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론-뭐든지 미리미리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북부, 벨기에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릴-유럽(릴-플랑드르와 달리 일종의 국제선 개념) 역에서 유럽 열차 개념도를 우연히 봤다. 16박17일의 여정을 한 눈에 돌아볼 수 있었다. 취리히부터 체르마트, 몽트뢰, 융프라우. 꼴마르와 스트라스부르, 파리와 릴, 벨기에 브뤼셀과 브뤼헤까지 정말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보람 있었고 딸이 나중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면 이런 일정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벅찼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알프스 봉우리 중 몽블랑을 제외하고 아이거와 융프라우, 마터호른을 모두 봤다. 변덕스러운 알프스 날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봉우리를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흐렸지만 내가 발걸음을 떼면 기다렸다는 듯이 맑아져 봉우리들을 열어 제쳤다.
등반 장비를 준비하지 못해 결국 설원을 거니는 꿈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계절적 요인 때문에 겨울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며 더욱이 봄도 아닌 어정쩡한 시기였다. 마터호른이 호수의 수면에 반사되는 장관을 완상하지도 못했다. 융프라우요오흐에서 멘히 산장까지 1.7킬로미터 트레킹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역시 크다. 융프라우의 양대 날개라 할 수 있는 쉬니게 플라테나 뮤렌에서 행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마저 남는다.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10년 전에 두 번째로 네팔을 찾았을 때보다 힘이 딸리는 것을 느꼈고 고산 증세도 훨씬 크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번 여행은 릴에 교환학생으로 가있는 딸과 2003년 터키 여행 이후 함께 해외여행을 다니지 않은 아내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으니 산행과 관광의 어정쩡한 결합일 수밖에 없었다. 계획 자체가 딸, 아내와 타협해 알프스 8박9일, 그 중간에 몽트뢰라는 휴양도시, 꼴마르와 스트라스부르라는 관광지를 절묘하게 끼워넣고 파리 4박5일 일정에 벨기에 하루 유람으로 짠 것이었다.
등산화도 아이젠도 가져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행의 부차적 목적 하나가 딸의 6월 귀국을 앞두고 자질구레한 짐을 미리 빼내오는 것이었기에 먹거리를 왕창 실어 날라 비용을 절감하고 돌아오는 길, 짐의 빈 자리를 딸의 짐으로 채우려고 했다.
결국 장비도 없는 상태에서 고르너그라트에서 마터호른을 보고 내려오는 길, 하마터면 조난을 당할 뻔했다. 리펠알프 역에서 하차한 뒤 일본인 커플 두 쌍을 따라갔는데 우리의 속도가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중간중간 산사태로 길이 끊겨 스키 슬로프를 거슬러올라야 했다.
운동이라고는 죽어도 하지 않는 딸이 겁도 나는지, 경사가 장난이 아닌 곳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됐고, 밑에서 버텨주겠다고 생각하고 따라간 나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5분여 사투를 벌여 거의 기다시피 해 슬로프를 올라와 정상적인 길을 찾았다.
그렇게 5시간을 악전고투해 수네가 전망대 아래 능선으로 찾아들 수 있었다. 초보자인 딸과 아내에게 한 없이 미안했다. 적어도 3시간 정도는 아무도 없이 온 산에 우리 가족뿐인 듯했다. 그렇게 고사목이 빼곡하고 눈사태로 무너진 길에서 거의 3층 높이로 무질서하게 쌓인 눈무더기들을 밟고 길을 찾는 고행을 했다.
그렇게 평탄한 길을 내려오다 반석 하나를 만나 사진을 찍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키가 30㎝정도 되는 마르모트와 산양도 봤고 외딴 마을을 외롭게 지키는 프랑스계 할아버지도 만났다.
돌아오는 아에로플로트 여객기 안에서 회장님이 그렇게 좋다고 했던 영화 ‘와일드’를 본 뒤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지정하는 순간,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딸과 아내도 힘들긴 했지만 이날의 웅장한 풍광에 압도된 듯했다. 무책임한 아빠에 대한 지청구도 심하지 않았다. 비록 다른 날 동선을 미리 줄이는 경향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자신들은 이 두 날, 체르마트에서의 두 날에 알프스의 모든 것을 봤다면서 융프라우 봉우리 오르는 것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덕분에 난, 혼자 자유롭게 동선을 짜고 이행할 수 있었다.
미리미리 계획하고 싼 열차 표 등을 구한 터라 비교적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스위스와 알프스에서는 식사로 두 차례 정도만 지출했고 프랑스에서만 식사 비용 지출이 많았다. 하지만 아침은 거의 누룽지와 햇반, 장조림 등으로, 점심은 간단히 빵으로 요기하고 점심이나 저녁을 거하게 먹는 식으로 했다.
릴에서 브뤼셀 갈 때는 메가버스를 단돈 4유로50센트에 이용하는 값진 경험도 했다. 물론 돌아올 때 30분이나 늦게, 버스를 갑자기 갈아 타는 불쾌한 일을 겪었지만 브뤼셀과 브뤼헤를 하루에 모두 돌아본 것은 성과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브뤼헤에서는 맛없는 점심을 엄청 비싼 값에, 그것도 터무니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들었지만 말이다. 충분한 계획을 세워야 값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걸 위안으로 삼을 일이다.
여행 틈틈이, 그리고 돌아와 꼼꼼히 영수증을 들여다보며 졍산해 날짜 별로 정리한다. 이렇게 상세하게 정리하려는 이유는 뒷날 누군가 우리가 다닌 여행 일정을 짤 때 참고가 됐으면 하는 뜻에서다. 너무 배아파 하지 마시길.
(환율은 2015년 5월 22일을 기준으로 해 실제 지출한 내용과 다소 편차가 있을 수 있음)
4월 27일 취리히까지
인천~모스크바~취리히(1월에 결제해 84만 7233원x2=169만 4466원->170만원으로 계산)
스위스 패스 아내와 나 295유로x2=590유로, 딸 251유로->740유로(약 90만원) 계산
스위스 패스는 거의 모든 구간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음. 다만 융프라우요오흐 오르거나 그린데발트와 라우터브레넨 오가는 경우에만 별도의 요금을 받음
오후 1시 30분 출발이었는데 시차 7시간이 앞선 덕에 이날 밤 11시 취리히 도착
취리히 공항~이비스 버짓 취리히 호텔
한 시간쯤 뒤 도착한 딸과 만나 택시로 이동, 가까운 거리여서 그런지 택시 기사가 막 신경질에 난폭 운전했지만 금세 도착, 미터기로 16.5프랑 나와 미안하기도 해서 팁을 얹어주려 했는데 극구 싫다고 해서 관둠(스위스 택시 기사 이상한 X고집 있다고 생각됨)
참 좁다. 이층침대 있는데 내가 올라가 잤다. 모녀가 더블 침대에서 자고, 난 아침에 일어나 소피 보려고 내려오려다 아찔했음
이비스 버짓 취리히 호텔 숙박료 80.1프랑(1월27일 카드로 결제해 10만 7701원)
결국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던 비행기(딸 것은 제외)와 스위스패스, 첫날 비용으로 271만 썼음
4월 28일 체르마트까지
취리히 호텔에서 취리히 반호프까지 일인당 2.6프랑X2=5.2프랑(6000원)
원래 3장 구매해야 하나 자판기에는 동전밖에 이용할 수 없는데 마침 동전 없어 두 장만 구입하고 탑승했는데 누구도 차표 확인하는 이 없음(그냥 믿는 사회란 분위기)
취리히 반호프에서 쿠어까지 50분여
쿠어에서 빙하특급으로 갈아탐
반호프에서 빙하특급 13프랑x3=39프랑, 점심 30프랑 예약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풀코스 43프랑짜리를 하나 더 주문했음
(그런데 귀국해서 살펴보니 추가 청구된 영수증이 없어 확인하니 이걸 따로 청구하지 않아 43프랑을 떼먹은 셈이 됐음)
커피는 두 잔 시켜 8.6프랑 치렀음
출발 전 참고한 블로거나 여행 전문 사이트 등에서는 식사 먹지 않는 게 낫겠다고 권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미식가인 척하는 딸과 나에게도 상당히 맛있는 점심이었고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음
그러나 알프스의 속살을 헤집고 다닌다는 광고와 달리 막상 빙하구간을 달린 것은 30분 안팎인 데다 중간에 내려서 블리저드와 설원을 밟는 경험을 하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음
결국 베른이나 루체른 들러 체르마트 올라가도 되는데 5시간이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느낌이 강했음
그러나 아내와 딸은 오래 전 스위스와 융프라우 쪽을 돌아본 적은 있지만 난 알프스가 초행이었는데 첫 알프스를 방문하는 처지에서 빙하특급은 한번은 타볼 만한 굉장한 경험이었음. 하지만 그 감동이 체르마트에서 융프라우를 거치는 동안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아 시간을 낭비했으며 가당치 않은 비용을 지불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빙하특급은 체르마트까지 들어가 오후 5시쯤 도착
딸아이가 구글맵을 보며 자신있게 찾아나섰는데 얼마 안가 헤매기 시작
길가는 주민에게 물어보고 다시 인포에 가서 물어보고 헤맸으나 난 가게 아주머니에게 물어봐 곧바로 찾음(사실 돌아와서 보니 숙소 할아버지가 미리 이메일로 보낸 것을 내가 보관 중이었으나 가방 속에 들어있어 참고하지 못하고 괜히 딸만 고생시켰음)
샬레 악시호른 숙박비로는 275프랑 선불로 지불(방값 260프랑, 여행자 수수료 15프랑)=32만 1000원
짐 정리해놓고 체르마트 동네 한 바퀴를 돌았음, 마터호른이 어디에서나 잘 보였고 개천 건너 글래시어 익스프레스 출발점에도 가보고 위쪽 동네로 올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왔음
상당히 경사진 골목에 생각보다 엄청 많은 주민들이 자전거로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음
역 앞 쿱에 가 생수 등 장 봤는데 18.80프랑
결국 이날 쓴 비용은 310프랑=36만 2600원
숙소는 주방을 겸해 딸이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진 공간이 따로 있어 약간의 독립성이 확보돼 좋았음
또 창문 밖으로 설산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고 문 열고 나오면 조그만 앞마당이 있어 볕이 좋은 날 나와 책 읽기 좋은 공간이었음(하지만 우리 머무는 동안은 약간 쌀쌀하고 우리가 산으로만 다녀 그럴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음)
저녁 먹고 내일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일찍 잠자리에
4월 29일 마터호른 첫날
7시 일어나니 새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어제 잘 때만 해도 날씨가 좋지 않을까봐 걱정했고 실제로 새벽에 잠깐 깨 밖을 살펴보니 어두침침했는데 시나브로 날이 맑아져 있었음
아내랑 여행 전부터 무조건 아침 날씨가 좋지 않으면 산 밑 동네로 이동하자고 말을 맞췄으나 체르마트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음
8시 30분쯤 숙소 출발해 고르너그라트 전망대 향해 출발
산악열차 35.5프랑x3=106.5프랑
열차 안에서 유난히 긴장한 얼굴의 동양계 여인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패러글라이딩을 경험하러 올라가는 것이었음
아내와 함께 유난히 옷을 두텁게 입고 가서인지 함께 올라왔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진을 찍고 시간을 보내고 내려옴
여행 블로그 등에서 봤던 멋진 견공과 함께 사진 찍히는 아저씨는 그렇게 열렬한 호객 행위를 하지 않고
우리는 돌아오는 길 리펜알프에 내려 5시간 남짓의 트레킹을 했음
위험하고 힘들었지만 가장 다사롭고 행복했던 5시간
이날 하루 106.5프랑=12만 44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