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꺼내 쓸 수 있는 현금성 자산만 수십억원에 달하는 중견기업 오너 A씨. 그는 자신과 부인,자녀 명의로 20여곳 이상의 금융회사에 1년만기 정기예금을 들었다.
각 통장에는 정확히 4750만원씩만 넣었다.
예금금리(연 5~5.5%)를 감안해 1년 후 원리금이 예금자 보호한도인 5000만원이 조금 못되도록 맞춘 것. A씨는 "혹시 은행이 망해도 돈 떼일 일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샐러리맨들이 고수익 투자상품을 좇는 것과 달리 부자들은 철저히 안전하게 자산을 굴린다.
자기 사업을 하느라 위험이 큰 투자상품에 신경 쓸 시간이 없는 데다 딱히 재산을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적기 때문이다.
외국계 은행의 한 프라이빗뱅킹(PB) 담당자는 "부자들은 사업이나 배당 등을 통해 돈 들어오는 곳이 많기 때문에 자산운용에선 수익률보다 안전성을 중시한다"며 "큰 부자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사가 실시한 부자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자산을 줄지 않게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싶다'는 응답이 57.5%로 '적극적으로 운용해 더 늘리고 싶다'(42.5%)보다 많았다.
금융회사를 선택할 때도 안전성을 철저히 따진다.
정복기 삼성증권 PB연구소 소장은 "부자들은 외환위기 때 자금이 묶였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금융회사 브랜드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고 전했다.
주식은 가급적 피한다.
투자자문회사의 한 펀드매니저는 "부자들이 주식에 투자하는 돈은 전 재산의 5~10% 정도"라며 "그나마 시장이 오를 것이란 확신이 설 때,그것도 우량주에만 투자한다"고 말했다.
안병현 한국투자증권 부평지점 부장도 "부자들은 고수익에는 고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품에는 절대 투자하지 않으며 기대수익도 은행금리보다 약간 높은 연 7~8% 정도로 정한다"고 밝혔다.
부자들이 안전성 못지 않게 민감해 하는 것은 세금이다.
김종민 교보증권 강남PB센터장은 "재산을 상속하거나 증여할 때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점이 부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라며 "상속세보다 증여세가 적기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부인과 자녀 이름으로 조금씩 증여해 두는 부자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상품을 고를 때도 비과세 상품을 선호한다.
김 센터장은 "연 6~7%가량의 배당이 나오면서 3억원까지 비과세 혜택이 주어지는 인프라펀드나 선박펀드 같은 경우 부자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모은다"고 덧붙였다.
요즘 뜨는 해외 펀드나 주가연계증권(ELS)은 세원이 노출되기 때문에 꺼린다.
50억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회계사 B씨는 "국내 펀드는 시세차익이 전액 비과세지만 해외 펀드와 ELS는 그렇지 않다"며 "해외 펀드에 1억원만 투자해도 수익률이 40%를 넘으면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이 되는 데다 국세청에 해당 자료가 남기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현 시점에서 가장 유망한 투자 수단으로는 부자들의 72.9%가 토지,강남 아파트 등 부동산을 꼽았다.
60대 이상은 땅,40~50대는 강남 아파트를 특히 선호했다.
부자 고객들과 자주 상담하는 삼성금융플라자 관계자는 "정부가 부동산을 눌러도 부자들은 항상 허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귀띔했다.
교보증권 김종민 센터장은 "한번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은 절대 부동산을 안 떠난다"며 "개인 자산의 83% 정도가 부동산으로 파악되는데 부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예전보다 금융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라는 게 PB들의 전언이다.
투자 결정은 PB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 내리고 있다.
삼성증권 정복기 소장은 "부자 고객들을 상대로 '투자 결정에 누가 영향을 미치나'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46%가 '본인 또는 가족'이라고 답했다"며 "미국 부자들이 대부분 PB에 의존하는 것과 대조적"이라고 밝혔다.
전 재산 중 PB에게 맡기는 비중은 20~30% 정도다.
부자들은 주로 거래하는 금융회사도 3~4곳을 두고 있다.
또 한국은 불안하다고 생각해 한 군데 이상의 외국계 은행과 거래하는 부자들이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