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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진술을 어떻게 번뜩이는 시적 진술로 만드는가?
장인수(시인)
어떤 시는 밤새워 비틀어 쥐어짜도 잘 나오지 않는다. 반면 어떤 시는 술술술 즉석에서 쉽게 터져 나온다. 시인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뭐, 시가 태어나는 방법은 무수하니까. 그러면서도 시인은 술술술 쉽게 쓰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안다. 기나긴 고뇌의 풍화, 침식, 퇴적, 융기 작용을 통해 터져 나오는 것이 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 창작은 고통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다.
시가 점점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 문학사 내부의 흐름은 물론, 생활 여건의 변화, 시대적 문화 동향, 소통 방식의 변화, 시인 각자의 개성 등 수많은 변인들이 서로 스미고, 얽힌 복잡한 상황 때문이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있다기보다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가 있을 뿐“이라는 유종호 평론가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새길 만하다.
짧아도 어려운 시가 있다. 쉬운 듯 보여도 어려운 시가 있다. 쉽게 쓰인 듯 보이는 시도 쉽게 쓰인 것이 아니다. 쉽게 읽히는 시도 자꾸 따지고 들여다보면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쉬운 시, 어려운 시를 무 자르듯 나눌 수는 없다. 좋은 시는 짧아도 좋고, 길어도 좋고, 쉬워도 좋고, 심지어 어려워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 첫인상이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 뭉클한 작품들이 있다. 도대체 이런 시를 어떻게 썼을까. 그리고 왜 어렵지 않게 읽히는데 뭉클한 감동을 줄까. 어떤 요인 때문에 그럴까. 박용래의 「저녁눈」. 김종삼의 「묵화」, 김소월의 「진달래 꽃」,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천상병의 「귀천」, 황진이의 여러 평시조 등등의 작품들은 일차적으로 어렵지 않게 읽힌다. 일차적 해석이 쉽다는 것이다. 파고 들어가면 그 안에 다양한 의미와 정서의 확장을 꺼낼 수 있는 중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포적 의미가 매우 깊다는 것이다. 읽을수록 깊고 어려운 시처럼 느껴진다.
시는 일반적인 진술과는 달리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다. 그런데 일반적 진술이나 일상적 대화 속에도 벼락 치듯 전율을 일으키는 대목이 많이 숨어있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쉬운 구절이 일상적 진술과 일상적인 대화 속에도 있는 법이다. 바로 그것은 시다! 외면상으로 평이한 구조와 평범한 진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 구절이 번쩍 눈에 띄고, 한 구절이 함의하는 의미의 내포가 크게 느껴진다. 바로 그것을 예리하게 포착했을 때 비로소 시의 반열에 오른다.
일단 일차적으로 쉽게 읽히는 시, 어렵지 않은 시는 첫눈에 확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눈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가슴에 직방으로 와 닿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작법을 보면 평범한 일상적 진술에서 놀라운 시적 진술을 채굴한다. 그들은 일상적 삶에게 시를 캐묻는다. 일상적인 삶과 시의 밀착도가 매우 깊은 시인들이다. 직업과 일상과 생활이 곧 시 창작의 산실이다. 일상을 꾸밈없이 응시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진솔하고, 겸손하고, 마음이 여리고, 따스하고, 약간은 내성적이고, 자기 성찰을 많이 하는 시 작품을 쓴다. 그래서 암수표의 암호 같은 난해한 시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비유와 수사, 그로테스크한 기교를 앞세우지 않는다. 화려한 묘사로 화장을 하거나 장식을 하지 않는다. 가급적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그냥 굴러다니는 평이한 일상어를 끌어다가 시를 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상투적인 어휘를 끌어다가 새로운 의미와 느낌과 해석력을 덧씌운다. 평범한 일상을 순식간에 비범하게 만들고 새롭게 변화시킨다. 어렵지 않은 평이한 일상의 진술인데 뭉클함을 주는 시적 진술로 승화한다. 여기 소개하는 다섯 편의 시가 그러하다. 독자들도 함께 느껴보시라.
●우대식 시인의 시 「소풍」
그해 겨울,
먼 나라의 밤처럼 눈은 내렸고
술을 마시고 읍내 택시 정류장 앞에 서 있다가
동네 목사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눈은 어디서 오지요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시골 교회 마루에서 밤낮으로 기도하는 목사님께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드문드문 박힌 읍내 마을 불빛을 보며
피안의 강가를 서성일 아버지도 생각해보았다
이런 밤에 떠나는 소풍
긴 타이즈에 반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고 옆구리에 물통을 매고
눈은 어디서 오는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숙제를 받아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우대식 「소풍」(《문학과 사람》 2018 가을호에서)
우대식 시인의 시편들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쉬운 일상의 어휘로 쓰였다. 쉽게 읽히는데 행간에 담긴 의미와 정서는 깊고 아득하다. 일상의 삶속에는 일상적인 진술이 널려 있는데, 그 곁에는 매우 뭉클한 시적 진술도 널려 있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에 대한 해석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우대식 시인의 해석력은 항상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닿아있다. 우대식 시인은 목사님이나 스님에게 불쑥 쉽고도 어려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체면이나 체통이나 겉치레를 순식간에 훌훌 벗어던지고 편안하게 차원 높은 질문을 느닷없이 던진다.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는 어떤 신분이나 지위도 부질없는 것이다는 듯이. 길바닥에 철학과 종교의 숨결이 있다는 듯이. 누구나 똑같은 영육간의 존재라는 듯이 그는 순식간에 자신의 영육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숨김이 없다. 우대식 시인이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는 목사님이나 신부님이나 스님의 향기가 풍긴다. 그에게서 어떤 영성을 나는 종종 느낀다.
영성(Spirituality)은 종종 삶에서 영감을 주고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원천이 된다. 또한, 영성은 우주 또는 세상의 본래부터 ‘내재하는 성품’을 경험하게 한다. 영성은 자신의 존재의 에센스(essence, 정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내적인 길’을 늘 찾는 자들에게서 나타난다. 나는 우대식 시인이 명상, 기도, 묵상 또는 관조 등의 영적 수행을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적인 삶’과 ‘본향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고,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떠나곤 하는 방랑자인 것을 안다. 더 커다란 실재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여행, 더 커다란 자아에 이르기 위한 떠남을 한다. 때로는 자연이나 우주나 신성한 영역과 연결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의 시편에서 종종 느낀다.
그는 이승의 삶을 소풍이라고 인식한다. 소풍은 ‘내적인 길’을 가는 여정인 것이다. 그가 술에 취해 목사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목사님에게 불쑥 ‘눈은 어디서 오지요/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객기에서 던진 질문이었을까? 진담을 농담처럼 농담을 진담처럼 던졌을까? 용기 있는 질문이었을까? 취중진담일까? 취서만필이었을까? 평상시에도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듯 느닷없이 타자에게도 많이 던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동네 목사님과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는 친한 사이였을까? 우대식 시인은 이미 10여 년 전에 「소풍」이라는 또 다른 시를 썼었다.
귓 속에 재봉틀 소리가 산다/ 야적장에 함박눈 내리는 밤/ 재봉틀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누워 자는 내 어린 가슴위로 굴러간다/ 엄마가 발 구르는 소리였던 것/ 반야심경 구절구절이 흘러가는 소리였던 것/ 온 땅과 온 하늘이 맞서는 밤이었을 거다/ 양철 함지박에 눈이 쌓이고/ 플라스틱 챙에 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엄마와 재봉틀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머언 소풍을 가던 것/ 그 곳에서 아주 살았던 것
엄마의 재봉틀 소리, 발 구르는 소리를 아들은 잠결에 듣는다. 계속 소리의 연속을 쫓아가며 듣는다. 반야심경 구절구절이 흘러가는 소리로 듣는다. 긴긴 겨울 함박눈은 내리고 ‘나와 엄마와 재봉틀 소리가 촤르륵 촤르륵 머언 소풍을 가던 것’이었다. 함박눈 쏟아지는 긴긴 겨울 가난한 유년의 방 안에서 엄마의 재봉틀 소리를 들으면서 길게 이어지는 재봉틀 소리를 따라서 선잠의 잠결에 머언 소풍을 간 것이다. 재봉틀 소리를 따라가가보면 그게 인생의 소풍이고 반야심경의 구절이 되는 것! 이것이 영성이다. 이것이 ‘내적인 길’이다.
그는 화두처럼 늘 근원적인 것을 질문하는 자다.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끝없이 추구하는 자다. 철학자나 구도자의 성품을 지녔다. 가볍고 비루한 일상적인 것들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툭 던진다.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적인 것들에게 본향적인 질문을 툭 던진다. 여행의 아름다음이나 풍경의 감탄보다는 떠돌면서도 늘 영적인 질문과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일상을 화두로 일상을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한다. 어디서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살 것인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뭔가, 왜 노을은 한 잔의 쓸쓸함인가. 왜 소풍은 즐겁고 덧없고 따스한가. 질문은 평범한 현상의 배후와 심연을 살핀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들여다본다. 어렵지 않은 일상의 시어를 엮어서 일상적인 진술을 한 것 같은데 놀랍고 새롭고 뭉클한 시적 진술이 되어 있다.
●함순례 시인의 시 「저녁강」
살이 그리워
네 말을 들은 듯 살구가 떨어졌다
살구나무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툭 떨어지는 향기
살고 싶어 싸웠는데 죽지 못해 갈라섰는데
문득 그런 때가 있다고
전화기 너머
가라앉는 목소리가 강물을 적신다
너의 강가에 앉은 나도 억새 물결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당신이
뚜벅뚜벅 눈부시게 되살아오는 것
사랑과 증오를 넘어선 몸이 몸을 부르는
적막이
시큼했다
저녁 강물에 살내가 흘러다녔다
-함순례 「저녁강」 전문(시집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2018, 애지)에서)
우리는 매일 사랑이라는 메뉴를 주문한다. 그러나 이별이라는 안주가 나오기도 한다. 사랑은 살과 살이 만나는 것이다. 살내를 서로 맡는 것이다. 몸은 사랑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의 살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살아야하기 때문에 때로는 이별의 강물을 건너야만 한다.
나의 살을 관통한 후 멀리 화살처럼 떠나 간 사내여. ‘나’라는 한 개체를 이루는 데 천 년을 기준으로 어림잡아 10억 6천만의 ‘타자’가 관여한다고 한다. 즉 나에게는 타자의 체취와 흔적이 우글거리는 것이다. 그 중에 살이 살을 부르고, 몸이 몸을 부르던 사랑하는 당신도 있었을 것이다. 살고 싶어 싸웠던 당신, 사랑과 증오를 모두 관통한 당신, 그러다가 죽지 못해 갈라선 당신이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10억 6천만의 타자 중에 가장 절대적이고 소중한 타자였을 것이다. 두 몸이 한 몸이 되려 했던, 한 몸이 되어 마구 격렬하게 몸을 섞었던 그런 타자였을 것이다.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타자였는데… 이것이 만남이고, 사랑이고, 결혼이었을 것이다. 우리네의 가장 현실적인 평범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일상을 평이한 일상의 언어로 노래했는데도 이 시는 꽤 뭉클하고 울림이 크다. 그 이유는 뭘까?
‘살이 그리워’라는 문장은 평범한 진술인데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너무나 솔직하고, 진솔하고, 뜨겁고, 간절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살이 그리워’는 독백인가? 방백인가? 속삭임인가? 넋두리인가? 혼잣말인가? 아니면 외침인가? 괴성인가? 처절한 부르짖음인가? 이렇게 낭송해도 되고, 저렇게 낭송해도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 평범한 일상적인 진술 같은데 이상하게도 울림이 큰 시적 진술이 되었다. 이렇게 쓰는 게 쉽지 않다. 무척 어려운 시작법이다.
‘ㅅ’이라는 자음은 잇몸소리이면서 마찰음(입천장과 혓바닥의 좁은 틈 사이로 공기가 가까스로 통과하면서 마찰이 일어나 발음되는 자음)이다. ‘ㅅ’은 입천장과 혓바닥 사이의 좁은 틈으로 마찰을 일으킨다. 또한 잇몸과 이빨 사이의 좁은 틈에서도 마찰을 일으킨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서도 마찰을 일으킨다. 그래서 ‘ㅅ’은 숨을 쉬거나 발음을 할 때 우리의 발음기관이나 구강구조에서 가장 살과 살의 마찰이 심한 발음이다. 그래서일까? ‘ㅅ’ 발음을 할 때 삶은 뭔가 마찰을 일으킨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나와 타인 사이에, 만남과 만남 사이에 마찰을 일으킨다.
이 시에 보면 ‘살, 살구, 살고 싶어, 싸웠는데, 적신다, 억새, 당신, 눈부시게, 되살아오는, 시큼했다. 살내’의 시어가 연속적으로 나온다. ‘ㅅ’이라는 자음은 1연부터 5연까지 연속적으로 나오면서 시의 리듬과 삶의 마찰을 드러낸다.
살구나무의 살구꽃은 우리 살결의 색깔과 유사하고, 익은 살구 열매는 우리 살결의 촉감과 유사하다. 살구 열매의 시큼하고 달콤한 육즙은 남녀의 사랑이나 육체를 연상시킨다.
시적화자는 살구나무가 있는 강가에 서 있다. 아마도 이곳은 사랑했던 남녀가 함께 연애를 했던 추억의 장소임에 틀림없으리라. 이제는 홀로 그곳에 서 있다. 살구나무를 통해서도 헤어진 당신의 살 냄새를 느끼고, 흘러가는 강물을 통해서도 삶과 사랑의 물살을 느낀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살내를 강물에서 느낀다. 이런 해석은 아마도 중학생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선남선녀들이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평이한 일상어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보편적인 영원한 정서를 건드리고 있다. 그것도 ‘ㅅ’이라는 자음의 절묘한 배치와 활용, 살구나무와 살의 절묘한 연결, 시각, 촉각, 후각적인 감각어의 적절한 배치, 강물의 흐름과 삶의 흐름을 연결, 그리고 ‘살이 그리워’라는 시적 진술이 주는 울림을 통해서 뭉클함을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조현석 시인의 시 「쉰」
1
배낭 꾸렸다 되도록 아주 가볍게
걸을수록 거듭거듭 산비탈만 나타났다
마음이 불편하면 몸이 알아서 미끄러지고
몸이 불편하면 마음이 알아서 미끄러져주고
허구한 날 늘 미끄러졌던 기억들, 이젠 정겹다
2
어스름 속에 산 아래 불빛
어느 것이든 따뜻하지 않을까
핑!
눈물이 돌도록 따뜻하다
순간 속이 쪼그라들어
꼬일 대로 꼬이는 허기
3
마흔 지나 근 십 년 모든 관절에 삐걱거릴 정도로
걸어서 또 걸어서 다가갔다 생각했으나 아직 다 오지 않았다
이제 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간혹 생각 끊는다
쉬고 쉬고 또 쉬어서 쇠막대기에 붉은 꽃 피거나 검붉은 녹 돋아 삭을 대로 삭아 먼지로 흩날릴 때까지
4
아이고 직진 밖에 모르는 성격이야
당신은 이번 생이 인간으로서 처음이야
뒷목 뻣뻣하게 당기게 하는 노점 사주쟁이의 말
돌아서는데 꽉! 뒤꿈치 깨무는 한 마디
아직 멀었어 더 열심히 살아
-조현석 「쉰」전문(시집 『검은 눈 자작나무』(문학수첩, 2018)에서)
이 시도 매우 어렵지 않게 술술술 읽힌다. 내용이 평이하다. 진술도 평이하다. 생경한 수사는 별로 없다. 그런데 뭉클한 감동을 준다. 왜일까?
조현석 시집 『검은 눈 자작나무』의 6할 정도는 분명 장인수의 삶이기도 하고, 내 이웃과 주변 얘기이기도 하다. 특히 밥과 관련된 몇 편의 시편들은 너무 슬프고, 절절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오십견에 시달리고, 새벽까지 불 밝혀 교정을 보고, 혼자 끼니를 때우는 사내. 슬픔을 먹고, 서러움을 먹고, 아픔을 먹는, 쥐눈이콩만한 희망을 먹는 밥 시편들. 이젠 쉬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일해야 밥값을 벌 수 있다. "어째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이하 「노동절 백반 한 상」),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리고 내년에도 "뼈 빠지게 일해야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사실.
「쉰」이란 작품은 읽으면서는 눈물이 핑 돈다. 이 작품도 함순례 시 「저녁 강」처럼 ‘ㅅ’이라는 자음이 주는 매력이 잘 드러난다. ‘쉬다’, ‘쉰’, ‘쇠막대기’, ‘삭다’, ‘생’ 등 ‘ㅅ’의 연결고리가 너무나 슬픈 가락이고, 뭉클한 리듬이고, 중의적인 표현이다. 마찰음이면서 치조음(잇몸소리)인 ‘ㅅ’은 정서적으로나 발음의 방법으로나 마찰을 배후에 깔고 있다. ‘쉰’이라고 발음을 할 때 그것은 발음기관의 조음방법으로 볼 때 입천장과 혓바닥의 좁은 틈으로 나오는 마찰이고, 잇몸과 이빨 사이의 마찰이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마찰일 수밖에 없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과 사랑의 마찰을 경험했던가.
‘마음이 불편하면 몸이 알아서 미끄러지고/ 몸이 불편하면 마음이 알아서 미끄러져주고’라는 평이한 일상적 진술은 그냥 평이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 대한 해석력이 돋보이는 진술이다. 이것은 평탄하지 않은 삶, 힘겨운 삶, 몸과 마음이 서로 힘들어할 때를 반복적이고 누적적으로 수없이 경험했을 때나 나올 법한 진술이다. 어느 정도는 깨달음이 스며있는 진술이기에 평이한 진술이지만 뭉클함을 주는 시적 진술이 되었다.
노점 사주쟁이는 너무 솔직해서 나쁜 놈! 토정비결을 보면 사주의 70%는 좋은 말이고, 30% 정도는 안 좋은 말로 되어 있다. 좋은 말이 두 배 이상 많은 것이다. 그런데 노점 사주쟁이는 안 좋은 사주를 얘기한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이번 생이 인간으로서 마지막이야”라는 독설보다는 훨씬 낫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분명 사주쟁이의 말이다. ‘아직 멀었어 더 열심히 살아’ 이 말은 분명 사주쟁이의 말이다. 격려의 말이고, 희망의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시적화자의 독백으로도 들리고, 방백으로도 들린다. 속삭임, 넋두리, 혼잣말로도 들리고, 외침, 괴성, 부르짖음으로도 메아리친다. ‘아직 멀었어 더 열심히 살아’라는 문장은 함순례 시인의 ‘살이 그립다’처럼 너무나 솔직하고, 꾸밈없는 진술이다. 그래서 울림이 큰 진술이 되었다.
노동이 우리의 영혼과 일상을 어떻게 흔드는지, 어떻게 흐느적거리게 하는지, 어떻게 힘들게 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시편들이다. 「쉰」이라는 작품과 더불어 「울게 하소서」는 고백하건대… 나에게는 명작이다. 그 밖에도 「갯벌의 첫 새벽」, 「그림자의 눈」, 「보름달은 60촉이다」, 「오십견」, 「액자 뒤에서」, 「불편한 밥상」, 「일용할 양식」, 「울컥」, 「치유의 핑계」, 「밥 한 공기의 희망」 등의 시편들이 주는 먹먹함과 울림…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내 나이도 「쉰」이다. 52세다. 내 주변에 '쉰'인 사람이 많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나이에 벌써 와 있고, 쉰을 살고 있다. 단단하고 당당한 사십 대를 지나 점점 물렁해지고, 오십견에 걸리고, 몸이 자꾸 아파오고, 삶이 버겁고, 날카로움이 무디어지는 ‘쉰’. 삶의 짐은 더 무거워지는 ‘쉰’. 우리 모두 이 땅의 힘겨운 ‘쉰’들을 따스하게 감싸주고, 위로해주어야 할 것 같다.
●김승강 시인의 시 「달력그림」
처녀와 어머니와
목줄을 한 개가
자작나무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 줄기 햇살이
그들 앞길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연히 뒤따라 걷던 나는
한순간 그들과 나란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그들과 나란해졌던 순간을
벽에 걸어두고
계절이 다 가도록 올려다보았다
-김승강 「달력그림」 전문( 문예지 <시와 경계> 2018 겨울호)
김승강 시인의 시도 쉽게 읽힌다. 매일 반복되는 삶, 즉 일상 체험에서 시를 길어 올린다. 어찌 보면 있는 그대로 써내려간다. 일상에서 보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쓴다. 그냥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진술처럼 보인다. 그래서 특별히 시평이나 해설조차 필요 없고 있는 그대로 읽으면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거창한 경험도 아니다. 특별한 수사와 신선한 기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진술인데 시적 진술로써 마음에 와 닿는다. 왜 일까?
「달력그림」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김승강 시인은 자주 걷는가 보다. 자작나무 숲길은 빛과 색의 향연이다. 자작나무는 햇볕을 좋아해서 자작나무가 있는 곳이면 햇살도 가득하다. 자작나무 잎새는 팔랑거리기를 좋아한다. 살살 부는 바람에도 잎새를 나폴 거리며 햇살과 함께 뒤집어지고 나비처럼 날개를 팔랑거리면서 반짝인다. 순백색의 수피를 가지고 있어서 한방에서는 수피를 백화피白樺皮라 하는데 약재로 이용한다. 밑동부터 우듬지까지 길게 쭉쭉 뻗은 기둥과 나뭇가지가 모두 순백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또한 껍질이 살짝 터져서 눈썹이나 눈동자처럼 생긴 까만 점박이 무늬를 지니고 있다. 나무의 질이 좋고 잘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아서 건축재나 조각재 등에 좋다.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이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그림의 재료도 자작나무의 껍질이다. 그만큼 자작나무는 아름답고 신묘하다. 그런 자작나무 숲길을 처녀와 어머니와 애완견이 함께 걷고 있다. 시적화자는 뒤를 미행하다가 함께 나란히 걷게 된다. 그게 끝이다. 이 시를 멋지게 살린 것은 시의 뒷부분 ‘집으로 돌아와/ 그들과 나란해졌던 순간을/ 벽에 걸어두고/ 계절이 다 가도록 올려다보았다’는 시적 진술이다. ‘나란히 했던 순간’은 아주 짧았을 것이다. 뒤따라가다가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어느 순간 나란히 했을 것이고 잠시 후에 시적화자가 앞질러 갔을 것이다. 시적화자는 남자일 가능성이 크다. 추측하건데 처녀(딸)과 어머니와 애완견과 나란히 걷게 되었을 때 느끼는 시적화자의 감흥은 아마도 그녀의 아들이거나, 그녀의 남편으로 순간 착각을 했을 때 받았을 묘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란해졌던 순간’이 그토록 묘한 풍경으로 각인되었을 것이고 집에 와서 달력그림으로 오래 오래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달력그림」은 그의 등단작인 「미행」의 연장선에 있다. 두 시는 경험과 시적 진술에서 유사성이 짙게 느껴진다.
옆길로 돌아갈까 하다가
우연히 네 뒤를 밟고 말았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받쳐 입고
연뿌리 같은 종아리를 드러낸 채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걷고 있는 너는
네 발목이 예쁜 걸 아니,
적산가옥 늙은 백목련
담 밖으로 꽃잎 톡톡 떨굴 때
모르는 네 발목이 너무 슬퍼서
네 뒤를 밟으며
나는 또 울었다
-김승강 「미행」 전문(〈문학•판>등단작)
「달력그림」이 자작나무 숲길이라면 「미행」은 적산가옥이 있는 골목길이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걸어가는 너를 뒤에서 미행하는 꼴이 되었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짧은 치마는 아니다. 긴 치마를 입었다. 그래서 종아리만 살짝 보인다. 너의 종아리와 발목이 너무 예쁘다. 그런데 적산가옥 늙은 백목련이 담 밖으로 꽃잎을 떨굴 때 너의 예쁜 발목은 너무 슬퍼 보인다. 예쁜 발목이 백목련 때문에 슬픈 발목이 된다는 이 부분이야말로 평범한 진술이 뭉클한 시적진술로 치환되는 포인트다. 아마 목련의 종아리도 가늘 것이다. 목련의 낙화를 보고 예쁜 네 발목이 왜 갑자기 슬퍼지는 것일까? 마음을 몰라주는 그대 때문일까? 애절한 짝사랑일까? 네 발목을 보는 내가 슬픈 것일까? 꽃잎마저 떨어지는 봄날의 골목에서 그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내 처지가 슬픈 것일까? 봄날 아침 적산가옥 담 밖으로 목련꽃이 툭툭 떨어지는 골목길을 걷고 있는 ‘너’의 종아리와 발목은 눈물겹도록 예쁘고 아름다운데 그것을 몰래 바라보고 있는 ‘나’의 마음은 눈물겹도록 슬픈 것이다.
「달력그림」과 「미행」은 잘 모르는 골목이나 자작나무 숲길을 걷는 누군가의 뒤를 우연히 밟게 되었을 때 쓰인 작품이다. 김승강 시인은 매일 끊임없이 어딘가를 걷는 일이 생활화되어 있을 것 같다. 걸으면서 시와 마주치고, 걸으면서 시를 길어내는 시인일 것 같다. 일상과 매우 밀착된 곳에서 쓰인 일상 체험의 시편들. 어떤 꾸밈이나 기교가 없는 평범한 진술에 새로운 해석력을 살짝 가미했는데도 담백하고도 뭉클한 시가 되었다.
●김승기 시인의 시 「혼자」
혼자서 가만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 보세요
무거운 공간이 만져집니다
어떤 이는
그것에 눌려
꼼짝 못 하고
어떤 이는 그만,
길을 잃곤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누구와 같이 있을 때
‘오롯이 혼자’
일지 몰라요
-김승기 「혼자」 전문(<시와 경계> 2018 겨울호에서)
어! 아! 20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이 시를 읽고, 읽자마자 놀람의 ‘어!’와 감탄의 ‘아!’를 동시에 연발했다. 혼자서 가만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면 무거운 공간이 만져진다니!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호명하는 순간 그 발음 속에 무거운 공간이 만져진다니! 아주 쉬운 일상의 어휘만을 가지고 어렵지 않고 툭 내뱉는 진술인데 그 안에 산뜻하고 특별한 해석력이 담겨 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이름이라는 무거운 공간 때문에 어떤 이는 스스로의 이름에 눌려 꼼짝 못하고 어떤 이는 그만 길을 잃고 만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이름 짓기다.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의 가계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아이의 이름을 지은 사람이 그 아이에게 바라는 소망과 기원의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이름은 그 이름으로 호명되는 아이에 대한 이미지 형성 기능, 즉 포지셔닝(positioning)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름 이전의 대상은 그 자체가 아니라 이름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야만 우리의 인식 세계 속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름은, 대상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라틴어 격언 중에는 ‘이름이 곧 징조(Nomen est omen)’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또 이름을 듣는 이의 머릿속에 그 사람을 떠오르게끔 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름은 그저 누군가를 호출하거나 지칭하기 위한 단어의 조합만은 아닌 셈이다. 사람의 이름에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감정, 경험,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등 온갖 것들이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이름은 의미와 역할, 여러 가지 얘깃거리들, 삶의 무게를 담고 있다.
특히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이름을 호명해보는 순간 이름의 무게와 이름의 역할과 이름의 얘기와 혼자(단독자)라는 철학적인 함의까지 호명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겁고, 짓눌리고, 길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혼자」라는 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승기의 또 다른 시 「단독자單獨者를 꿈꾸며」를 함께 읽는 것이 유익하다.
나의 배경을 조용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만의 작은 길을/ 홀로 걷게 하소서/ 그 길 위에서/ 한껏 작아져/ 풀꽃들과 눈 맞추게 하시고/ 가슴엔 좁은 문은 없어/ 새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사방 뛰어놀게 하소서/ 길은 항상 끊어집니다/ 산등성이를 돌아설 때/ 나도 잠깐 끊어져/ 너무 먼 꿈을 꾸지 않게 하소서/ 나는 매일, 가던 길과 헤어지고/ 오는 길을 데리고 옵니다/ 내 뒤엔 발자국들이/ 상사화 꽃대궁처럼 피어나/ 외딸지는 않는 자세로/ 기꺼이 나를 보냅니다/ 혼자라는 것은/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과 같이 하는 것/ 다가설 세상을 위해/ 나의 한켠을 항상/ 공손히 비워두게 하소서
키에르케골 철학의 중요한 개념 하나가 ‘단독자’다. 그의 명구에 나오는 “신 앞에선 단독자”는 대중에게 의지하지 않고 신 앞에 서서 자신의 무력과 책임을 순전히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대중이 보기엔 ‘자신만의 길을 홀로 걷고’, ‘길도 자신도 끊어져’ 지내는 것 같지만, 가슴으로 이미 ‘외딸지는 않는 자세로’ ‘기꺼이 나를 보내고’ ‘공손히 자신을 비우는’ 법을 깨우치고 있다. ‘홀로 있음’, ‘나는 나’, ‘내 인생은 나의 것’, ‘일체유심조’, ‘단독자’임을 늘 자각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내가 나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오로지 내 인생의 내 몫이다. 그러면서도 늘 내 곁에는 타인과 타자가 있다. 새소리, 풀벌레소리, 바람소리, 상사화 꽃대궁 등등 타자와 끊임없이 접속하고 접촉한다. ‘기꺼이 나를 보내야’ ‘오는 길을 데리고 올’ 수 있다. 진정한 단독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과 같이’한다. 외줄기 끝에 꽃자루가 달려 꽃대궁을 이루는 상사화가 외딸지 않은 자세로 피어있듯. 외딸지 않은 자세가 곧 혼자의 진정한 개념이다.
「혼자」와 「단독자單獨者를 꿈꾸며」라는 시편도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쓰는 매우 쉬운 일상어로 시를 썼다. 평범한 일상적인 진술처럼 보이지만 일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력을 행간에 넣음으로써 뭉클한 시적 진술이 되었다.
- 장인수 시인
충북 진천 출생. 2003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적멸에 앉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