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오기륭
광해군은 참 아까운 군주야. 정말로.
반정으로 폐위가 되었다 해서 사람들은 흔히 개망나니 연산군 = 광해군 이렇게 취급을 하고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 없어.
연산군이 개망나니 였다면, 광해군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군주라고 평가 할 수 있겠네.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고 가도록 해염.

광해군은 비운의 왕이야. 개망나니도, 폭군도 아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왕'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이자, 14대 임금인 선조와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 사이의 차남이었어. (형=임해군)
임진왜란이 터지고나서 바로 세자로 책봉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종전 후에 선조는 이상하리만치 광해군에게
쌀살맞고 차갑게 대해. 그 대목중의 하나가 아래의 사진과 같아.


명나라는 광해군이 후궁의 소생이라면서 세자로써의 책봉을 내려주지 않았어.
당시 조선은 명나라의 윤허를 굉장히 중요시 생각했는데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선조 또한 그렇기 때문에 너는 세자가 아니니 앞으로 다시는 문안을 들지 말라고 하지.
이에 충격을 받은 광해군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기까지 했어.
사실 선조가 처음부터 광해군을 미워한건 아니었어.
오히려 똑똑하고 총명하다면서 아끼는 편에 속했지.

어느날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물건을 나열해놓고 고르라고 했지. 다른 왕자들이 패물등의 장신구를 가져간 반면,

광해군만은 붓과 먹을 들고 가기에 선조가 물었어.
"다른 왕자들은 모두 귀한 것을 가져가는데 왜 너는 붓과 먹을 집었느냐."
이에 광해군이 답하기를,
"세상에 패물보다 더 귀한 것은 좋은 글과 생각을 남기는 것이 아니올지요."
라고 대답했기에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진 후 비교적 쉽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을 했다고 해.
임진왜란 후 선조는 피난을 가면서 광해군에게 조정을 둘로 나누어 떼어줘.
이를 '분조' 라고 해. 조정을 가른다는 뜻이지.

아래의 그림은 선조의 피난 행로야.

선조는 자칫하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간 뒤, 명나라에게 자신을 의탁 할 생각까지 하게 돼.
물론 신하들이 이걸 말리느라 엄청 힘들었다고 하지. 뻑하면 '짐은 명나라로 망명하겠노라.' 이 지랄을 떨었다 하니.

결국 이 같은 조정과 왕실의 자신들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자 분노한 백성들은 스스로 왕궁에 불을 질러.
이때 소실 된 궁이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이었어.

노비문서도 싸그리 태워지는 바람에 종전 후 공명책과 납속책이 엄청 빈번해 지면서 신분제의 동요를 불러오게 되는거지.

조정의 반을 넘겨받은 광해군은 생각보다 일 처리를 잘 하고 있었어.
누구처럼 피난만 가는게 아니라 분조를 이끌고 의병들을 잘 다독이면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었지.
백성들 또한 광해군이 가는 곳 마다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보냈고 점점 의병들이 늘어났다고 해.

의주에서 분조를 넘겨받은 광해군은 아래와 같은 ↓ 방향으로 왜군을 무찌르며 내려왔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명나라에서는 아래와 같은 칙서를 내려줘.
이 칙서가 바로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를 대폭 갈라놓은 칙서이기도 하지.

그리고 종전 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승하하고 선조는 계비인 인목왕후를 맞아들이게 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선조의 유일한 적자(왕후가 낳은 아들)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지.

선조는 영창대군을 얼마나 아꼈던지 신하들에게 누누히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말까지 했다고 해.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의 문안인사까지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을 편애해.
광해군에게는 '넌 세자가 아니다' 라는 막말까지 서슴치 않았지.

하지만 선조의 수명은 영창대군이 성장할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어.
결국 광해군은 34살의 나이에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하게 돼.
이때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의 영수인 유영경은 우선 영창을 왕위에 앉히고 인목왕후에게 수렴청정을
하라고 하지만 대세가 기울었음을 느낀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대보(옥새)를 넘겨줘.

광해군은 즉위 후 '대동법' 을 시행하게 돼.
간단히 말하자면 그동안 지방에서는 진상품을 올렸는데 이게 여의치 않을때가 있다보니 거대한 장사치들인 '방납' 상인
들이 먼저 왕실에 진상을 하고 백성들은 방납인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후불제 형식이었는데 여기에 비리도 많고 바가지를
씌우다보니 백성들이 힘들어졌어. 이런 비리를 혁파하기 위해 광해군이 대동법, 그러니까 진상품을 그냥 돈으로 편하게
내라. 라는 법령을 내린거야.
임오군란때 또 한번 등장하는 '선혜청' 은 광해군때 신설 된 관청이지.

이 대동법에 대한 신료들과 방납인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어.




게다가 조정은 당시 대북파와 소북파로 나뉘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대북파 = 광해군 지지 / 소북파 = 인목왕후, 영창대군 지지
이렇게 두 파로 나뉘었던거야.

그러던 찰나 '칠서의 변' 이 일어나.
이 칠서의 변이 뭐냐면, 문경새재에서 은을 운반하던 상인들이 살해당하고 운반하던 은이 강탈당한 사건인데,
살아남은 상인의 입을 통해 조사가 진행되었고, 알고보니 범인이 서인쪽 관료들의 서자였던거야. 그것도 7명.
그래서 7명 서자들이 일으킨 변이라고 해서 칠서의 변 이라 일컫는데, 이 조사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게 돼.

대북파들은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죽여야 한다고 무려 8달 동안 상소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윤허할 수 없다고 해.
(계축일기 등의 기록에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는데 동의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라.)

하지만 대북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말지.





광해군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창대군은 죽임을 당한거야.
그리고 이건 광해군이 입었던 '적령' 인데, 적령은 왕이 용포 밑에 입는 두루마기를 뜻해.
청자색과 구름무늬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옷이야.

광해군이 입었던 것으로 추측이 가능한건 조선왕실에 을해생의 임금은 광해군 뿐.

하지만 결국 광해군 15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당시 서궁(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왕후는 신하들이 인조를 왕으로 책립해 달라 하자 이런 말을 했다지.

인목왕후가 너무 완고했기 때문에 반정세력은 잡아온 광해군을 인목왕후의 앞에 데려다 놓았어.

인목왕후는 거기서 광해군이 저지른 36가지 죄목을 적어주고 그것을 읽으라고 해.
거기에는 선조 독살설 등의 말도 안되는 부분이 다량 적혀있었고, 광해군은 결국 그것을 읽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지.

반정세력이 내세운 광해군의 폐위 이유는 이거였어.
광해군은 우리가 알다시피 '중립외교' 를 지향했어. 어지러운 대륙의 상황을 살피다가 조선이 얻을 수 있는 실리를
택하고자 했던거지.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며 명을 돕는 척 하다가 후금에게 투항하게 하는 등의 조선으로써는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던 중립외교를 선택했지만, 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은 이를 광해군을 폐위하는 명분으로 택한거지.

그리고 광해군은 폐위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돼.
이후에도 광해군은 청나라의 눈치를 보는 인조 때문에 죽음은 면했지만 강화도와 제주도를 오가는 끝없는 유배생활을
하게 되지. 아들, 며느리를 차례로 떠나보내고 부인 또한 떠나보낸 채 혼자 외로운 유배생활을 견뎌.
광해군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광해군의 밥과 빨래등을 담당했던 노파가 광해군에게
'어이 노인네' 라고 비꼬아 불렀지만 그저 허허 거렸다는 일화도 유명해.
광해군이 음력으로 7월 1일에 제주도에서 사망했는데 지금도 제주도에는 음력 7월 1일이 되면 해가 쨍쟁하다가도 비가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제주도 사람들은 이를 '대왕(광해군)의 눈물' 이라고 부른다고 하네.

유일하게 광해군 일기는 처음 쓴 정초본과 수정한 중초본이 남아있어.
하지만 뭐 내용은 별 다르게 많이 다른게 없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광해군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지은 시야.





첫댓글 선조개객끼 아무리생각해도 조선왕조중에서 제일 븅신은 선조임ㅡㅡ
맞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인조도 만만찮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안타깝다ㅠㅠ 역사는 진짜 승자의 기록이라고ㅠ 왜곡된것도 많구나ㅠ
하 진짜 너무 안타까운 왕이야 차라리 조선초에 태어났으면 성군중 성군이 될 수도 있었을거같아
광해군은 생각 할 때마다 안타까워.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기록조차 쉬이 믿을 것이 못 되고... 타임슬립해서 그 시대를 직접 아는 방법도 없고. 답답함에 가슴이 먹먹하다..
글쓴언니야 나 질문하나 해도 돼?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자는 데 동의했다는게 거짓이고 동의하지 않은게 사실이라구 했는데 어디에 근거한거야? 왕조실록?
그건 무려 서인들이 쓴 광해군일기에 광해군이 영창대군 죽이는데에 동의 안 했다고 나와있는거로 알아. 동의 했다고 쓴데는 계축일기.....
오우와 그렇구나!! 유익한글 많이쪄줘서 고마워!ㅎㅎ
오 고마워나두궁금햇어!!!
요즘 국사 공부하는데 광해군 폐위되고 인조 등극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이 망테크를 탄것 같음...너무 안타까워...
인조 개객끼
난 국사배울 때 광해군 진짜 좋아했는데 ㅠㅠ
요즘 한국사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글 통해서 광해군 부분은 확실하게 알게됬어. 고마워!!!
선조 인조 사이에 껴서ㅠㅜ햐ㅜ 세종대왕 정조대왕과 더불어 좋아하는 왕중 하나입니다ㅠㅜ왜 시대는 저러한 왕을 기구하게 만드는지...
선조가 적자컴플렉스가 있었어 그래서 광해군을 내세울지말지 엄청고민 많이했지.... 그러다가 어쩔수없이 광해군이 된거고... 광해군은 대외적으로나보나 국내실정으로보나 다 시대를 앞서서 내다봤었지....역사는 권력자들 위주로 쓰여지기마련이지 그래서 지금까지도 광해군은 폭군으로 알려진채 있는거야 ㅠㅜ 안타까워 ㅠㅜ진짜 광해군은 시대를 잘못타고난 불운의 왕이였어
광해군은 정말 성군인데 인목황후 같은 매국노 때문에 엿먹고 아버지라고 있는게 막장 병신이라서...안타까웠지ㅠㅠ
맞아 인강쌤도 광해군 폭군아니라 함!!!!!!!!!!!!!!!!!!!!!!!!!! 인목!!!!!!!!!!!황후!!!!!!!!!!!! ㅡㅡ
ㅠㅠㅠㅠㅠ역사에 의해 왜곡되고 ㅠㅠㅠㅠ
나의 사랑 광해군이 왔구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조선 임금 중에 잴 안타까운 왕이야ㅠㅠㅠㅠㅠㅠㅠ
왜란때 일수습은 광해군이 다하고 돌아선 민심 수습하고 다닌것도 광해군이다 시불놈의 선조 지아들 질투나 하고 못 깍아 내려 안달이고
존나 나쁜놈ㅠㅠㅠㅠㅠㅠ 선조만 아녔어도 광해군 인생이 그리 꼬이진 않았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아.. 진짜 내가 왕들 중에서 제일 격하게 아끼는 왕ㅠㅠㅠ 세종은 시기를 잘 태어났고, 정조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왕위에서 내려오지는 않았지. 하지만 광해군은 시기를 너무 앞선 나머지 결국 왕위에서 내려와야 했짆아. 그 어떤 놈때문에ㅡㅡ!!!!!!!!!!!!!!!!!!!!!!!!!!!!!!!!!
나도광해군좋아해.. 선조도 직계가 아니라 방계여서 왕위에오르자마자 후사를 낳아야 자기자리가 잡힐것이라 생각했는데 자기 왕후는 불임이니까 직통자를 못낳고ㅜㅜ 광해군이태어났지 자기가 방계컴플렉스가 있으니까 방계인 광해군이 미웠던듯ㅠㅠ 불쌍해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ㅇㅇ 역시 쉘든 ㅋㅋㅋ 난 페니처럼 멍하니 있었어 언니 짱!
선조는 드라마나 실제 역사에서나 참.....
광해군 대인배다ㅜㅜㅜㅜㅜㅜ 드라마로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왜곡할까봐 말았다ㅋㅋㅋ
휴... 여기 여시들 도대체 뭐야? 모르는게 음떠~ 여기와서 진짜 유익한거 많이 알고간다. 짜응 ㅍ,ㅍ
안타깝다 ㅠㅠ......근데 죽일거면 곱게죽이지 왜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냐 ㅠㅠ 굶기고 눕ㄴ지도못하게 불 데우고 ㅠㅠ
광해군 진짜 다시 역새 재평가 받아서 다행임. 거지같은 선조,인조 개갞기ㅗㅗ
광해군도 참 불쌍하지...왜곡된 인물 중 한명...
아 난 너무 우리나라 역사에 무지한거같아 ㅜㅜ
선조 인조가 개색히 ㅜ
ㅠㅠㅠㅠㅠㅠㅠㅠ광해군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