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 확인하기
신노우
큰형님이 모내기를 마치자, 작은형님이 모임을 주선한다. 네 집이 시간 되는 날을 잡으려니 쉽지 않다. 여러 번 전화 끝에 공통분모를 찾아 날을 잡았다. 이번에는 우리 네 형제 부부 외에 두 분 고모님을 모시자고 큰형님이 제안한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파도에 떠밀리는 배같이 바쁜 일상에 쫓기며 산다. 형제, 일가친척이 가까이 있어도 알은체하기 쉽지 않다. 형제들도 자녀들이 결혼하여 손주가 태어나면 형제 가정별로 모이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니 부모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면 형제간이라도 일 년에 고작 만나는 날이 두 명절과 부모 제사 정도다. 이제 멀리서 사는 형제나 친척은 해포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막말로 누가 죽어야 장례식장에서 혈육을 만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네 형제 부부 모두가 예순을 지나면서 날을 정해서 혈육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농사짓는 큰형님이 모내기를 끝냈을 때나 가을 추수 다 했을 때 애쓰셨다고. 좋은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을 당한 형제가 있을 때, 네 형제 부부가 식사하며 안부를 묻고 축하하거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리를 갖는다.
아버지는 열 남매 중에 셋째였는데, 고모가 일곱 분이시다. 여덟 분은 이미 하늘에 별이 되었고, 대구에 사는 연세가 아흔셋인 일곱째 고모님과 시골에 사는 일흔여덟 막내 고모님만 남았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양, 비 오는 날에 두 분 고모님과 조카 네 형제 부부가 만났다.
일곱째 고모님은 고운 얼굴에 늘 하회탈 웃음으로 우리들을 따뜻하게 품으셨다. 작은형님과 막냇동생은 고모님 댁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기에 이런저런 신세도 많이 졌다. 고모부는 그 시절에 대학을 나왔다. 말쑥하고 당당한 외모만큼이나 아귀차서 누구에게나 바른말로 이끌고 정으로 도와주었다. 공무원으로 도청에 근무하다가 사업을 하기도 했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적의 총탄에 손가락 하나를 잃어 원호 가족이다. 명절에 처가에 오면 우리에게 항상 빳빳한 지폐를 용돈으로 주며 공부 잘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은근히 자주 오기를 기다리게 하는 분이셨다. 네 남매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아버지를 여러 번 실망하게 하다가 결국 부모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건밤으로 평생 가슴앓이하던 고모부마저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홀로 된 고모님은 모든 걸 내려놓고 지금은 부처님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다.
예뻤던 막내 고모님은 속아서 결혼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결혼 중매쟁이가 잘생긴 시동생 사진을 들고 와서 신랑감이라 속여서 결혼이 성사되었다. 소쩍새 울음만이 위안이 되는 깊은 산골에 살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본 막내 고모부는 메떨어진 모습에 몸이 약하고 술 없으면 못사는 두목 답답한 사람이었다. 처가에 와서도 술 먹고 실수를 종종 해서 고모님이 아깝고 마음 겨웠다. 결국 한창 성장기에 있는 딸 다섯을 두고 고모부는 술병으로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곰살궂던 막내 고모는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문중에서 칭찬 들으며 딸 다섯을 대학 공부를 다 시켰다. 모두 출가하고 막내 고모님 역시 홀로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적적하게 지내고 있다.
식사가 끝날 즈음에 일곱째 고모님이 가방 속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서 큰형님에게 슬쩍 내민다. 옆에 앉아 있던 막내 고모님도 뒤질세라 겨끔내기로 봉투를 건넨다.
‘이게 뭡니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이걸로 밥값에 보태거라.’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오랜만에 두 고모님을 모셨는데, 넣어 두세요.’
‘우리 형제, 고모님에게 밥 대접할 형편이 다 됩니다.’
큰형님이 단호하게 말하며, 엉겁결에 받은 봉투를 억지로 고모님들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분위기를 눙치기 위해 나섰다. 오늘 계산은 제가 합니다. 두 분 고모님은 꽃을 너무 좋아하시지요. 아담한 꽃바구니에 심은 공기정화식물을 드렸다. 작은형님은 과일을, 막내는 포장한 떡을 선물한다.
‘살다가 이런 좋은 날도 있구나’,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세월이 소환되는가 보다, 두 분 고모님 눈에 눈물이 크렁하다. 진즉 마음을 읽고 찾아서 안아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찻집을 겸하는 식당이라 얼른 차를 시켜 남은 이야기보따리를 풀도록 한다.
내가 양로원에 봉사 갈 시간이 되어 “가을에 사촌들과도 만남을 주선하려고 합니다. 그때도 연락드리고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른 봄에 막내 고모님 마을에 미나리 나오면 꼭 연락하세요. 그때는 미나리 먹고 막내 고모님 집에 들러 차 한 잔 얻어먹겠습니다.” 하며 고모님을 안아드렸다.
대구 일곱째 고모님은 고등학교 때 신세진 작은형님이 모시고, 막내 고모님은 동갑인 큰형님이 태워드리기로 하고 각자 차에 오른다. 그때, 식당 사장이 “잠깐만요.” 하며 썼던 우산도 내 던지고 무얼 잔뜩 무겁게 들고 쫓아온다. ‘옛날에는 먼 길을 발로 걸어서 어른을 찾아뵈었지만,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도 어른을 찾아볼 줄 모르고, 혈육이라도 바쁘게 사느라 남같이 지내는데, 고모님을 모시는 모습이 정말 귀감이 된다.’며 직접 재배한 양파를 집마다 한 꾸러미씩 선물로 준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올려다본 비 그친 하늘이 참, 맑고 푸르다.
첫댓글 형님이 '공무원연금'지에 실린 내용을 올렸네요.
공무원연금지의 한정된 지면으로 원본을 줄여서 보냈기에 원본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