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은 국가시설물 때문에 상봉 천황봉(845m) 접근이 불가능하단다.
그래서 10여개가 넘는 등산코스 조합중 일반적으로 많이 가는 코스로 가보기로 했다.
동학사에서 출발하여 은선폭포 -관음봉(816m) - 자연성릉 - 삼불봉고개(775m) -남매탑 - 동학사로 내려오는 6.4Km 4시간 코스.
주차장이 1.8Km 떨어져 있으니 앞 뒤로 더하면 등산 예정시간은 도합 40여분은 늘어나겠고...
아침 7시에 포항 출발...
포항의 날씨는 약간 춥고,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네비게이션에서는 도착 예정시간을 9시 45분이라고 알려줬다.
순조롭다.........라고 생각한 건 무지의 소치.
오늘이 현충일... 국립현충원을 지나치는 시간은 현충일 기념식 직전.
DMB 틀어보니... 오가는 차 다 막혔다...
월드컵경기장에서부터 현충원 지나칠 때까지는 거의 서 있었다.
순국선열들의 후예들이 인도를 따라 끊이지 않고 현충원 쪽으로 가고 있다.
깨끗한 옷으로 차려 입은 그들의 손에는 순백의 꽃들이 들려 있다.
길 옆을 보니 弔花이자 造花인 일회용품들이 팔려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숙연한 표정의 젊은이들이 몇쌍이 차 옆으로 지나칠 때 표정이 보였다.
...
......
투덜거리는 짓도 그만 뒀다.
동학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 12시 20분...
동학사로 올라간 후 사진 2~3장 찍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순하게 올라 격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격하게 올랐다가 순하게 떨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등산 특징
힘 있을 때 많이 가고 내려올 때는 스트레칭을 겸하겠다는 생각이다.
차 안에서 운전대 붙잡고 불필요한 시간을 오래 보낸 탓인지 관음봉 오를 때는 내가 제일 먼저 지쳐오는 것 같았다.
등산로... 참 좋다.
인터넷 뒤져보니 돌 계단과 돌바닥이라서 안 좋았다는 소회들이 보이더라만,
우리가 그 동안 다녀온 산들은 대부분 길조차 보이지 않아서 왔던 길마저 되돌아 가곤 했었는데...
자연성릉과 삼불봉... 절경이다.
아래를 보니 동학사 전경이 큰 숲 안에 주먹만하게 들어 앉아 있다.
위로 하늘이 보이고 좌우로 숲이 보이고 가운데에는 내가 찾는 것들이 보이고 멀리는 마을이 보인다.
거목 느티나무들의 그늘 아래 전설의 고향 같은 오뉘탑을 만나서 한장 찍고는 디카 밧데리 소멸...
(현충원 앞에서 서 있는 동안 불필요한 동영상들을 많이 찍은 탓)
남매탑의 전설은 그럴 듯 하나 사실은,
원래 있던 백제 5층탑(지금은 4층탑)옆에 신라인들이 지지 않으려고 7층탑을 옆에 세웠고,
나중에 백제의 후예들이 전설로 다시 뒤집어놓은 것이란다.
동학사 부근까지 내려오는 길 옆에 계곡물이 따라 붙었다.
큰 바위에 골을 만든 맑고 길고 좁은 모양의 계곡물이 끝없이 내려가고 있엇다.
앞에가는 커플 한쌍이 지치고 물도 떨어졌는지 여자는 발 담그고 가자고 칭얼대고,
남자는 국립공원에서는 그러면 안된다고 달래고,,, 티격태격...
(당연히 안되지 이 철딱서니야. 차라리 내게 물을 달라고 해라. 이제 10분도 안 남았는데...얄미워서 그냥 지나침)
포항으로 올때는 마눌님이 운전대를 잡았는데...
도착예정시간이 9시 10분,
영천 쪽으로 가서 유명한 할메고디탕으로 저녁을 때우려 했는데...
"고디가 다 떨어졌어요~" 역시 장사 잘 되는 집.
식당 문 다 닫을까봐 열심히 밟아댄 탓에 8시 40분 포항 도착
재래시장 쪽으로 가서 감자탕 집에 들렀다가 집으로 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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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계룡산 오른 그날,
오체투지순례단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
"상악단(묘향산), 중악단(계룡산), 하악단(지리산)은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국가적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마음과 역량을 하나로 모아 통합하고
나아갈 바를 하늘에 묻고 고하는 천제를 거행하던 장소"였다...
"역사와 우리 국민에게는 지금까지의 혼란만으로도 충분한 불행이기에,
만일 권력의 존재 자체가 분열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100번 넘는 대국민 사과가 오히려 국민에게는 1000일이 넘는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차라리 권력 스스로 진퇴를 엄중히 판단하는 것이 역사와 민족을 위한 길임을 고통스럽게 촉구하는 바이다."

나름 깔끔하게 정리했음 ^^;

길상암

동학사


은선폭포 가는 길... 내려다 보니...

영험해 보이는 할머니... 멋지삼

은선폭포 뒷편의 쌀개봉(827m)



천년 고찰 동학사를 품고...

삼불봉이 보인다









백제의 5층석탑(현재는 4층), 신라의 7층석탑- 청량사지 쌍탑...
계룡산 남매탑(男妹塔. 오뉘탑) 전설
계룡산 남매탑(男妹塔)은 동학사(東鶴寺)에서 북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오뉘탑, 청량사지쌍탑(淸凉寺址雙塔)이라고도 합니다.
『청량사(淸凉寺)』는 재명와편(在銘瓦片)의 출토에 의하여 확인된 절로 이 절이
언제 창건되어 언제 폐사 했는지는 정확한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매탑의 건축양식으로 볼 때 청량사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초에 실제
존재한 절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현재 절터에는 계명정사라는 암자가 있으며
주변의 옛 절터는 밭(田)으로 경작되고 있습니다.
남매탑에는 탑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패망(敗亡)하자 백제의 왕족 이였던 한 사람이
계룡산으로 들어와 현재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지 터에서 스님이 되어 한 칸의
초암(草庵)을 짓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스님이 신라 성덕왕대 상원조사(上願祖師) 라고도 한다)
스님은 나라 잃은 설음을 모두 잊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여생을 보내고자
하루하루를 불공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어
밖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좌선을 하며 삼매에 들어
있는데 밖에서 큰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몸을 푼 후 밖을 나가보니 송아지 만한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린 채 고통
스러워하며 시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이 가까이 가보니 호랑이가 동물을
잡아먹다가 갈비뼈가 목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은 호랑이에게 "네가 살생한 까닭으로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호랑이 목에 손을 넣어 갈비뼈를 빼주었는데 호랑이는 연신 고마운 몸짓을
하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호랑이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간혹 나타나 산돼지도 물어다 놓고 노루도
물어다 놓고 가곤 했다. 스님은 호랑이가 동물들을 물어다 놓자
"내가 그토록 살생을 하지 말라고 했거늘 또 살생을 했단 말이냐?"
하며 호랑이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나서 몇 일이 지난 어느 날 밤, 스님이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밖을 나가 주위를 살펴보니 이게 웬일
인가.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 아리따운 묘령의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머리에 가르마가 단정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갓 시집온 처녀
같았다.
이 깊은 밤 산중에 묘령의 여인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스님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여인을 초암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정성을 다해
극진한 간호를 했다. 그러자 여인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스님은 여인이 의식이
돌아오자 여인에게 야밤에 이 곳에 온 연유를 물었다.
"낭자는 뉘오신대 이 깊은 밤에 산중에 와 계신 것입니까?"
그러자 여인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으며 겁에 질린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스님이 여인을 가까스로 안정시키자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소저는 경상도 상주 땅에 사는 처자이온데,
혼기가 되어 이웃 마을 양반 댁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날밤에 들기 전에 소피가 마려워 잠깐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송아지 만한 호랑이가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한 끝에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바로 이 곳이옵니다."
여인은 결혼 첫날밤에 소피를 보려 나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여인네들은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방에서 일을
보기 위하여 요강이 생겨났다고 한다. 스님은 여인을 초암에서 며칠 머물게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나 여인은 말하기를
"고향에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온데 이 몸으로 어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저는 스님을 평생
지아비로 모시겠나이다."
하며 청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스님은
"나는 불제자인데 어찌 여인과 혼인 할 수 있겠소."
라고 거절하며 그대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오누이처럼 같이 살아가자고 하여
오누이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로서 수행을 하다가
말년에 한날 한시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입적후 사리(舍利)가 나온 것을 동학사(東鶴寺) 개창주(開創主)인 회의화상(懷義
和尙)이 수습하여 7층탑과 5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행적을 후대까지 기리고자 이 석탑을 남매탑(男妹塔)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첫댓글 게으른 탓에 아직은 가보질 못했는데, 조만간 계룡산의 전설을 따라 반드시 다녀와야겠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부인께서도 동행하셨나 봅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함께 하고 싶군요. 멋진 사진과 산행기 그리고 불자의 참 도리를 일깨워 주는 남매탑의 전설까지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처녀 시절 선배들과 다녀 온 곳이지요. 그 때는 좋은 줄도 모르고 따라간 곳이지요. 다시 한 번 그 분과 같이 다녀와야 겠네요.
사진 감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