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김진철 서울공대 재료공학부 04학번ㆍhanabaro@hotmail.com |
2005년 겨울 서울공대는 공과대학 최초로 석좌교수를 임명했다. 고분자 물리화학 분야의 권위자인 조원호 재료공학부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컴퓨터 모사기법으로 고분자 물성 예측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으며, 최근엔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규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어떤 연구를 하면 석좌교수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걸까?’ 지난해 재료공학부 교수가 서울공대 첫 석좌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자 학과가 시끌벅적했다.
공대 학생뿐만 아니라 교내 상당수 학생들은 화제의 주인공인 조원호 교수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전공 학부 교수라는 사실만으로도 절로 어깨가 으쓱했다. 그러던 중에 조원호 교수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생겼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교수실 문을 두드렸다.
서울공대 첫 석좌교수
“분명 영광스런 자리이자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부담도 됩니다. 주위에서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죠. 지금보다 더 열심히 연구해서 보답할 생각입니다.”
조 교수의 첫마디에선 겸손함과 각오가 베어났다. 석좌교수는 외부기관이나 개인의 기탁금·부담금 등으로 조성된 기금으로 탁월한 연구 업적을 이룬 석학의 교육과 연구활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제도다.
조 교수는 198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상태방정식 개념을 도입해 고분자 혼합물의 열역학 상태를 해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외국에선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이 분야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조 교수는 당시 연구환경으로 볼 때 비슷한 연구주제나 방법으론 선진국과 경쟁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놓치고 있는 기술을 잘 찾아내 그것을 상품화하는 틈새 전략이 필요합니다. 연구도 마찬가지죠.”
조 교수는 고분자 분야에서 선진 연구그룹이 무엇을 빠뜨렸는지 꼼꼼히 분석한 뒤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그 당시 고분자 분야의 세계 최고의 학술지인 ‘매크로몰레큘스’(Macro Molecules)에 1년에 몇 편씩 논문을 발표했다.
1990년대 들어 조 교수는 컴퓨터 모사기법을 고분자 물질 연구에 도입해 획기적인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 분야는 대부분 실험 위주로 연구가 진행됐다. 마침 컴퓨터 계산속도가 놀랄 정도로 향상돼 컴퓨터 모사기법에 의한 정확도도 높아졌다. 그는 컴퓨터 모사기법을 사용해 물성을 예측한 논문으로 전세계 고분자 연구에서 주목을 받았다.
요즘 그는 생체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특히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데 관심이 많다. 인체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은 실험적인 방법으로 규명하는데 한계가 있어 컴퓨터 공간 속에서 생명활동을 재현하면서 단백질의 구조를 알아내려고 한다. 연구 결과는 이미 생체물리 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지 중 하나인 ‘바이오피지컬 저널’(Biophysical Journal)에 여러 편 실렸으며 그 결과가 미국의 의약 잡지인 ‘드럭 디스커버리’(Drug Discovery)에 주요 연구결과로 소개됐다.
“교수 혼자만의 힘으론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도 빛을 발하기 힘듭니다. 우수한 학생들을 만난 건 연구자로선 행운입니다.”
틈새 연구가 경쟁력
조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학생들의 실력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의적 문제해결력의 부재는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이와 관련해 그는 유학시절 경험담을 들려줬다.
온갖 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던 조 교수는 미국 폴리테크닉대에 진학해서도 두려울 게 없었다. 예상대로 시험성적도 잘 나왔다. 그러던 중에 첫 실험보고서를 제출할 일이 생겼다. 조 교수는 그동안 국내에서 배운 방법으로 열심히 작성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반면 미국인 룸메이트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건성으로 쓰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자신의 점수가 높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룸메이트가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처음엔 이상히 여겨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의 연구보고서를 보자 의문점이 절로 풀렸다. 강의시간에 교수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독특한 방식으로 실험결과를 해석하고 그 결과의 신뢰도까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미국에선 중학교 생물시간에 나무에 대해 배우는데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더군요. 나무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죠. 이에 비해 우리는 나무의 구조와 기능 등 교과서의 지식을 배우는데 치중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창의적 사고를 경험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거죠.”
이 일로 조 교수는 학문에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성실함은 기본이요 연구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틈새 연구라는 것에 주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지 모른다고 했다.
창의적 사고는 연구의 출발점
조 교수는 지난해까지 서울공대 재료공학부 학부장, 한국고분자학회 및 계면접착학회 회장, 국제 학술회의 위원장 등을 도맡아 했다. 학자로서 연구만큼 후진양성과 지식의 사회환원도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잘 자랍니다. 당장은 공학 공부가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져도 진정한 공학도이자 사회인으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조 교수는 공학인에겐 깊이있는 사고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주어진 문제를 깊이 고민해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경영학적 마인드, 윤리의식 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일을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다 보니 연구 외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생활과 연구를 조화롭게 만들지 못한 셈이죠. 인생을 돌이켜 보니 한편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조 교수는 틈이 날 때면 고고학, 역사, 명상 서적을 즐겨본다. 요즘엔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산에 오른다. 이제서야 느긋하게 삶의 또 다른 재미를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Profile
1973년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미국 폴리테크닉대에서 고분자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부터 서울공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2005년 서울공대 석좌교수로 임명됐다. 현재 서울대 고차구조형 유기재료 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으며 2000년부터 북경화공대 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취·재·후·기
꿈을 좇다보면 자칫 일상의 기쁨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가벼운 시험 앞에서도 작아지는 나를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성공한’ 사람보다 삶을 아는 ‘멋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