럼 이젠 다른 신부님들이 교구청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식당에서 식사하고, 주교님과 면담을 한 후에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온 지도 어느덧 5년이 되어갑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맡았습니다. 신문홍보를 위해서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본사에서 오는 자료를 다운받았습니다. 월요일에는 직원 미사, 수요일에는 직원회의가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과 팬데믹의 여파로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주최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으신 주교님께서 ‘바쁘게 사네.’라고 하셨습니다. 동북부 엠이 대표신부를 3년 동안 하였습니다. 주말 체험도 있었고, 피정도 하였습니다. 가을이면 소풍도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동북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남성 제42차 꾸르실료 교육에 함께 하였습니다. 퀸즈성당의 평일미사를 도와주고 있고, 브루클린 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린 것’은 아니지만 나름 바쁘고 분주하게 지낸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언젠가 다시 뉴욕으로 온다면 그때도 ‘감회가 새롭다.’라고 느낄 것 같습니다. 신문사, 성당, 엠이, 꾸르실료는 저의 뉴욕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의 사제들은 저의 뉴욕 생활에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구청에서 지냈던 것도, 뉴욕의 신문사에서 지내는 것도 제게는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어디에서 지내든지 필요한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삶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교구청에서의 생활도, 뉴욕에서의 생활도 감사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고린토전서 13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온갖 심오한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교구청에서의 생활도, 뉴욕에서의 생활도 ‘가시방석’과 같을 것입니다.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품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배반했을지라도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랑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의 또 다른 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십자가는 허무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다면 그곳이 어디이든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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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이 말씀은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이다. 박해 때에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였고, 평화를 누리는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기 뜻을 철저하게 죽이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첫째로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하는 것과 같다. 완성하지 못하면 비웃음을 당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한 사람도 우선 충분한 열성을 쌓아두어야 한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1절)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여기에 육정, 정욕, 재물욕 등도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뜻을 품었으면 결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 돌 하나로는 탑을 완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계명 하나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는 없다.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1코린 3,12)을 지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다.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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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루카 복음 14장 26절에서 ‘미워하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선호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나를 선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보통은 돌잔치 때 돌잡이를 합니다. 손에 무엇인가 쥐고 있는 어린아이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잡으려면 꽉 쥐고 있는 손을 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하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자기 의지나 생각이나 계획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머무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며 주님으로, 예수님을 스승이며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자기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남편, 형제와 자매, 자녀와 손주,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들,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들, 그것을 버리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작은 공간과 짧은 시간을 봉헌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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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여기서 ‘미워하다.’는 ‘집착을 버리다.’입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자매, 자기 목숨”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 뒤를 따르는 길을 가로막고,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나에게 오면서”는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이고,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과 그 희망을 방해하는 ‘헛된 집착’ 사이의 ‘내적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도 그 싸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많은 길들’ 가운데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는 것은 다른 길들을 모두 포기하고 버리는 일입니다. 아무도 여러 길을 동시에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과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갈 때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치워버려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라는 말씀은, 다른 길들을 포기하고 버리는 일과 걸림돌들을 치워버리는 일은, 대충 해서는 될 일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과 같은 각오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생활은 ‘목숨 걸고’ 하는 생활”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신앙생활은 목숨 걸고 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탑을 세우는 공사’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미리 계산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시작하지도 마라.”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먼저’라는 말과 ‘계산’이라는 말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기가 쉬운데, 신앙생활은 시작하기 전에 미리 계산하고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과 갈 수 없는 사람이 따로 구분된 것도 아닙니다. 끝까지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기도문도 못 외운다,”, “나는 의지가 약해서 무슨 일이든 끝까지 못할 때가 많다.”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아예 그만두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또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은, 또 신앙생활은, 머리 좋고, 체력 좋고, 의지가 강한 ‘소수 정예 요원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머리가 좋거나 나쁜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체력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의지는? 의지가 약하다고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이 부족한 것이 의지가 약한 것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은 살 것이고, 아니면 죽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좀 더 쉽고 편하고 여유 있게 살 수는 없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하나뿐이라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이 ‘외줄타기’와 같다는 것과 또 마귀들이 항상 그 외줄을 마구 흔들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그 과정을 ‘단련’과 ‘정화’로 표현합니다.(1베드 1,6-7) 예수님의 말씀에서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다.”,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다.”라는 말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같다.”, 즉 신앙생활을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처음부터 안 믿은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협정을 청할 것이다.”(루카 14,31-32)
이 말씀은, “하느님에게 맞서려고 하지 마라.”, 또 “심판 때 자기 힘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인 하느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할 뿐입니다. 그것은 항복도 아니고 굴복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나도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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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장 25절-33절)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장 26절)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버려야 하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시하셨듯이 소유의 모든 것을 비울 때,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쳐 주신 ‘참 행복’에 이르게 되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은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듯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돌아가신 고통의 길은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의 길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비울 때에 비로소 주님의 참다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서 13장 8절)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오로는 율법에 의한 구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진정한 구원과 전인격적인 삶의 목적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과 함께 지독하게 쓴, 고통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좋아하기는 쉬워도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못 박고 침 뱉으며 모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하시도록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이 남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이기적인 감정’까지도 ‘사랑’이나는 말에 함께 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시편저자는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지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저자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죄인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우리도 낭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실망과 상처를 겪은 연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교회인 가정에서 부부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참아주고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갖고 넉넉하게 살아가야 원만한 가정을 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것은 말처럼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로는 서로의 상처의 고통도 겪지만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겪어야 하지요. 서로 사랑하다는 것은 고통도 나누어야 하고 자신이 먼저 십자가도 져야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혈연관계나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의 목숨(텐 프쉬켄 헤아우투 τὴν ⸂ψυχὴν ἑαυτοῦ’을 ‘미워하지 않으면(우 미세이 οὐ μισεῖ),’ 당신 제자가 될 수가 없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미워하다’라는 말은 가족과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는 루카와 달리 “’나보다(휘페르 에메 ὑπὲρ ἐμὲ)’,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을 ’사랑하는 사람(ὁ φιλῶν)’”(마태 10.37)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루카는 이어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마태오는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9) 라는 말씀을 전한다. 루카는 마태오와 달리 탑을 세우려는 사람이 미리 공사경비를 계산해야 하고,
싸움에서 만 명을 거느린 임금이 이만 명을 거느린 적을 맞설 수 없으면 평화협정을 청해야 한다는 독립적인 이야기(루카 14,28-32)를 삽인한다.
그리고 루카는 결론으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5)라는 주님을 말씀을 전한다.
2) 우리는 흔히 ‘좋아한다’, ‘마음에 든다.’ 또는 그 사람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며 산다. 그런데 ‘사랑한다.’라는 말은 사실 쉬울지 모르나 실제에 있어서는 어렵다는 사실을 안고 산다.
이탈리아어에 이런 말이 있다. ‘고통이 없는 사랑은 없다.(amore non è senza amaro)’ ‘사랑하다’라는 ‘아마레 amare’에서 ‘사랑’이라는 ‘아모레 amore’도 나오고 ‘쓴맛’이라는 ‘아마로 amaro'도 나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랑’과 ‘쓴맛’은 사촌지간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쓴 맛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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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금하는 율법의 힘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 데에 너무나 뚜렷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보다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려는 이들의 사랑과 이 마음에서 우러난 희생이 악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 또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였고, 믿는 이들이 그분을 뒤따라가자면 반드시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이러한 기능을 대속적(代贖的) 은총이라 합니다. 이 대속 기능은 세상이 주는 이익이나 명예로는 어림없고, 오직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그분을 닮으려면 거룩해져야 할 신앙의 요청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인도 아니시면서 마치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고, 그 물의 세례에 이어 불의 세례 즉 사랑의 세례이자 십자가의 세례까지 받으시는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십자가, 대속적 동기를 지닌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는 길이 그분의 길이었고, 그분을 따라 믿는 이들도 걸어가도록 요청받고 있는 진리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를 짓게 하는 악과 맞서신 예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의로운 마음을 지닌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의인들이 그 의로움에 만족하여 주저앉지 말고 거룩함의 경지에까지 올라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자신들은 의롭기 때문에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 위선자 아흔아홉보다는, 자신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고 고백하는 진정한 의인 하나를 하늘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악인들의 회개는 어렵습니다. 부자들의 나눔 역시 세상 끝 날까지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고백하는 의인들의 거룩한 회개가 차라리 낫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나눔이 더 쉬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또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과 나눔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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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우리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때로는 그 여정이 힘들어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우뚝 섭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잠시 길에서 벗어나 쉬어 가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목표가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처음 가졌던 확실한 목표가 보이지 않고, 곧게 뻗어 있는 것만 같았던 길은 구불구불한 오르막입니다. 갈림길이 나오면, 후회할지 모를 선택을 해야만 하기도 합니다.
많은 군중 또한 길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목표를 바라보며 그분을 따라온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다. 가족을 미워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힘겹고 견디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입니다. 설레고 감동받았던 처음의 마음은 의심과 불신으로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희망의 길이었던 그 여정이, 이제 두려움과 아픔의 여정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계속 걸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걸어가는 좀 더 편해 보이는 길을 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잠시 쉬라고 하십니다. 갈림길 앞에서 “먼저 앉아서” 우리가 걸어온 그 여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여정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집중하였는지, 혹시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그런 나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함께 들어 주셨는지, 그리고 내 욕심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고민들은 보이지 않던 희망을 점차 뚜렷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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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다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 ‘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족보다 중요하며 온갖 인간적인 권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제자들의 삶은 인간적인 욕망, 삶에 대한 자연적 갈망,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마음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비가 되려면 번데기의 껍질을 벗어야 하듯 사람도 새로운 존재,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합니다. 우왕좌왕,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야말로 잔머리 굴립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의 출가의 삶은 관심이 부족합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신이나 자녀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사 후 복사들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면서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불러 줍니다.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복사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는 아닙니다. 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합니다.' 육적인 대를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사도, 제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언젠가 생각하겠지요?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데는 어떠한 합리적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을 갈망하기까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삶이 끊임없는 ‘출가’이기를 희망하며 자녀들에게도 큰 뜻을 품고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출가의 삶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이 충만하길 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천상의 희망 안에서 끊임없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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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행동주의 심리학자 벌허스 프레더릭 스키너는 손잡이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스키너 상자’ 안에 쥐를 가두고 네 가지 조건 중 어떤 조건에서 쥐가 손잡이를 더 많이 누르는지 실험했습니다.
1)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2)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불규칙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3)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온다.
4) 손잡이를 누르면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온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손잡이 누르는 횟수는 4, 3, 2, 1의 순서였습니다. 즉, 손잡이를 누르는 것은 먹이가 나오는 것과 관계있을 때 더 많이 눌렀습니다. 그런데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올 때보다는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올 때 더 많이 눌러댔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도박처럼 불확실한 보상이 탐닉을 유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보상에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착한 일 한 번에 한 번의 좋은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불공평하다며 또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악행에 대해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왜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보상은 불확실한 보상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부족한 인간의 존재에서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늘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의 보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늘 복음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 말씀하시지요. 사랑하라고 그토록 강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왜 미워하라고 하실까요? 하느님 사랑을 첫째 자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뒤로 돌리다’, ‘이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 집중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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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제자>
루카 14,25-33 (버림과 따름)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자>
자신의 길을
내지 않으며
스승의 길을
따를 뿐이니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리고
스승의 것을
지닐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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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도록>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돌아보시며 하신 말씀인데,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군중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는데 왜 따라오느냐? 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따라오느냐? 그런데 네가 진정 내 제자가 되려면 너 자신과 네 가족을 미워해야 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만 한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생각도 말고, 나를 따라오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가족에게 돌아가라!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이 말씀을 하시니 군중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고 아버지께 가시는 것이니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그저 성지순례나 단풍놀이 가는 것이 아니지요. 주님을 성지순례나 단풍놀이 인솔자로 따라간다면 자신과 가족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가족과 함께 희희낙락하며 가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로 가고, 하느님께 가고, 하늘나라로 가기에 이 세상을 애착하는 나와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가족을 미워해야 하는 거지요. 몇 차례 얘기한 바 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거지’ 하며 생각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도 않고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되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이것이 힘들고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더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고, 죽어도 하느님 사랑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있을 거라는 통공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이 두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11월 위령 성월이 이 통공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게 하는 성월이 되도록 한 달을 거룩히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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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버림, 따름,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시편 89,2)
“삶은 선물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Life is a gift! God loves us! We are all brothers and sisters!“
지난 12월6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세계 84개국에서 7500명 어린이들이 모인 가운데 청소년들을 향해 외친 오늘날 주님의 참 제자, 88세 노령의 영원한 젊음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간명하면서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본질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사랑의 메시지인지요!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는 말씀도 멋집니다.
“젊은이들이여! 언제나 기억하라! 삶은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함께하고, 소통하고, 나누고, 주는 놀라운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기도하자. 우리 성모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다. 언제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하자!”
참으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교황님인지 깨닫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만나고 일하는 분이 세계의 영적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님일 것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교황님 모습이 늘 감동입니다.
요즘 강풍이 불고 간간히 비가 오고 나니 단풍잎들은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들 본질로 남아 있는 겨울나무들을 통해 푸른 하늘이, 불암산이 훤히 드러나니 참 좋습니다. 문득 예전 써놨던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겨울나무들입니다. 가난한 듯하나 참으로 주님을 배경으로 한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주님만을 따르는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과 독서가 답을 줍니다. 버리고 따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 내용을 나눕니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말 그대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누구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용법상 이렇게 번역하지만 제대로의 뜻은 세상 누구도 심지어 자신까지도 주님보다 선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 심지어 자신에게까지 집착에서의 이탈을 강조합니다.
참으로 이처럼 삶의 중심인 주님을 사랑할 때 사람들에 대한 아가페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눈 밝은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우선적인 주님 사랑 없이 눈먼 맹목적 집착의 사랑이라면 모두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을 늘 기억하는 위령성월 11월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참으로 죽음을 늘 기억한다면,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산다면, 비로소 겨울나무처럼 모든 인간 집착을 떨쳐버리고 주님만 따르는 본질적 깊이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어지는 망대의 비유와 전쟁의 비유입니다. 무모하게 주님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잘 점검하며 자기 정도에 맞게 순리대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람 숫자만큼 십자가 양상도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호오好惡나 우열愚劣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무지한 까닭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끝까지 골인 지점까지 한결같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보다는 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자기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묵묵히,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앞서가시는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運命愛의 정신으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참으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참사람이요 구원입니다. 다 버려도 제 십자가만은 끝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루하루 날마다 안팎으로 버리고 비우면서 참으로 소유하되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 바로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투명한 삶입니다.
세 명령 앞에는 “누구든지” 말마디가 붙습니다. 예외 없이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 본질적 세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명령은 단번이 아니 평생 현재진행형의 평생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늘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자발적 사랑으로 노력해야 할 기본적 수행입니다.
참으로 온전히 자유로운 삶이 주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있으면 불완전합니다.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까?”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한 자유입니다. 순수한 이웃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참된 이웃 사랑을 통해 주님의 참 제자임이 입증됩니다. 참 제자의 검증 잣대가 이웃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을 빚지고 있는 사랑의 빚쟁이들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 해도 이 사랑의 빚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의 자유는 이런 사랑을 위한 자유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이자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로울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자유로워집니다. 참사랑과 참자유는 함께 갑니다. 물론 무집착과 무욕의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1.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2.아모르 파티(Amor Fati) ; 운명을 사랑하라.
3,카르페 디엠(Carpe Diem) ;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다시 한번 라틴어 세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로서, 버림-따름-사랑의 삶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복되어라, 거룩히 기뻐할 줄 아는 백성은, 주여, 당신 얼굴의 빛 속에 걸으리이다."(시편89,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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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십자가!>
오늘 복음(루카14,25-33)은 '버림과 따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탑 건축자와 전쟁을 계획하는 임금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습니다. '자기희생(포기), 비움, 무소유, 그리고 탐욕과 욕심!'
이러한 단어들을 또 한 단어로 요약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탐욕과 욕심을 비워내는 것'이 바로 '자기희생(포기)이요 비움이며 무소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으로 쉽지 않고 어려운 일이기에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제자다운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로마13,8-10)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13,8.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드러남) 되었습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자기희생(포기), 비움, 무소유의 표지'입니다. 그리고 그 표지가 바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 그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이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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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fFWk35G8FwI?si=LzYScbM7opX4fpx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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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계절이 바뀌듯
우리의 삶도
가로질러
드디어 산을
넘습니다.
산을 넘어가듯이
넘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허허로운
여정입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우리네
인생길입니다.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마저
내려놓고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소유를
다 버리는 행위가
바로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소유에서 넘어지고
버림에서 다시
일어섭니다.
붙잡고 있는 것을
놓으니 하느님께서
손을 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버림과
비움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볼 수 없고
비우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만나게 되는
은총입니다.
묶인
소유욕에서
우리를
풀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느님마저
저울질했던
어리석은
교만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여정은
버림과 비움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버림과 비움으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버림과 비움의
기도입니다.
버림과
비움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도
잎을 비우는
비움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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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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