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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토요일. - 모으시는 주님. 등 )
* 07:59.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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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23 06:47
- 모으시는 주님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시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흩어진 하느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이참에 우리의 모임에 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고 그래서 모임이 많습니다.
계 모임,
등산 모임,
연구 모임,
동창 모임 등.
이런 모임은 자기들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그 목적이 서로 간의 친목 도모나 동호회 활동이나 같은 관심사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철저하게 자기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며 싫으면 그냥 흩어지는 그런 모임입니다.
상인들의 모임,
의사들의 모임,
노동자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서로 간의 필요 충족과 자기 이익의 실현을 위해 모입니다.
당연히 필요 없어지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집니다.
제법 고상한 목적의 모임도 있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와 같이 인류애의 실현을 위한 모임입니다.
어제 저희 <여기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임은 어떤 모임일까 생각해봤는데
저희 모임도 이주민들을 돕고자 하는 공익 모임이지만
앞의 다른 모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인 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 사랑을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적이 아주 고상하고 매우 신앙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저희 협동조합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적이고 신앙적인 활동 단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도 있지만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것이 기본 의미입니다.
가족이 부모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가족이 어떤 이유나 목적 때문에 또 어떤 활동을 같이하기 위해 모이지 않고,
순전히 부모를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도 하느님 자녀들이 하느님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겁니다
그래야 하는데 하느님 자녀들이 왜 흩어졌을까요?
그 이유가 많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떠나고,
교회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각 사람이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고,
그것은 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감각 안에서 사람은 가깝고 하느님은 멉니다.
인간 사랑은 가깝고 하느님 사랑은 멀기만 합니다.
이렇게 먼 하느님 사랑을 가깝게 가져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이유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자녀들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려고 하시니
자기 사람들을 뺏어간다고 생각한 세상 권력자들이 주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으로 모였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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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01년 911테러를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2,996명이 사망하고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납치된 4대의 비행기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 청사, 그리고 백악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번째 비행기는 제1세계무역센터를, 두 번째 비행기는 제2세계무역센터를, 세 번째 비행기는 국방부 펜타곤 청사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그 결과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납치범들을 향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이 비행기는 유일하게 테러범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 목표였던 워싱턴 D.C가 아닌 펜실베이니아 주 근처 광산 벌판에 추락하고 맙니다. 이 안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죽었지만, 도시 안에서의 충돌을 막아 많은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많은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직접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셨던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인데, 도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징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점령자 로마인들이 쳐들어와서 민족들을 짓밟을 것이라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백성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으로 이끌 예수님을 없앨 생각만 합니다. 로마가 싫어할 것이라며 미리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십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생만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사랑의 삶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보여 주신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쉽고 편한 것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성주간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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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같이 모이는 것은 시작을 의미한다. 같이 협력해서 일하는 것은 성공을 의미한다(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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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입니다. 곧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자로의 장례식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 곧 산헤드린을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메세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가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의 죽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는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재로서 예언한 것”(요한 11, 51)임을 밝혀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모하게도 기회주의자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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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희생해야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시키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늘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 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좀 더 청념하고 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 그리스도를 가슴에 모시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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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근에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싱크대에 있는 음식물 분쇄기가 고장 난 것입니다. 원인은 분쇄기에 음식물을 아예 넣지 않고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식이 되면서 하수관도 부식되어서 잘못하면 물난리가 날 뻔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사시던 집도 동생 수녀님이 가끔, 관리를 해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문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디지털의 세상에 살면서 여기저기 비밀번호를 지정하게 됩니다. 자동으로 기억하게 해 놓지만, 나중에 비밀번호를 기억해 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주 사용해야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가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교회가 매년 이렇게 ‘사순시기’를 전례 안에서 보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죄인인 나를 위한 헌신과 희생임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의 액정이 꺼지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인터넷에 원인을 찾아보니 원인이 엄청 많았습니다. 배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용량의 초과일 수도 있고, 시스템의 오류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손상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저의 능력을 벗어난 것 같아서 방법을 찾고 있는데 의외로 쉬운 방법을 알았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스마트폰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보험처리를 하면 된다고 합니다. 새 스마트폰이 오면 자료를 옮기면 된다고 합니다. 스마트폰 기종을 휴대하기 편해서 접이식으로 선택했습니다. 아무래도 자주 열게 되니 접촉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지난날의 모든 죄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사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고백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찰, 회개, 결심, 고백, 보속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권리를 주기도 하지만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4가지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입니다. 저는 30개월의 군 복무를 다 하였습니다. 성직자들도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해서 교구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서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자녀가 없기에 자녀를 교육할 의무에서는 제외되지만, 교구 성소국장으로 지내면서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33년 동안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5년을 더하면 저도 직무에서는 배제되는 원로사목자가 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아는 율법학자라고 해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사제라고 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다고 다짐한 바리사이파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권력을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구원은 능력과 직책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겸손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선행을 통해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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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주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둘로 나누면 능동의 시기와 수동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삶이 활발한 능동의 때를 마무리 짓고 서서히 수동의 때로 넘어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때 그토록 활발했던 치유 활동도 조금씩 줄여갑니다. 능력의 메시아로서 전지전능, 무소불위(無所不爲)한 모습도 사라져만 갑니다.
한때 그토록 흠모의 눈길을 던지던 사람들, 기를 쓰고 예수님 뒤를 쫓아다니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갑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따라나섰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나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일 것입니다. 더 이상 기적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 결국 수동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능동의 시기,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120% 이상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수동의 시기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때입니다. 묵묵히 말입니다.
끌려가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적대자들의 잔악한 손길 앞에 묵묵히 서 계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 십자가 죽음을 완수하기 위해 그간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던 모습을 완전히 접습니다.
우리 신앙의 길도 주님의 길과 같을 것입니다. 능동적인 신앙의 길을 걸을 때도 있고 수동적으로 주어진 길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모든 길을 주님 닮은 모습으로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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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에서 얻은 깨달음
그림 연습 삼아
유명한 성화를 모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모사이지
정해진 번호에 정해진 색을 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림 속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칠하려는데
양쪽 눈의 색이 다른 번호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즉 처음 이 성화를 그린 작가가
아기 예수님의 눈동자 색을 각기 다른 색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작은 부분에서도 작가의 신앙이 드러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눈의 눈동자 색이 다른 이유는 이것일 것입니다.
지상과 천상, 모든 것의 주님이신 예수님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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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회개하라, 살리라.”(에제18,31ㄱ.32)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많이들 아프고 병든 모습들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고 제대로 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니 매우 적습니다. 정말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빛을 잃고 방황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입니다. 너무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히 지도자들은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도해야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가 따릅니다. 사순시기 막바지입니다. 역시 답은 단 하나,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몫의 일을 하며 제대로 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벽 새롭게 눈에 띈 말마디들이 고마웠습니다.
1.서울 이경상 주교의 문장이 확정되었고 사목표어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Vivere In Corde Jesu)”,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목표어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 성심으로 살고 싶음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2."세상과 벽을 쌓는다면 갇혀있는 나와 마주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지겹다면 오히려 사람 속으로 들어가라. 하루 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곳으로 떠나면 무지렁이로 끝날 뿐이다."-다산
2.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사 추기경의 다섯 번째 사순강론 성서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고 청중 맨앞 한복판에 경청하는 교황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누구든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누구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웅변하는 강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 섭리의 결과요, 신의 한수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곤 도대체 해명될 수 없는 공동체 삶의 신비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요 우리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 그리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수도공동체 삶을 “렉시오디비나”했을 때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다 필요했다.
3.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4.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넷으로 요약되는 하느님 섭리의 깨달음이요, 지금도 이런 깨달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서 진행된 수도원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의 주제도 “하느님의 섭리”였고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모든 것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그분이 지으신 것은 잠시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계획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17,28)
하느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좋고 나쁜 모든 일 안에, 심지어 고통스러운 일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우연 속에도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삐뚤빼뚤한 선 위에서도 반듯하게 쓰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우리 모두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잃지 않고 반듯하게 사시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이런 모범적 섭리의 인물이 오늘 복음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중에 말씀하시지 않지만 대사제인 카야파가 우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입니다. 이래서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니 이 또한 하느님 섭리안에서 진행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시니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겠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굳게 믿으며 묵묵히 흔들림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어 당신 몸의 성전을 통해 영원히 우리 삶의 일치의 중심이 될 것임을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구원 섭리의 원대한 꿈의 실현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안에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대로 우리 모두 이 거룩한 성전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이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안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참 좋은 협력자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리라.”(예레31,10ㄹ).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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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와 나>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너와 더불어
있을 수 있는
나는 참으로
있는 나이니
없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참으로 있고
너와 더불어
있을 수 없는
나는 참으로
없는 나이니
있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참으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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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3.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요한 11,51)
카야파가 자기 말의 뜻을 알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힘이 우리에게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어떤 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힘이 우리를 부추겨 어떤 말을 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히 몰아지경에 빠져 정신의 기능을 활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고 자기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듯 보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에서 나온 말은 이해하는 반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따금 있습니다. 대사제 카야파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 말은 그 스스로 한 말이 아니었고, 그는 자기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배우셨고,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사랑은 자연적인 선함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미리 알고 계셨던 형상들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지으시고는 그들이 자신과 더불어 자신의 선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어느 한 피조물을 다른 피조물보다 더 사랑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피조물이 문을 활짝 열어 그분을 받아들이는 만큼, 하느님은 자신을 그들 속에 쏟아 부으십니다. 나의 영혼이 치품천사처럼 활짝 열리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자신을 치품천사에게 부어주시는 것처럼 나에게도 가득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원둘레에다 여러 개의 점을 찍고 중앙에다 한 개의 점을 찍어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중앙에 찍힌 점은 원둘레에 찍힌 다른 모든 점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습나다. 만일 원둘레에 찍힌 여러 개의 점 가운데 하나가 중앙에 찍힌 점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면, 그 점은 원둘레에 있던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앙에 찍힌 점은 제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14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믿음의 다섯 기둥'
6세기에 아라비아반도 안의 아랍인 부족한테서 발생한 이슬람교가, 단시일 안에 전 지중해 연안 지역과 아프리카 북부 지역 그리고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10세기 전후로 이미 아랍인들의 종교로서가 아니라 인종과 국경을 넘어 세계적 보편 종교로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무하마드와 그가 받은 계시 종교로서의 <꾸란>이 지닌 영적 감화력이나 초기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논외로 하고서 두 가지로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종교 발전의 역사적, 사회 경제적 조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조명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중 종교로서 확산될 수 있는 단순 명료한 교리적 가르침의 탁월성에서 찾는 것이다.
종교 발전 운동의 역사적 조건으로서 사회 경제적 조명이란, 다름 아니라 아라비아반도의 메카를 중심으로 하여 그동안 지탱되던 대상(隊商)무역 중심의 경제 체계와 사회 체계가 6세기 이슬람교 발생 무렵에 이미 이란, 이라크 지역의 사산 왕조로 옮겨간 사실에 기인한다. 유목민과 농민간의 경제적 긴장 관계 조성, 도시 상업 귀족과 소상인의 계급 분화, 메디나의 빈농과 보다 넓은 땅을 필요로 하던 베드윈 족의 대외 팽창 충동, 분열주의적이던 아랍 부족들간의 분쟁 극복의 필요성, 정통 봉건 영주들의 불법적인 착취 등 제반 사회적 갈등 상황이 무하마드가 제시한 유일신 신앙을 중심으로 중동 사회가 통합되는 필요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
이슬람교의 성공적인 세계 포교와 안정된 신앙 공동체의 수립 및 지탱은 이슬람교가 제시하는 단순한 형태의 '다섯 가지 믿음'의 기둥에 있다.
전통적으로 이슬람교의 ‘신앙 오주(五柱)'라고 부르는 내용은 기본 신조 고백(Shahadah), 기도(Salat), 단식(Saum), 자선(Zakat), 성지 순례(Hajj)를 말하며, 어느 이슬람교 교파에서는 성전(지하드)을 추가하여 여섯 기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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