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화의 3단계’
박문호(박사)
‘감지-반응’은 박테리아 수준
‘감각-운동’은 동물 수준
‘지각-행동’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수준
운동의 속성은 ‘회피’와 ‘접근’이다.
‘회피’의 양상은 ‘화내기’로 나타난다.
‘화’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 보이는 표출이다.
‘접근’은 생존 본능을 위해 먹을 것에 접근하고,
그 다음은, 종족 번식 본능을 위해 암컷에 접근한다.
행동과 반응은 다르다.
동물들이 하는 것이 반응이고,
인간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진짜 사랑, 참사랑은 반응이 아니라,
지각 후에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자각하는 행동은 지각에서 나온다.
수동적으로 살려져 가는 게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내가 살아가려면,
“습관적으로 반응해선 안 된다.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지 마라.
예전에는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냈다.
그걸 바꾸려면 어떡해야 할까?
화가 나는 걸 내가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만 화를 낼 건지/안 낼 건지
선택할 수가 있다. 삶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게 바로 ‘자각’이다.”
법륜 스님은 예를 하나 들었다.
“남이 ‘너 고집 그만 피워라’라고 하면 참는다.
그건 변하는 게 아니다. 잠시 멈추는 것이다.
그런데 본인이, ‘아, 내가 참 고집이 세구나’
하고 자각하면 달라진다.
그때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자각의 출발점이 바로 ‘물음’이다.
부처님도 그랬다.”
“부처님이 사춘기 때 성 밖으로 나갔다.
새가 벌레를 쪼아먹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사색에 잠겼다.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왜 하나가 죽어야 하나.
둘이 같이 사는 길은 없는가.
그런 물음과 사색, 그리고 자각.
그게 바로 부처님 출가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법륜 스님은
중생과 붓다의 차이를 흥미롭게 설명했다.
“주위 환경이나 습관에 의해 살려져 가는 삶을,
내가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하면 좋지 않겠나.
습관과 무의식에 의해 살려져 가는 사람을 ‘중생’이라 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사람을 ‘붓다’라고 한다.”
종교는 기복, 즉 복을 빌거나
죽어서 천국 가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종교는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탐구이어야 한다.
종교는 개인의 삶, 그 구체성에 뿌리를 두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것이다.
평화가 중요하다.
가톨릭 미사에서는 매 번
“평화를 빕니다”라고 외친다.
‘평화平和’를 풀면 ‘수평적 조화’이다.
위 아래 격차가 없는 것이 ‘평平’이니
그와 반대되는 글자는 ‘차差’이다.
서로 어울리는 것이 ‘화和’이니,
그와 반대되는 글자는 ‘별別’이다.
문자의 뜻으로 보자면,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 아니라 ‘차별’이다.
평화는 ‘압도적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하마스에 비해
‘압도적 힘의 우위’를 가진 이스라엘이
‘평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정의와 사랑을 버리고
‘압도적 힘의 우위’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전우용(교수)한테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