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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아 (제1일)—①
— [국제퇴계학연구회] 제5회 유교문화 유적답사
2022.08.25.(목)~08.27.(토) (3일간)
[프롤로그] —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는 의미
국제퇴계학연구회 회장 이광호 박사
2015년 ‘국퇴고강’(국제퇴계학연구회 고전강독)이 시작된 이후 강독한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출판을 위하여 2017년 여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사장 : 김병일)에서 제1차 교정 작업을 하게 되었다. 도산서원 등 부근의 유교문화유적을 답사한 것이 답사의 자연스런 시작이었다. 2018년 여름에는 인산죽염 농공단지(대표이사 : 김윤수)에 유숙하며 고경중마방 제2차 교정 작업을 하였다. 남계서원 등 부근의 유적을 답사한 것이 제2차 답사였다. 2019년 여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소수(紹修)·남계(藍溪)·옥산(玉山)·도산(陶山)·필암(筆巖)·도동(道東)·병산(屛山)·무성(武城)·돈암(遯巖) 등 9개 서원을 답사하였다. ‘道學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주제와 답사자료집을 준비한 명실상부한 답사의 시작이었다. 2020년 여름에는 ‘호남유학의 淵源을 찾아’라는 주제로 담양의 소쇄원, 화순의 죽수서원, 나주의 향교와 경현서원, 광주의 월봉서원, 장성의 고산서원, 부안의 유형원 유적지와 간재 전우의 유적지에 이르는 많은 곳을 답사하였다. 2021년 여름에는 계획은 하였으나 코로나19의 상황이 극심하여 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의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으나 정부의 규제가 완화되어 금년에는 답사를 가게 되었다. 방학 중에도 강독한 《연평답문》을 수정 보완하고 〈보록〉을 다시 번역하느라 많은 회원들은 쉴 틈이 없었다. 바쁜 가운데 예비답사를 하고 자료집을 만드느라 회원들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회원들의 학구열을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퇴계 관련 자료를 주로 강독하고 연구발표하다 보니 호서학파의 학문에 대해서는 보고 들을 기회가 적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나마 한국유학에 대한 이해의 균형감각을 살려나가고자 한다.
국제퇴계학연구회를 위하여 해마다 지원하는 ‘미래보’(대표 이사: 조재효)에 이 기회에 감사드린다. 이번 답사에는 ‘국퇴고강’ 초창기 강독에 참여하신 정병수 시인께서 특별 초청을 해 주셨다. 시인으로 SM벡셀의 사장이 되신 뒤, 국퇴고강에 격려와 지원을 거듭 보내주시는 정병수 시인께 감사드린다. 자료집에 글을 제출하신 회원들과 예비답사를 하신 정학섭 교수, 황연섭 박사, 나대용 총무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항상 편집을 도맡아 하시는 황상희 박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고 싶다.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아」 2박 3일의 답사를 통하여 이 지역 유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회원들 사이의 정도 깊어지기 바란다.
* [호서유학 탐방 참가자] *
이광호, 김덕현, 나대용, 강희복, 정학섭, 이중환, 서근식, 윤재철, 조긍호, 오상수, 이재갑, 이치헌, 이영자, 정황희, 류점숙, 이상숙, 김경조, 황연섭, 현지혜, 황상희, 노정옥, 노정아, 홍효정, 유가효, (정병수)
* [호서유학 탐방 일정] *
[제1일] ▶ 2022년 08월 25일 (목요일) : 서울 낙원동(07:00)→ 서초문화회관(07:30)
• 대전 남간정사→ • 동춘당 고택→ [점심] • 도산서원→ • 논산 명재고택→ • 강경 죽림서원→ • SM백셀 [도고 콘도] (연찬회)
[제2일] ▶ 2022년 08월 26일 (금요일) : 도고 SM백셀(10:00) 출행→ *[연송호텔]
• 이광호 박사 SM백셀 특강→ • 외암마을→ • 맹사성고택→ • 추사고택→ • 최익현묘소→ • 양곡사→ 보은[연송호텔](연찬회)
[제3일] ▶ 2022년 08월 27일 (토요일) : [귀경] 서울 양재동(21:00)→ 낙원동(21:30)
• 보은 동학농민기념공원→ • 과산 화양서원 계곡→ • 충주 팔봉서원→ • 황강영당→ • 청풍문화재단지→ • 제천 자양영당
* [호서유학의 유적 답사] (제1일) : 8월 25일(목요일) 오전
○ 대전 우암사적공원
우암사적공원은 대전광역시 동구 충정로 53.(가양동)에 있다. 조선 후기 대유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1991년부터 1997년까지 1만 6천여 평에 장판각, 유물관, 서원 등의 건물을 재현해 1998년 4월 17일 사적공원으로 새롭게 조성했다.
대전시 가양3동 큰길(충정로)에 서원으로 올라가는 큰 길이 조성되어 있다. 초입의 좌측에 선생이 말년에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에 정진하던 ‘남간정사’, 건축미가 뛰어난 ‘기국정’이 자리하고 있고, 우측 언덕 위에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이 있다. 우암사적공원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가 보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원 곳곳이 잘 단장되어 있다. 오늘은 현지의 문화해설사를 통하여 ‘남간정사’와 ‘기국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우암의 생애와 유물이 전시된 ‘유물관’을 둘러보고 ‘장판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유물관 앞 홍살문 사이로 멀리 명정문(明正門)이 보인다. 조선시대 서원의 형태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시간 관계상 명정문 안의 서원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서원의 건물 배치와 구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에는 모든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는 뜻의 인함각(忍含閣), 좌측에는 모든 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라는 뜻을 담은 명숙각(明淑閣), 정면에는 마음을 곧게 쓰라는 뜻의 강당인 이직당(以直堂)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 뒤로 매사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뜻의 심결재(審決齋)와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견뢰재(堅牢齋)가 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새로 옮겨 지은 남간사(南澗祠)가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명정문을 나와 우측으로 돌아가면 연못과 덕포루(德布樓)가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진다. 덕포루와 더불어 고즈넉한 연못이 운치를 한층 더한다. 한편 사적공원 내에는 봄, 가을 우암 선생의 제향 봉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우암 송시열 선생의 뜻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조성된 우암사적공원. 대학자 우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남간정사(南澗精舍)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있는 남간정사(南澗精舍)는,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말년에 강학을 위하여 지은 별당 건물이다. 낮은 야산 기슭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송시열(宋時烈)은 1607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九龍村)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 호가 우암(尤庵)이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고, 어머니는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곽자방(郭自防)의 딸 선산 곽씨이다. 곽씨 부인은 명월주(明月珠)를 삼키는 꿈을 꾼 후 우암을 잉태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출산 직전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찾아온 꿈을 꾸고 아내의 해산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암의 어린 시절 이름을 ‘성인이 내려 준 아들’이라는 뜻의 ‘성뢰(聖賚)’로 지었다고 한다.
우암(尤庵)은 1666년경 괴산 화양동에 들어가 화양구곡 중 4곡인 금사담의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공부하며 수양했다. 이후 대전 소제(현 대전 동구 소제동)에 살면서 근처 흥농촌에 서재 ‘능인암(能仁庵)’을 세웠고, 희수(喜壽, 77세)가 되던 1683년(숙종 9년)에 능인암 아래에 서당을 새로 건립했는데, 이것이 남간정사(南澗精舍)다. ‘남간(南澗)’은 ‘양지바른 곳에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이며, 송대의 유학자 주자(朱子, 1130~1200)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많은 제자를 기르고 그의 학문을 대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1686년부터 주자(朱子)의 촌사(村舍)를 본떠 지은 남간정사(南澗精舍)에서 만년을 보냈다. 1689년 숙종이 두 살배기 원자(元子, 장희빈의 아들로 훗날 경종)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됐다. 국문을 받으라는 명을 받고 상경하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향년 83세였다.
사약을 받기 직전인 1689년 5월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남은 일처리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는데 다음과 같다.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인데, 팔십여 살의 나이에도 끝내 듣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하늘이 준 그 소중한 본성을 저버리게 된 것이 마음에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 … ‘직(直)’이란 한 글자를 주시며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것과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오직 ‘직(直)’일 뿐이다 하셨네. …”
남간정사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이다.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오른편 뒷쪽 1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 1칸은 마루보다 높은 누를 만들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양식이다.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건물 앞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시대에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기국정(杞菊亭)’이, 뒤편 언덕 위에는 후대에 지은 사당인 ‘남간사(南澗祠)가 있다. 또한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莊板閣)’이 맞은편 언덕에 있다. 송시열과 관련된 건물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기국정(杞菊亭)
기국정(杞菊亭)은 우암 송시열이 소제동 소제방죽 옆에 세웠던 건물이다. 우암은 소제에 연꽃을 심고 건물 주변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심었는데, ‘연꽃’은 군자를, ‘국화’는 세상을 피하여 사는 것을, ‘구기자(枸杞子)’는 가족의 단란함을 각각 의미한다. 우암은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학문을 논하며 지냈는데, 선비들이 구기자와 국화의 무성함을 보고 건물 이름을 ‘杞菊亭’이라 불렀다. 이 건물은 본래 초가지붕이었으나, 우암의 큰손자가 기와지붕으로 수리하였고, 그 후 소제가 메워지면서 건물도 차츰 허물어지게 되자 1927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송시열(宋時烈)의 생애와 정치
• 송시열(宋時烈)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이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懷德人)’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1633년(27세)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사림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1649)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존주대의(尊周大義)는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명나라를 중화(中華)로 청나라를 이적(夷賊, 오랑캐)로 구별하여 밝힌 것이요, 복수설치(復讐雪恥)는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한다는 뜻이다.
•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 [북벌론(北伐論)] (1658년) ☞
1658년(효종 9)이 되자 송준길이 조정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겨울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에 응답하여 상경했고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제수하여 북벌을 맡긴다. 기유독대(己酉獨對)를 보면 효종이 구체적으로 “북벌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물었을 때, 송시열은 “전하께서 덕(德)을 잘 쌓으시고 학문(學問)을 익히시고...” 라고 말을 했다. 이게 성리학적인 명분론이랑 현실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그의 전후의 행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송시열의 북벌론(北伐論)은 명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송시열이 기실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정치적인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이었다는 주장이다.
•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년)] ☞
송시열은 서인의 중심적 인물로서 남인의 중심적 인물인 윤선도와 기나긴 논쟁을 벌인다. 그 발단은 ‘예송논쟁’에서 비롯되었다.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장렬왕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나로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서인은 기년설, 즉 ‘1년만 입으면 된다’라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설, ‘3년동안 입어야 된다’라고 한 것이다. 송시열은 기년설이 명분에 맞다고 주장했다. 이는 왕의 정통성의 문제와 엮인 복잡한 문제였다.
영의정 정태화는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르려 했지만, 윤휴는 《의례》에 따라 효종이 장남은 아니되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참최복이 맞다고 이의를 제기하였고 여러 신하들에 의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시백이 문제를 정태화에게 물었고,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물어봤는데, 송시열은 4종지설(四種之說)을 꺼내든다. 4종지설은 《의례》에 적혀있는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를 4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송시열은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맏아들이 아닌 중자(衆子)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친아들이기는 하나 적자가 아니라는 주장으로 왕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것이었다.
• 송시열은,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 [갑인예송(甲寅禮訟)] ☞ [갑인환국(甲寅換局, 1674년) ☞
좌찬성에 올랐으나 남인은 송시열이 효종의 장지를 잘못 골랐다고 규탄했고 송시열은 낙향했다. 정계 복귀 후 우의정에 제수되었지만 남인인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좌의정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이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처음에 예조에서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보고를 올려 현종의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송시열의 논리를 따르자면 기년복이 아니라 9개월, 즉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자 예조는 현종에게 “기년복이 아니라 대공복이 맞습니다.” 라고 다시 보고를 올렸는데 현종이 격노하여 예조 관료들을 파직시킨다.
이에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서인 대신과 대간들은 그럼 예법에 안 맞는다고 반대를 했지만 현종은 서인인 김수흥을 귀양 보내고 남인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3일만에 2차 예송논쟁, 즉 갑인예송(甲寅禮訟)을 자신의 뜻대로 관철시켰다. 하지만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에 삼는 등 서인들에 대한 피바람을 일으키진 않았으니 아들 숙종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이후 현종은 두 달만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뒤를 이은 숙종이 왕의 행장에 송시열이 행패부려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문장을 넣을 것을 지시했다. 송시열의 제자들이 차마 그럴 순 없다고 반대했다. 분노한 숙종은 서인을 모조리 내쫓고 송시열도 논의를 잘못 이끈 죄를 물어 거제로 귀양 보내 버리니 갑인환국(甲寅換局)이다. 귀양 생활 중에 송시열은 청남 계통의 꾸준한 고묘 안율 요청 때문에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 [회니시비(懷尼是非)] (1669년~1716년) ☞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살던 충청도 회덕(懷德), 그리고 윤증이 살던 이성(尼城) 두 지명의 앞 글자를 따서 명명된 논쟁으로,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과 윤증의 불화 때문에 그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을 말한다. 이 분쟁은 1689년 송시열이 죽고 난 이후에도 이어져 1716년 병신처분으로 일단락된다.
1669년 윤선거가 죽자 윤증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명을 부탁한다. 윤증은 송시열이 지은 비문을 받아보고 못마땅하였으나, 그래도 송시열이 스승이므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고쳐서 다시 써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송시열은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인용하면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증은 묘갈명을 다시 몇 번을 수정해 줄 것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거절하였고 이때부터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1681년 윤증은 송시열에게 비난의 편지를 보내려다 박세채의 만류로 그만두었는데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한다. 원래는 묻혀야 됐으나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몰래 베끼어 송시열에게 전하면서 문제가 불거진다. 1682년 ‘임술옥사(임술삼고변)’로 다시 한 번 윤증과 송시열의 갈등이 이어지고 1684년 음력 4월 송시열의 제자 최신이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스승을 배반한 죄로 윤증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면서 사건이 커지게 된다. 윤증의 측근들은 윤증을 옹호했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측근들은 윤증을 비판했다.
•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송시열은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 ☞
사직 후 청주 화양동으로 내려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던 중, 숙종이 28세의 나이로 장희빈에게서 아들(훗날의 경종)을 얻었다. 경종의 탄생은 그간 아들이 없던 왕실 입장에서는 대단한 경사였으나, 숙종이 백일도 안 된 후궁의 아들을 이례적으로 갑자기 무리하게 원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이미 서인 일각에서는 장희빈과 남인 세력, 그리고 숭선군, 동평군 등이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지적한 박세채, 남구만, 김만중 등을 유배시키거나 호되게 질책하면서, 장희빈을 위해선 대신을 벌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조정은, 유상운 등을 중심으로 ‘전하의 나이도 젊은데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숙종을 만류하려 했지만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가 내려지며 장희빈이 이때 ‘희빈’에 봉해진다. 그런데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이 철종을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두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해 태자로 삼은 예를 들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숙종은 격노했고 이를 계획적으로 공론화한다. 조정은 “다 정해진 마당에 부당하긴 해도 속셈이 있었겠습니까?”라는 태도를 보였으나 숙종은 “이 자식이 군주를 무시해서 그런 거다. 놔두면 군주를 무시하는 무리가 잇달아 생길 거다.”라면서 계획대로 걸려든 송시열을 삭탈관직하여 문외 출송한다. 그리고 승정원과 대신, 대간들을 갈아치우면서 남인으로 정권을 바꾼다. 당시 숙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이미 종묘에 다 고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숙종이 바라던 바였다. 남인 대간은 숙종에게 적극 협조하며 상대방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송시열의 목숨을 요구했고, 우선 송시열의 애제자이자 전 영상 김수항이 사사된다.
○ [송시열(宋時烈)의 최후(最後)] ☞
하지만 숙종은 '송시열은 죽여 마땅하긴 해도 절도에 안치했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잠시 물러서더니 인현왕후 폐위를 문제 삼아서 반대하는 소론 신하 박태보, 오두인 등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해 사실상 때려죽이고, 남인들의 반대까지 잠재워버린 다음에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침내 송시열이 목표로 지정된다.
중전 폐비 문제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명을 받고 상경 중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대신 금부도사를 내려 보내 사사하라는 처분을 받게 되었다. 결국 송시열은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사약을 들이키면서, 죽기 전 제자들에게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 라고 말하고,수제자인 권상하에게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론)을 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죽기 전 손자에게 자기가 쓴 상소를 나중에 올리라고도 했다. 그의 관은 널빤지로 덧대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효종의 관에 널빤지를 대게 만든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노론)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老論) 일당 전제(專制)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 대전 회덕 동춘당(同春堂)고택
대전의 전 대덕구의 원래 이름은 ‘회덕(懷德)’으로 그 뜻은 ‘덕을 품은 곳’이었다. 《논어論語》에서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땅을 품는다(大人懷德 小人懷土).”고 했다. 회덕은 대전의 뿌리이고 회덕의 근원은 선비고을이다. 대전 선비정신의 뿌리는 동춘당 송준길(宋浚吉)과 우암 송시열(宋時烈)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大田) 회덕(懷德)의 동춘당(同春堂)은 현재 대전광역시 송촌동 ‘동춘당공원’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고옥이다.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별당(別堂)이다.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同春堂’ 현판은 송준길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이 건물은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동춘당은 단아하면서도 균형감이 좋고, 우아한 지붕의 곡선 등에서 조선 시대의 별당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었다. 온돌방 측면에 구멍을 내어 굴뚝을 대신한 것은 ‘따뜻함’이라는 본래의 기능보다 어려운 백성을 의식한 '겸양(謙讓)'의 덕목을 지키려 한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동춘(同春)이란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옆면·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 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 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동춘당 별당 뒤쪽 담장 너머 좌측에 너른 마당과 본채가 있고 우측에 집안 사당이 있으며, 그 우측에 송준길을 모신 사당 ‘송씨별묘(宋氏別廟)’가 있다. 배위(配位, 부인) 신주에는 ‘증정경부인진주정씨’로 적혀 있다. 송준길 불천위 사당이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동춘당은 충청도 회덕의 송촌에 세거하는 은진 송씨 가문 출신으로, 서울 정릉동에서 영천군수를 지낸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릉동은 사계(沙溪)와 신독재(愼獨齋)가 난 곳으로 동춘당(同春堂)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세분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고 한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김은휘(金殷輝)의 따님인데, 그는 황강(黃崗) 김계휘(金繼輝)의 아우다. 황강의 아들이 사계 김장생인 점을 고려하면 동춘당은 그 외손으로 사계의 학통을 이었다. 사계는 동춘당의 외당숙이다.
동춘당의 아버지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은 일찍이 김계휘(金繼輝)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서기(徐起)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리학과 예학을 익히고, 2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찰방. 감찰, 직장, 현감등을 거쳐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지냈다. 부친 송이창은 한성에 살다가 조부 송응서가 돌아가자 세 살 때 동춘당을 데리고 회덕으로 내려왔다.
동춘당은 우암과 평생을 함께 공부하고 함께 행동한 사이다. 동춘과 우암은 같은 은진 송씨 13촌 숙질간이 되며 명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윤경李潤慶의 외종손으로 이종 형제간이기도 하다. 이들 사이의 평생에 걸친 남다른 학문적 정치적 우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동춘당과 함께 공부하며 한 살 위인 동춘에게 우암은 ‘춘형(春兄)’이라고 불렀다. 동춘당 9살 때 우암이 송촌(宋村)으로 와서 기거하며 함께 글을 읽었고 25세 때도 함께 공부했다. 우암 송시열의 부친 수옹 송갑조가 아들을 데리고 와 청좌와 송이창에게 배우게 한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일찍부터 ‘도학지교(道學之交)’를 맺어 평생을 함께 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아들 외재 이단하(德水人, 좌의정, 1625-1689)는 동춘당을 기리는 만사에서, 우암과 동춘당을 일러 ‘양송(兩宋)’이라 하고 중국의 ‘이정자(二程子, 정명도와 정이천)’에 견주었다. 동춘당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여하였는데, 인조와 효종·현종 3대를 걸친 사부(師傅)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삼조(三朝)의 빈우(賓友)’로 불린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주요한 비문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대부분이 우암 글, 동춘당 글씨의 구도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순에 있는 정암 조광조 유허비와 남해에 있는 이순신의 사당 충렬사 비이다. ‘양송(兩宋)’이란 찬사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춘당이 15세 때 관례(冠禮, 성년식)를 할 때 사계(沙溪)가 빈(賓)을 맡아 행사를 주재했고, 아들인 신독재(愼獨齋)가 찬(贊, 집사)을 담당했다. 동춘당은 18세 때 역시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사위가 된다. 사계와 신독재, 그리고 우복은 동춘당을 ‘예학(禮學)의 대가(大家)’가 될 것으로 예견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예학자로서의 면모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사계의 대표적인 예설서인 《의례문해(疑禮問解)》 내용 중에 44%가 동춘당의 질문이라는 데서도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동춘당은 송시열과 함께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였다. 그러면서도 동춘당은 당시 대제학을 지낸 영남학파 정경세의 사위가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여당과 야당의 실력자가 서로 사위와 장인이 된 것이다. 학맥으로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정치적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통혼이다. 이 무렵 서인과 남인은 냉랭한 관계였다. 정경세는 송준길을 한 번 만나보고 그 사람됨을 기특하게 여겨 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 남인 지역인 경상도 상주에 송준길을 배향한 ‘흥암서원(興巖書院)’이 있다. 필자가 2020년 낙동강 1300리 종주하는 길에 탐방한 서원이다.
퇴계 선생을 존숭한 송준길
송준길은 당시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장인 정경세(鄭經世) 문하도 드나든다. 동춘당은 그렇게 열려 있었다. 동춘당은 특히 학맥을 떠나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매우 존숭했다. 그는 퇴계의 학문적 장점이 ‘정상신밀(精詳愼密)에 있다’며 퇴계를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동춘당 문집》을 보면 그가 남긴 시(詩)가 그리 많지 않다. 67제(題)에 불과한 작품조차 그 대부분이 사람이 죽었을 때 추모한 시다. 그런데 동춘당은 세상을 떠나던 해 꿈속에서 퇴계를 뵙고 〈기몽(記夢)〉이란 시를 남긴다.
平生欽仰退陶翁 평생토록 퇴계 선생을 내 그리워했거니
沒世精神尙感通 세상 떠났어도 아직도 정신은 감통하네.
此夜夢中承誨語 오늘 밤 꿈속에서 날 가르쳐 주셨는데
覺來山月滿窓櫳 깨고 보니 산의 달이 창안에 가득하네.
동춘당 송준길은 ‘평생토록 퇴계 선생을 흠숭했다’고 고백한 뒤 ‘오늘 밤 꿈속에서 날 찾아와 가르쳐 주셨다’고 했다. 〈기몽(記夢)〉은 놀랍게도 그가 죽은 해(1672년) 정월 11일에 지었다. 공부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 생을 마감할 때 이 작품을 지은 것이다. 이는 그가 평생을 주자와 함께 퇴계를 스승으로 따라 배우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숙(私淑)의 과정이다. 동춘당은 주자학을 조선 성리학의 근간으로 세운 것은 이황과 이이로 이해했다. 《국역 동춘당집》의 해제를 쓴 이봉규 인하대 교수는 “그는 학문적으로 이황(李滉)을 가장 존중했지만 이기(理氣) 등 주요 학설은 이이(李珥)의 입장에 섰다”고 분석했다.
노론의 중심 이론가 송준길
송준길은 정치적으로는 김상헌과 그의 자손들, 그리고 민유증을 비롯한 여흥 민씨 집안 학자들과 밀접하게 교류해 노론(老論) 세력을 형성한다. 이후 17세기가 되면 당쟁으로 발전한다. 당쟁으로 흐른 원인 중 하나가 이른바 예송(禮訟)이다. 예송이란 왕실 의례 적용을 둘러싼 정파적 논란이다. 예제(禮制)는 성리학 이념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장치였다. 예제 수립은 그래서 성리학자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송준길은 예송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노론 입장에 선다. 그는 허목‧윤휴‧윤선도 등 남인 세력의 비판을 방어하는 이론가 역할을 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상사를 주관한다. 상복(喪服)과 관련해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장렬왕후(인조 계비)가 1년짜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선도 등 남인은 3년복으로 맞섰다. 왕통을 계승한 아들을 위해 모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의 논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복제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종법적 위상을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즉 효종의 정통성과 직결돼 있었다. 조정은 결국 《경국대전》을 근거로 기년복을 받아들였다. 열려 있는 송준길은 승자가 된다. 그러나 15년 뒤 동춘당이 세상을 떠나자 전세는 역전된다. 노론은 실각한다.
우암의 정치적 분쟁 중심에 동춘당의 조정자 역할이 돋보였다. 지금은 ‘우암-동춘당’으로 우암을 우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대에는 동춘당의 이름을 앞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회덕향교 대성전에 배향한 동방18현 위차는 성균관 위차를 따르지 않고 우암 보다 동춘당을 위에 두었다. 은진 송씨 대종회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동춘당의 문인으로 남구만, 송규렴, 민유중, 조상우, 홍득우 등이 있다. 동춘당은 유학의 긍극적 목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 했다. 동춘당의 문인인 제월당(霽月堂) 송규렴(宋奎濂, 1630∼1709년)은 우암과 함께 삼송(三宋)이라 불릴 만큼 큰 인물이다.
소대헌(小大軒)—호연재(浩然齋) 고택
서근식 박사와 함께 동춘당공원 안에 있는 소대헌·호연재 고택을 둘러보았다. 이 고택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둘째 손자인 수오재(守迕齋) 송병하(宋炳夏, 1646~1697)가 1674년 분가하여 건립한 건물로, 송병하의 아들 소대헌(小大軒) 송요화(宋堯和, 1682~1764)가 1714년 옮겨지었다. 소대헌의 부인 안동 김씨(1681~1722)는 조선후기 여류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호가 호연재(浩然齋)로 경서와 사서에도 능통하였다. 한시 134수를 남겼다.
고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 소대헌(小大軒, 해서체 현판)과 그 오른쪽에 작은사랑채 오숙당(寤宿堂, 전서체 현판)을 별채로 지었다. 소대헌(小大軒)은 見大體不拘小節(견대체불구소절) 즉 ‘큰 테두리만 보고 작은 마디에는 매달리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다. 소대헌(小大軒)은 가장이 독서나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던 곳이고 오숙당은 장성한 자녀들이 거처하면서 공부를 하는 집이다. 오숙당(寤宿堂)은 부모나 장성한 자녀의 방으로 사용하였던 작은 사랑채 목조건축물이다. 오숙당(寤宿堂)은 소대헌 송요화(宋堯和, 1682~1764)의 아들인 송익흠(宋益欽, 1708~1757)의 호인데 '깨어 있을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항상 공부를 한다'는 뜻이다.
호연재(浩然齋)는 안채는 부인의 당호를 따서 부른 이름이고, 호연당(浩然堂)으로도 불렀다. 작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中門) 옆에는 양반가에서도 보기 드문 서고(書庫)가 있다. 기호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에 사다리꼴 모양의 방형 주초를 놓고 방형기둥을 세운 다음 3량집으로 구성하였다. 안채는 최근에 대청에 유리덧문을 달아 원형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안채 뒤쪽의 언덕 위에 ‘宋氏家廟’(송씨가묘)가 있다. 전서체 현판이 멋지다.
고택은 조선 중기 대전지역의 살림집을 이해할 수 있는 건축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충청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사랑채(소대헌)와 작은사랑채(오숙재)를 동시에 갖추고 대청을 한 쪽에 두는 방식이나 안채의 마루방과 툇마루 등이 전면 뿐 아니라 사방에 다양한 크기로 배치하는 양식은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큰집 격인 동춘당 종택과 함께 한 집안의 가계 계승, 충청지역의 명문가 후손 집안으로서의 면모를 찾을 수 있으며, 비교적 조선 중기의 원형이 잘 남아 있고, 대전지역에서는 살림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역적 특색을 알 수 있는 희소성이 있는 등 민속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소대헌·호연재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호연재 김씨(浩然齋 金氏)
호연재 김씨(浩然齋 金氏, 1681~1722년)는 동춘당의 증손인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했다. 송요화의 은진 송씨 가문은 조부 동춘당을 잇는 노론 집안의 명문이었다. 젊어서 남편은 과거 공부를 위해 타지로 떠나 있고 호연재(浩然齋)는 남편 없이 하인이 무려 30여 명에 이르는 큰 집 살림을 혼자서 도맡아 했다고 한다. 경서와 사서에도 능통했던 호연재는 조선 후기 여류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많은 한시를 지었다. 호연재 김씨의 문학적 재능은 안동 김씨 가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그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문학사적으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뒤를 잇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호연재 김씨는 충남 홍성군 오두에서 태어나 19살에 출가하였고, 42세에 회덕 송촌(宋村)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애 동안 많은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중 134편이 전한다. 호연재 한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친정과 관련된 시편이 60여 편이며 친정에 대한 그리움의 시편들까지 포함하면 그 작품수가 매우 많다. 두 번째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시편은 시가(媤家)의 조카들과 함께 수창한 시편들이다. 송사흠, 송진흠, 송문흠 등 자신의 당질에 해당하는 조카들과 어울려 읊은 시가 40여 편에 이른다.
소대헌고택 옆문 동산 푸른 솔과 어우러진 호연재 김씨 시비가 있다. —〈夜吟(야음)〉이다.
月沈千嶂靜 달빛 잠기어 온 사이 고요한데
泉暎數星澄 샘에 비낀 별빛 맑은 밤
竹葉風煙拂 안개 바람 댓잎에 스치고
梅花雨露凝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生涯三尺劍 삶이란 석 자의 시린 칼인데
心事一懸燈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惆悵年光暮 서러워라 한 해는 또 저물거늘
衰毛歲又增 흰머리 나이만 더하는 구나
시상의 구조가 선경후정(先景後情)으로 짜인 오언율시(五言律詩)의 절창이다. 큰 집안을 꾸려가는 종부의 고달픈 삶을 ‘시린 칼’로 형상화하고 그러나 마음은 늘 한 점 ‘등불’(희망)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모(歲暮)에 무상한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섬세하고 담백한 서정시다.
▶ [성대한 점심식사] ☞ ‘동춘당유적지’ 탐방을 마치고 인근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대전 회덕에서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난 ‘코다리밥상’(042-624-0300)이다. 4사람 분량의 네모난 커다란 접시[大]에 코다리를 통째로 조림하여 올리고, 동치미 등 갖은 반찬을 곁들였다. 모든 반찬이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이른 아침 서울에서 출발하여 차 안에서 김밥 한 줄로 요기를 한 대원들이라 모두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더운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렸다. 오늘의 이 넉넉하고 맛있는 점심은 조긍호 교수께서 식사대를 쾌척하셨다. 따뜻한 고마움과 함께 그 유쾌한 식사의 여운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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